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좀 긴 푸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아야겠다.

입학을 앞두고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짊어지고 다닌다. 머리가 아파오고, 죄 지은 양 놀라기도 하고, 답이 보이지 않는 시험지를 받아든 기분으로 여기 저기 귀동냥을 다니기도 한다. 서로 위안을 삼기도 하고 한 걸음이라도 앞선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 해주고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이 될지 아니면 그대로 묻혀 질지 모르겠지만 듣는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대로 심각하게 귀를 기울인다. 부모의 마음이 그러하다. 특히나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더욱 절박하고, 절실하기만 하다.

장애 아이를 둔 것이 죄를 짊어진 것은 아니다. 출발은 거기서 부터라는 생각이다. 입학을 하면서부터 고개를 숙이고 괜히 가지는 미안한 마음이 더 큰 상태에서 아이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진정 미안한 생각을 해야 할 대상은 장애아동을 위한 어떤 교육환경도 만들어 내지 못한 학교와 교사들, 그리고 교육 행정가들이다. 우리가 고개 숙이고 미안한 마음에 속으로 말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서 지낼 일이 아니다.

아이의 모든 것을 공개하고 그것들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부모 스스로 자신 있는 행동을 하고 생각을 하게 될 때 아이의 환경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모 스스로 장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는 것도 급선무라 할 수 있겠다. 단지 보호받고, 보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울리고, 함께하면서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을 고민하고 그것들을 교사와 공유해 나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의식이 필요하다.

우리 아이들이 특수한 아이가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 비해 조금 부족할 뿐이라는 일반적인 생각들이 모아질 수 있어야 환경이 변하고 의식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학교에 가면서 가장 먼저 상대하는 사람이 교사다. 교사도 아이를 두고 협의하고, 고민하고, 답을 만들어야 할 사람이다. 기본적인 개념으로 본다면 교사와 부모는 동등한 선에서 서 있다고 해야 한다. 흔히 ‘아이를 맡긴 게 죄다’라는 넋두리를 하는데 이는 부모 스스로 아이를 인질(?)로 삼아 상대로 하여금 인질범(?)이 되게 만드는 꼴이다.

자신 있는 모습을 요구하는 것은 서로의 환경이나 상황을 공유하고 그 상태에서 아이를 위한 환경을 함께 만들어 가자는 이유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표현되는 것에서 스스로를 치켜세울 필요가 있다. 자만하거나, 오만하게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말과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대화라는 것은 서로의 생각을 조율하는 과정이지 상대를 누르고 일어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서로의 환경을 놓고만 이야기 한다면 교사의 경험이 항상 우위에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장애아를 가르치고 장애를 이해하는 부분에서는 부모의 경험이나 지식이 앞선다 할 수 있음이니 누가 넘치고, 모자라고 하는 셈법이 필요치 않다. 서로의 경험을 나누려 할 때 교육환경이 제대로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아이들은 다양한 체험을 자유롭게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부모의 자신감은 언제 어디서건 발휘될 수 있어야 한다. 교사마다 성향이 다르고, 운영의 방식이 다르다. 한 번 이야기 해보고 서로 맞지 않는다고 입을 닫고 '일 년만 버티자'는 식으로 간다면 그 기간 동안 아이에게 주어지는 일상의 모든 것들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해보고, 안되면 다시 해보고….

대화를 하면서 '나는 문제가 없는지' 생각해 보고, '상대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기도 하면서 서로의 문제에 대해서 다시 털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아이의 교육환경을 학교현장에서부터 바꾸어 가자는 조금 더 큰 목적을 가지는 것이다.

교사가 변하고, 학교가 변하고, 부모가 변해야 교육현장이 변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될 때 우리 아이들은 더 좋은 여건에서 생활 할 수 있는 것이다. 해보고, 또 해보고 그래서 꼭 이루고 말겠다는 신념을 가질 수 있을 때 우리는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입 닫아 놓고 뒷전에서 ‘누구는 어떠니, 누구는 또 어떠니’하면서 푸념을 털어 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거나, 변화가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푸념을 하듯이 교사와의 관계를 만들어 간다면 더 쉽게 접근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장애아동의 부모들은 마치 자신이 몹쓸 짓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고맙고 미안하니 내가 좀 참아야지 하는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행동자체가 스스로 모든 권리를 내놓고 지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당당한 부모가 당당한 아이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늘 가슴에 담고 지내야 할 것이다.

학기 초에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하루를 정리하기도 전에 다른 일상이 밀려오는 숨 가쁜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을 양보할 것인지 스스로 선을 정해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요구를 일일이 수용하면서 지낸다는 것은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끝없이 낮추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고 그 경우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올바른 해결책을 만들기 보다는 부모가 모든 것을 가지고 가야하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형국이 될 것이다.

장애학생에 대한 교육환경이 조성되지 못한 현실에서 급식, 현장학습, 수련회, 도움반과 원반에서의 생활, 교실청소, 그리고 크고 작은 행사 등등 불려 다닐 일이 수도 없이 많다. 무엇을 하든 그것이 누구를 위해 해야 하는지, 이것이 보편적인 것인지 아니면 특수한 것인지, 강요는 없는지, 꼭 부모의 참여가 필요한 것인지 가늠해 보고, 행동을 해야 한다. 그것을 어려워 할 일이 아니다.

모든 일상을 따져가면서 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표현을 하면서 행동을 하자는 것이다. 시키면 한다는 식이 아니라 필요성에 대해서는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에 해당한다고 여기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한번쯤은 대들어(?)보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사고(思考)의 중심에 어떤 것을 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에 있다고 본다. 부모가 교사를 믿지 못하고, 존중하지 못한다면 혹은 그 반대라면 피해는 아이에게 돌아간다. 가장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으며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으면 바로 해결이 가능한 문제이기도 하다.

생활의 중심은 아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 그것을 서로 인정하고 출발한다면 문제가 발생할 일이 없을 것이다. 서로의 환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만큼 알아간다는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도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의해 나가는 분위기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해의 폭은 그래서 필요하다. 내 방식과 다른 방식의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환경이 다른 생활을 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서로 인정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여기에 있는 것이고, 그런 것들은 서로의 노력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모든 것의 전제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말이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그래서 듣기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함께가는 서울장애인부모회 소식지에 실었던 글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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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서울 생. 지적장애와 간질의 복합장애 1급의 아이 부모. 11살이면서 2살의 정신세계를 가진 녀석과 토닥거리며 살고 있고, 현재 함께 가는 서울장애인부모회에 몸담고 있습니다. 장애라는 것에 대해서 아직도 많이 모르고 있습니다. 장애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지내온 것이 무지로 연결된 상태입니다. 개인적으로 장애라는 것이 일반의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으며 그런 생각은 아이가 자라 학교에 갈 즈음에 환상이란 것을 알게 돼 지금은 배우며 지내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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