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내몬 ‘장애등급 재판정’

간질 4급에서 등급외 판정…유서에 고통 가득
“더 이상 싸우기도 싫고, 더 이상 살기 싫다”

2013-07-05     박종태 기자
박씨가 남긴 유서의 일부. ⓒ박종태

“죽는 한이 있어도, 국민연금공단이 장애등급 판정을 하는데 있어 서류만 보고 결정하는 잘 못된 관행을 대법원에서 판결 내려(바로잡아) 주시고, 대통령께도 부탁드립니다.”

국민연금공단의 장애등급 재판정에서 등급 외 판정을 받은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모(39세)씨의 유서에는 울분과 고통의 흔적이 가득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박 씨는 지난 3일 오후 5시 35분 경 경기도 의정부의 한 동주민센터 내에서 흉기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사회복지 담당자에게 유서를 내밀며 ‘청와대, 의정부경찰서장, 의정부시장에게 보낼 것’이라며 3부를 복사해 달라고 한 뒤였다. 119구급차에 실려 인근의 성모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지만, 오후 8시 40분 경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장애등급 재판정 결과가 참사를 부른 거다. 박 씨는 간질장애 4급을 유지하다가 지난 5월 고착화된 장애를 제외하고 3년 주기로 받아야 하는 재판정을 받은 결과 등급 외 판정을 받았다.

박 씨의 ‘장애등급 결정서’에 따르면 이유는 제출된 최근 1년 동안의 의무기록상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발작 증상이 1번 밖에 없어 간질장애 최저등급인 5급에도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5급의 경우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월 1회 이상 중증발작 또는 2회 이상 경증발작을 포함해 연 3회 이상의 발작이 있는 상태가 해당된다.

장애등급을 받지 못한 상황에 대한 박 씨의 심경은 유서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박 씨는 유서에서 “간질장애 4급으로 기초수급비를 받으면서 살았는데, 국민연금공단의 잘못된 판정 때문에 무급으로 처리되어 더 이상 싸우기도 싫고, 경기로 정신을 잃었다고 했는데 의사는 기록을 안했다”면서 “스트레스로 정신과 상담을 받을 생각도 했지만, 더 이상 살기 싫다”고 고통을 나타냈다.

이어 “서류만 보고 기록을 올리는 잘못된 관행을 고치고, 국민연금공단의 장애판정을 하는 사람들과 잘못 진료하는 의사들을 조사해 달라”고 억울함을 전했다.

5일 오전 박 씨의 빈소가 마련된 의정부 성모병원 장례식장 영안실에서 만난 유족들은 동생을 자살로 내몬 장애등급 판정 결과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박 씨의 누나는 “간질로 약을 지금도 꾸준히 먹고 있는데 장애판정을 안 해 주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면서 4년 전부터 기초생활수급비로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는데, 장애등급을 받지 못해 수급비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아 힘들어 했을 동생 생각에 분통을 터트렸다.

또한 “두 번 다시는 이 같은 문제로 고통과 아픔을 겪어 목숨까지 끊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의정부 성모병원 장례식장 영안실에서 마련된 박씨의 빈소. ⓒ박종태

*박종태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일명 '장애인권익지킴이'로 알려져 있으며, 장애인 편의시설과 관련한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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