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집으로 돌아오던 길 (1)

아이가 불구인 것이 엄마의 죄인 것 같았다

2005-05-18     칼럼니스트 김미선

-열 살에 초등학교에 간 아이

나는 첫 돌을 지나고 소아마비를 앓는 바람에 방 안에서만 기어 다니는 아이였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1960년대였던 그때는 동네 구장이 취학 통지서를 집에 가져다주었다. 여덟 살이던 그때도 나는 방안에서 기어 다니고만 있었다.

“나이는 됐지만 저 몸으로 어떻게.......”

부모님의 한숨과 자탄 속에 내 여덟 살의 봄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해 구장님이 다시 우리 집을 방문했다.

부모님의 한숨과 시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때는 결코 만만치 않은 내 울음소리까지도 함께 섞여들었다. 나도 오빠나 언니처럼 학교에 가겠다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학교에 갈 수 있을 지는 나도 몰랐다. 그냥 나도 오빠나 언니처럼 똑같은 인간이니까 학교에 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울고 또 울면서 떼를 썼다.

그때 방법을 찾아내신 분은 우리 아버지셨다. 도시에서 목발을 본 기억을 떠올리시고는 우리 동네의 상집을 찾아가셨다. 그 집은 나무를 자르고 문지르고 옻칠을 해서 크고 작은 밥상을 만드는 집이었다. 아버지는 그 아저씨와 의논을 해서 처음으로 목발이라는 것을 만들어다주셨다.

늘 기어 다니던 아이는 그 목발을 잡고 처음으로 일어나보았다. 그러나 너무 어지럽고 겁이 나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것보다는 훨씬 더 낮고 안정감 있어 보이는 마루 끝을 잡고 일어서는 연습을 먼저 해야 했다.

어린 눈에도 기어 다니는 세상과 일어서서 보는 세상은 확연히 다른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어나야만 학교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열 살이 되던 봄에 나는 드디어 학교라는 곳엘 가게 되었다.

-담벼락에 서 있던 아이

나는 아버지의 짐 자전거 뒤에 담요를 깔고 앉아서 학교로 갔다.

머리카락을 날리던 바깥바람은 어찌 그리도 세차고 시원하던지, 가방을 어깨에 메거나 들고서 부지런히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은 얼마나 용감해보이던지 나는 새로운 모습들에 가슴이 뻥 터져버릴 것 같았다.

가슴에는 하얀 손수건이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여기에다가 노랗고 파란, 분홍색이고 하늘색의 리본을 달아주었다. 반을 표시하는 색깔인 그 리본 위에는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이걸 달고 아이들은 한달 가까이 운동장 수업을 받았다.

차렷! 열중 쉬어!

옆으로 줄 맞추기

앞뒤로 줄맞추기.

그 자리에 앉기, 서기.

하나 둘 셋! 큰 소리로 외치면서 행진하기.

그렇게 익숙해지면 5,6학년 언니들이 풍금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선생님이 풍금 앞의 의자에 앉아서 발로 패달을 눌러가며 연주를 하면 신입생인 우리들은 율동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아니, 그 자리에 나는 없었으므로 ‘우리’가 아닌 ‘그들’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그들이 부지런히 행진을 하고 노래를 하거나 무용을 할 때, 나는 언제나 햇빛 비치는 교실 앞 벽에 기대어 혼자 서 있거나 앉아 있곤 했다. 아무도 나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하루는 내 옆에 함께 서 계시던 엄마가 수업이 마칠 때를 기다려 선생님께 말했다.

“운동장 수업이 끝나고 교실에 들어갈 때가 되먼, 그때 우리 아아는 학교에 오면 안 되겠습니꺼?”

학교에 오느라고 모처럼 고운 한복을 차려 입은 엄마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저기 저 아아 말입니더”

우리 엄마가 교실 바깥벽에 혼자 서 있는 나를 가르킬 때에야 선생님은 아,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마, 그리 하이소!”

너무나 간결하게 떨어지는 선생님의 허락에 우리 엄마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래야 했다면, 그때꺼정 정녕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면, 아이를 왜 일주일이 넘도록 혼자서 담벼락에 세워 놓아야 했던 것일까, 억울함과 분노에 찬 한 소리가 가슴을 치고 올라왔지만 엄마는 꿀꺽 삼켜야 했다.

그게 누구의 탓도 아니고 바로 엄마의 죄인 것 같아서였다. 다른 아이들은 멀쩡하게 뛰어갔다가 잘도 뛰어오는데 왜 우리 아이만 이렇듯 불구자가 되어야 했던 것일까. 이것이 모두 죄 많은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엄마의 가슴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계속

(2004에 '현장 특수교육' 9,10월호에 실었던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