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춘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소록도 국립병원에서 일어나는 아야기를 통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찰을 담은 한국문학의 대표작이다.

서비스 공급자가 지배자가 되고, 지배자는 천국을 운운하며 노동력을 착취하며, 결국은 영혼마저 앗아가 죽은 자만이 말을 하는 사회로 만들어버리고, 집단의 희생을 통한 미래의 약속은 원장의 우상화로 전락하고 만다.

조세희의 작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는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도시빈민의 궁핍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약자의 패배감과 적개심을 잘 그리고 있다. 낙원구 행복동에서는 결국 적개심과 터전을 잃은 마지막 발악만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 작품에 장애인 시설을 적용해 한 번 살펴보자.

장애인 시설들은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고, 주는 자의 위력에 굴욕적으로 서비스를 받아야 하며, 복지라는 미명 아래 다람취 쳇바퀴 돌듯 매일매일의 일상은 전혀 변화가 없다.

기초생활수급비 통장과 도장을 스스로 맡기지 않으면 시설에 입주가 되지 않는, 선택권을 박탈당하고도 선택권의 행사로 포장되는 현실, 갖가지 인권침해에 대해 침묵하여야 하고, 뭔가를 개선해 보겠다고 나섰다가는 인간성이 별난 문제인간으로 찍힐 뿐이며, 장애인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있다는 운영자와 종사자에 의해 삶을 갉아먹히며 결국 자아정체성도, 자존감도 잃고 무력해져버리는 삶을 살게 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는 아프락시스(abraxas)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새가 알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결국 죽은 생명이 되고 만다. 알이라는 생명을 담고 있는 소우주는 자신을 보호해 준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결국 죽게 된다.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것은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고 태어나 자신이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야 하는 인간 모두의 운명이라고 한다.

인간은 결국 고통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고, 고통으로 시작하여 고통으로 생을 마감해야 한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싸워야 한다. 새가 알에서 껍질을 깨고 날개를 펴고 신의 세계로 날아간다는 것은 ‘데미안’이 주인공 싱클레어의 성장기 고뇌와 투쟁, 성장통을 통하여 자연주의에 의한 자기 발전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러한 발전에는 다른 시각으로 자각하여 스스로 재발견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시설 거주 장애인에게 있어 세계의 전부는 시설 내부의 작은 공간이다. 또 다른 진실된 세계를 보려면 시설에서 나와야 한다. 시설은 분명 오늘의 중증 장애인 본인을 있게 한 보호장치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설에 안주하는 순간 정체성과 자존감은 죽어버리게 되고, 내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오늘을 다시 맞게 되며, 매일매일 같은 생활 속에 사육되고 만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도 없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도 없다. 세계의 발견이 자신의 발견이다. 자신의 보호막인 알의 껍질처럼 시설은 내용이 아니라 껍질에 불과하다. 결국 진실한 주체는 본인인 것이다.

국제장애인권리협약에서 선언하고 있듯 장애인은 법적 보유능력과 행위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권리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 아무리 중증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판단능력이 부족한 지적 장애인이라도 그러하다.

법적 능력의 인정이 배제되면 인간으로서 존재도 배제된다. 존재라는 실체는 법적 능력의 인정 없이는 인간으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삶의 운영자가 되느냐는 마느냐의 문제는 우주와 세계의 주인인가 노예인가가 판가름한다.

많은 종교 단체에서 ‘새롭게 하소서’ 노래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시설 장애인들에게 신앙생활과 신의 가호를 기원한다. 그 것이 축복의 한 방법이고, 장애 역시 신앙심으로 극복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탈시설이란 실천을 통해 새롭게 하지 않는 시설내 생활은 신의 진정한 보호를 가로막는 일이다. 시설에서 인간적으로 보호를 하고 있어 신의 보호가 필요 없으니 신은 할 일이 없다.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둥지를 틀고 사는 것은 알에서 깨어나 새로운 세계로 날아가는 날개를 돋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장애인이 새로운 생활을 하기 위한 고통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행동이 없으면 내일이 없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나니라’와 같이 알을 깨는 것은 언어의 수단인 부리로 하는 것이다.

내일이 오늘과 동일하게 반복만 되는 시설에서 나와 새로운 내일을 맞는 세계에서 살기를 원할 것이다. 그냥 정물화된 세상이 아닌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난 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는 세상을 느끼며 살아가기를 바랄 것이다.

그 아름다운 세상과 정물화된 세상은 느낌만 다를 뿐 같은 세상이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그러나 같은 세상이지만 그 세상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는 그만큼 다른 것이다.

A라는 친구가 있어도 서로 다른 의미의 친구이듯, 있다는 존재의 동일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의 의미가 소중한 것이다. 의미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다.

시설이라는 보호막 속에서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중증장애인들이 2만 4천명이나 된다. 2만 4천 개의 심장이 뛰고 있음은 이 심장의 주인들이 새로운 세계로 날아오를 것인가, 아니면 그 알에서 생을 마감할 것인가의 중요한 문제로 인식된다.

부디 장애인들이 스스로 자기의 생을 결정하고,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며,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자신이 주인이라는 것을 느끼는 삶, 서비스를 받는 장애인이 아닌 지역사회의 한 일원으로 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그러한 생활을 실현할 수 있도록 억압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고, 감사를 강요당하던 삶에서 깨어나 새로운 세계로 날아 자립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새롭게 하소서!'는 장애인 자립생활의 노래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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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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