지난 4월11일부터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되고 있다. 장애인을 고의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차별하면 3천만원 이하의 벌금과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벌률이다. 이게 웬말인가 싶을 것이다. 자격지심이 강한 장애인 때문에 공연히 피해를 보게 생겼다고 불쾌해할지도 모른다.

법을 시행하기에 앞서 사람들에게 '당신이 갖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홍보하고 교육했어야 하는데 아무런 준비없이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혼란이 빚어질 것이다.

특히 불자들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불자들은 장애인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 장애를 갖게 됐다고 혀를 찬다. 장애를 죄의 대가로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다. 만약 이런 소릴 장애인이 듣는다면 바로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라 법적인 절차를 밟을 것이다.

불자들이 잘못 알고 있는 상식 때문에 불교는 장애인과 거리가 생겼지만 불교야말로 장애인을 편견 없이 대하고 있다.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 아나율은 시각장애인이다. 이처럼 불교에 있어서의 장애인은 소외가 아니라 이끌어가는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불교에서는 장애인을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기에 장애인 인식은 긍정적이다. 그리고 장애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해 주어 사회 속에서 그 능력을 평가받게 하기 때문에 미래지향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불교의 업설(業說) 때문에 부정적이 되었다.

그것은 업에 대한 잘못된 해석 때문에 생긴 것이다. 업은 만든다를 어원으로 하는 개념이고 작용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업을 만드는 원인은 하나가 아니고 불특정 다수이다. 그것을 연(緣)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자기 혼자 만든 업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고 했을 때 그것을 그 개인적인 업으로 판결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없는 세상이었다면 그는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업의 필연성은 외면적인 것, 즉 남녀의 구별과 같은 외적 생물학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업의 작용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불교는 인간적 생존에 관한 종교이기에 내적인 의지를 조건으로 해야 한다. 부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출생을 묻지 말고, 단지 행위를 물어라-

이렇게 본다면 장애를 개인의 또는 한 가정의 업으로 볼 수 없다. 긍정적인 장애인 인식의 걸림돌이 되어온 업 문제를 이렇게 해석을 하는데 납득이 된다면 우리 불교에서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장애인 인식을 정립시킬 수 있다.

바로 연기론(緣起論)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적인 모든 존재는 공간적, 시간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생성, 발전한다는 것이 연기론이다.

그래서 타인의 아픔과 고통이 곧 나의 고통과 아픔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불교의 장애인 인식은 장애인과 일반인을 구분하지 않는 원융(圓融)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장애인들이 원하는 장애인에 대한 의식이다.

부처님은 분별심을 갖지 말라고 하셨다. 장애인이다. 비장애인이다. 하는 구분이 필요 없다. 모든 사람은 평등한 것이다. 따라서 누가 누구를 차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보면 부처님이 장애인차별 금지의 원조이다.

불교는 종교라기보다 우리 한국인들의 정서적인 근원이기 때문에 불교의 장애인관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한국인의 장애인관이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사회적 이슈가 될텐데 불교의 장애인관을 널리 홍보하고 교육하면서 장애다 비장애다 하는 분별심을 버리도록 한다면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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