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네기홀 무대에 서는 그날까지
시각2급, 지체1급 배강오 씨의 삶 - ③
“그래도 저는 사회복지과를 나온 복지사였습니다.”
2002년 대구시각장애인복지관이 생기면서 대구시각장애인연합회 이재달 회장이 같이 일을 해 보자고 했다. 그는 복지관에서 정보직업재활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에게 컴퓨터를 가르치고 직업지도를 하면서 점자출력을 했다.
“고등학교 때 트럼펫을 불었는데 한동안 음악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복지관에 근무하면서 야간에는 첨단문화회관에서 오카리나를 배우다가 나중에는 색소폰을 배웠다.
“동창회에서 집사람을 처음 만났습니다.”
2008년 A국민학교 동창회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라 동창회가 끝나고 노래방엘 갔다. 그가 부른 노래가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이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한 여자가 울고 있었다. 지금은 그의 아내가 된 박갑순(1961년생) 씨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박갑순 씨는 몇 차례 더 만날 기회가 있었다. 박갑순 씨는 이제 막 시각장애인이 되어 우울증에 빠져 있어 시각장애인 재활차원에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하기 위해 만났다. 그리고 시각장애 1급으로 등록하는 것도 도와주었다.
그렇다면 박갑순 씨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사실은 첫사랑이었습니다.”
A재활원에서 지내던 시절 서로가 가슴만 설레다 그친 풋사랑일 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가 각자의 길을 걸었다.
“저는 영덕에 살았는데 아이가 넷이었습니다.”
남편은 계약직 같은 직장에 다녔고 그는 식품공장에 다녔다. 2005년에 남편은 당뇨합병증으로 길에서 쓰러졌다.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연락을 받고 영덕 아산병원에 가보니 남편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남편이 죽어도 애들 넷은 길러야 하는데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한 친구가 동창회 소식을 전했다.
“옛날에 앞을 보지 못하던 배강오 씨가 생각났습니다.”
어린 시절 배강오의 손발노릇을 해 주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동창회에서 배강오 씨가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을 부르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는 2009년부터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음악교실을 운영했다. 오카리나와 하모니카를 가르쳤는데 음악교실은 배가오 씨가 담당했지만 강사는 외부에서 섭외를 했다.
지역주민이 20~30명 쯤 참여를 하면 그 중에 시각장애인은 10%쯤 되었다. 시각장애인이 된 박갑순 씨도 음악교실에서 오카리나를 배우면서 우울증도 조금씩 치유되어 갔다.
배강오 씨는 색소폰을 배우면서 참사랑봉사단에 참여 했다.
“참사랑봉사단에서 요양원이나 구치소 두류공원 같은 곳에 봉사를 나갔는데 박갑순 씨도 같이 갔습니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정이 들어 살림을 합쳤으나 배강오 씨의 아이들은 여전히 외가에 살고 박갑순 씨의 아이들은 친가가 있는 영덕에 살았기에 대구에서는 둘만 살았다.
“2014년에 남산종합복지관에서 합동결혼식을 했습니다.”
참사랑봉사단의 박성권 원장은 레슨을 하는 음악교실이 있었다. 박성권 원장도 색소폰이나 기타 등을 개인레슨을 하므로 음악교실이 칸칸이 연습실로 나눠져 있었는데 배강오 씨는 그 한 칸을 빌려서 색소폰을 연습했다.
“지금은 저도 같이 색소폰을 부는데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면 배강오 씨는 하루 종일 색소폰을 붑니다.”
아내 박갑순 씨의 설명이다. 필자가 대구로 배강오 씨를 만나러 간 날은 토요일 11시 쯤이었는데 그날도 아침 8시부터 색소폰을 불고 있었단다.
배강오 씨는 시각장애가 2급이고 지체장애가 1급이라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시각장애가 1급이고 지체장애가 2급인 것 같았다. 배강오 씨가 바깥에서는 스쿠터를 이용하는데 실내에서는 휠체어를 이용한다. 그러나 계단 같은 곳은 어쩔 수 없이 목발로 걸어야 했다. 배강오 씨가 색소폰을 연습하는 연습실도 지하였다. 박갑순 씨는 시각장애 1급이지만 사물은 분간 할 수가 있었기에 배강오 씨의 눈과 다리가 되어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지난여름에는 동천유원지를 지나는 데 엿장수가 각설이 타령을 하고 있기에 한곡 해도 되냐고 물었더니 하라고 하데요.”
그는 요즘 유행하는 ‘백세인생’을 색소폰으로 불었더니 한 사람이 잘 한다면서 색소폰 나발 속에 만원을 넣는 바람에 얼른 꺼내야 했다. 색소폰 속에 돈을 넣으면 막혀서 소리가 안 나온다는 것이다. 꺼낸 돈은 엿장수에게 주었더니 엿을 한 보따리나 주었는데 그 일을 계기로 요즘도 가끔 나가서 한곡씩 한단다.
“우리는 음원만 있고 악보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시각장애인이 그렇겠지만 전자키보드에서 나오는 음원으로 악보도 없이 연주를 한다. 아직 점자악보는 제대로 갖추어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카네기 무대에 한 번 서 보는 게 꿈이지요.”
그 꿈을 위해서라도 휠체어가 자유로이 다니는 연습할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고 그리고 연주할 수 있는 예술복지관이 있었으면 좋겠단다.
요즘도 낮에는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일을 하고 밤이나 주말에는 색소폰 연습을 하거나 음악봉사를 하고 있다. 또 하나 꿈에 도달하기 위해서 부산의 트럼본 연주자와 기타 연주자 그리고 대구의 배강오 색소폰 연주자, 이 세 사람이 음악봉사단을 구성하였는데 봉사단 이름이 부(산)대(구)찌개란다. 카네기 홀로 가는 그날까지 부대찌개의 번승을 빈다.<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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