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안심해

2004-01-02     방귀희

엄마, 사실은 한해를 보내면서 엄마한테 편지하려고 했는데

현아가 "이모 오늘도 바뻐" 하는 거야

바쁘다고 아이를 너무 외롭게 한 것 같아서

연기대상, 가요대상 요리 조리 돌려가면서 보고

DVD로 영화 <클래식>을 같이 봤다

엄마가 있었으면 "그만 자라"했을텐데...

새벽 4시 쯤 자리에 누웠지

아 이렇게 한해가 가는구나 싶었어

영화를 보면서

난 지난 1년의 필름을 돌리고 있었지

어쩜 엄마의 일이 오랜 영화 처럼 느껴지는 거야

나 참 나쁜 앤가봐

어떻게 엄마가 없는데도 한해를 잘 보낼 수 있었을까

엄마가 없는데도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

엄마의 빈 자리가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내가 너무 싫어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니까

사랑한다고 너 없이는 못산다고 보고 싶다고 하던 사람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리고 살잖아

이제 이별이 두렵지 않어

새해에는 중환자실에 계신 구상 선생님도 가실꺼구

숙경(폐암으로 투병 중인 장애인 후배)이도 보내야 해

어쩜 우리집 노루도 갈 때가 됐는지도 모르겠어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마지막 날 숙경이한테 갔었어

이제 앉지도 못하더라구

"언니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미안해"

"언니가 왜 미안해 내가 미안하지 언니 혼자 너무 잘 되는 것 같아서 내가 언니 미워했거든"

"잘 되면 같이 살려고 했는데.... 미안해"

"알어, 언니, 장애보다 더 힘든게 암이야. 장애는 아무 것도 아냐

언니, 건강하게 오래 살어"

내 설음에 겨워 얼마나 눈물을 쏟았던지...

엄마, 이제 안울꺼야

새해는 더욱 열심히 살꺼야

그래야 살아있을 이유가 생기니까

엄마, 이제 안심해

비가 많이 오네

잠시 눈 붙이고 일어나서

샤워하고

출근 준비하고

오전부터 방송하고

오후 녹음

저녁 생방송

허겁지겁 저녁 먹고

또 어떤 일이 생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