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리를 지향한다. 그러나 다수결의 원리가 지배했던 적도 있지만, 민주주의의 핵심은 토론을 통한 적절한 타협을 우선 시 한다. 그 이유는 다수결의 원리가 종종 불합리적인 것을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는 함정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다수결의 원리가 오히려 다양성을 매몰시키고 독재를 합리화했던 것을 본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다수결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악법도 법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를 죽인 법정을 의롭다고 지칭하는 세력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법정과 군중 역시 그리했다. 당시 법정은 군중들을 회유했다. 법정의 판결을 합법적으로 조장하기 위하여 군중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그 판결의 결과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러나 예수는 더 많은 예수쟁이들을 만들어냈고, 더 많은 예수쟁이들 역시 소수자라는 명예로 인하여 죽어갔지만, 21세기의 지금 전 세계에 예수쟁이들이 없는 곳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이는 대한민국의 역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다수결의 원리에 의하여 독재가 자행되고, 다수결에 의하여 저항되고, 다수결에 의하여 뒤집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처한 현실은 국회내의 다수결의 원리와 국회 밖에서의 다수결의 원리가 극명할 정도로 상반된다는 점이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사실 정치는 종교와 다르다. 종교는 절대적인 것(the Absolutely Absolute)을 추구한다. 그러나 정치는 상대적으로 절대적인 것(the Relatively Absolute)을 추구한다.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종교는 타협을 모른다. 절대적인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는 가능하면 가장 덜 상대적이면서 절대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협이 중시되고, 고도의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의 현실은 정치가 종교화되어 가고 있고, 종교 역시 정치화되어 가고 있는데 비극이 있다.

우리나라는 옛 역사부터 정치의 현실에서 종교적인 것을 추구하는 모습을 띠어왔다. 적이 아니면 동지였다. 그 이유는 단일민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침범했던 외국세력은 이러한 우리의 국민적인 특성을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고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결국 외세의 조종에 의하여 국민 내의 분열이 쉽게 조장되기도 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세계 각나라에 흩어져있는 한국사람들이나 국내에 있는 내국인들의 모습에도 쉽게 발견되기도 한다.

자기의 주장보다는 군중의 심리를 쫓아간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려고 하지않는다.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니?" TV 토론에 나온 사람들 역시 유사하다. "당신의 생각에는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에서 나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 종종 대다수와 다른 의견을 피력하게 되면 왕따를 당하거나 지나칠 정도 이념적 편향성을 가진 자로 규정되거나 너무 튀는 사람으로 오해를 받게 된다.

이는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보다는 "정답을 골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익숙해져 버린 교육현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도 있고, 이러한 사회에서 능숙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국제화,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갖는다" "너는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구나"라는 부분을 상호 존중하면서 건전한 대화, 토론, 다양성의 존중 속에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가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여전히 한국사회에서는 장애인은 소수이다. 장애인 중에서 자기 의견을 내기 힘든 정신지체·발달장애·정신장애인·언어장애인들 역시 소수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독립된 의견을 가진 사람으로 존중받는 사회가 등장해야 한다. 보다 바람직한 것은 다수가 이러한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하나의 독립된 주장으로 인정하고, 오히려 대변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무조건 비난과 힐책보다는 나와는 다른 의견 비록 그것이 소수자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존중하는 문화를 창조해 나가야 할 것이다. 다수결을 비난하면서 또 다른 다수결로 부딪혀 나가는 한 그 틈 사이에 낀 소수자의 의견을 여전히 제 몫을 찾지 못할 것이다. 다수결보다는 다양성을 존중하여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그러나 독립적으로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래야 장애인들의 독립성이 존중받게 될 것이다.

이계윤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과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밀알선교단과 세계밀알연합회에서 장애인선교현장경험을 가졌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 혜림어린이집 원장과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으로 장애아보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와 장애인,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 이삭에서 헨델까지, 재활복지실천의 이론과 실제, 재활복지실천프로그램의 실제,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펴내어 재활복지실천으로 통한 선교에 이론적 작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 칼럼난을 통하여 재활복지선교와 장애아 보육 그리고 장애인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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