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이나 앞서 간 나의 사립초등학교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께 띄우는 편지
"당신들은 제게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2004-11-08     김형수 기자

金선생님께.

선생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선생님이 계신 부산 앞바다의 그 시린 푸르름을 하늘로 옮겨 놓은듯 푸른 쪽빛 사이로 조금씩 겨울의 사그락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는 늦가을 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이제 17년이 넘어가건만 오늘따라 입학시절 처음 뵈었던 선생님의 어렴풋한 추억들이 왜 이토록 절실한 걸까요?

지난 10월 7일 대전에 사는 지체장애 3급의 장애아동이 사립초등학교장에게 ‘지체장애 아이들은 지능과 행동이 떨어져 교사들도 힘들어하고, 다른 부모들도 장애아가 들어오면 싫어한다’는 막말까지 들어가면서 입학을 거부당하는 정말 저로선 허망한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웃을 수도, 울 수도 너무 기가 막혀 화조차 나지 않은 사건을 접하면서 전 저의 초등학교 입학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취학 통지서를 받고 찾아다닌 공립학교에서 당시 뇌성마비라고 하면 무슨 전염병이라도 옮기는 존재로까지 취급을 받아가며 입학을 거절당했던 저와 부모님의 모습이 겹쳐졌던 것이지요.

그렇게 학교 문턱에서 좌절하기를 8번,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전화를 걸어 본 학교가 바로 선생님이 계신 당시 꽤나 높은 경쟁률과 심사기준을 가진 명문 사립 초등학교였습니다.

그 때 전화 통화에서 하신 당신의 첫마디가 아직도 어머니의 일기장 한귀퉁이 발간 색연필로 여전히 테두리 쳐져 있습니다. 선생님의 첫마디가 그것이었지요.

"왜 이제야 전화하셨습니까? 당장 아이를 데리고 와서 수속을 밟으세요. 추첨을 하지 않고 바로 입학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보겠습니다." 그런 말씀이셨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채 허둥지둥 당신과 교장선생님의 비호 아래 영문도 모른 채 제 손에는 어느새 입학을 할 수 있는 짧은 제비막대가 쥐어져 있었고 그렇게 20대 1의 경쟁을 뚫고(?) 억울해 하는 아이들의 울음을 뒤로 한 채 선생님 반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 그 어느 선생님도 제가 다니는 6년동안 저에게 다른 아이들에게 부담이 된다거나 무능력하다고 평가하신 적이 없었지요.

오히려 제가 4학년 때까지 '받아쓰기'를 연달아 0점을 받을 때도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글쓰기를 봐주셔고 수학 여행을 갈 때에는 교감 선생님께서 땀까지 뻘뻘 흘리시면서 저를 토함산 정상에 데려다 주셨습니다.

그 때가 80년대 초반. 그 당시 일반 학급에 다니고 있는 장애인 학생이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지요. 더군다나 저는 이번에 입학 거부를 당한 정애 아동보다 장애가 심했고, 외국에서 살다온 그 아이처럼 영어같은 특기도 없었을 뿐더러 학교 공부조차 잘 따라가지 못했는데도 선생님들은, 교장 선생님은 한번도 저의 부모님에게 뭐라 말씀하신 적이 없었지요.

당시엔 특수교육진흥법에 의무교육조항도 없었고 입학거부 처벌조항도 없었는데 선생님, 저를 그렇게 인정하고 받아주신 것에 대해 金선생님, 당신은 단지 그렇게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용기있고 호기심 많은 학생이어서 난 좋구나.”

선생님..

22년이 지난 지금, 나라도 더 발전하고 장애인 인식도 교육도 많이 발전했다는 지금, 돌아가시신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이 왜 이렇게 절실하고 그리울까요?

진보란 시간이 지나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람이 이루고 변화해야 한다는 것. 진정으로 우수한 학교는 저같은 학생을 끝까지 키워주는 학교라는 걸, 대전의 그 교장 선생님은 왜 미처 모르셨을까요?

차가운 바람에 몸건강 하십시오.

22년 못난 제자 김 형수 올림

* 김형수 기자는 에이블뉴스 누구나기자로 현재 장애인교육권연대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