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기가 부러지던 날

오도가도 못하고 주저앉아서

2003-09-16     이계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1학년 때까지 나는 자가용을 이용하여 학교에 다니곤 했다.

약 40년 전의 이야기.

이 당시에 자가용이라니?

적어도 나는 그랬다.

어머니 등이 나의 자가용이었고, 하교길에는 누나와 형의 등이 자가용이었다.

조금 발전된 자가용은 유모차였다.

뭔지도 모른 채 유모차를 타고 당당하게 학교에 다니던 나는 나를 바라보면서 의아하게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을 나를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생각하곤 했다.

하여튼 나는 우울증과는 무관한 존재다. 무엇이든지 나 중심적으로 밝게 생각하니까.

2학년에 되어서 아버지는 나와 함께 멀리 가자고 하신다.

유모차에 몸을 실은 나는 교통도 안 좋은 수색 근처에까지 갔다.

수색에서 서울 집으로 올 때에 나의 겨드랑이에는 목발이 끼워져 있었다. 재료가 박달나무라나?

그 목발을 짚고 집으로 오면서 자유자재로 놀고 있는 두 발을 땅에 딛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해 갔다.

집으로 온 뒤 나는 꼼짝 못하고 주저앉았다.

평생 처음 짚은 목발은 나의 겨드랑이를 사정없이 고달픈 상처투성이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지팡이를 천으로 두껍게 싸고, 또 싸고, 또 싸고….

이렇게 해서 보장구에 의지한 나의 인생은 시작되었다.

그래도 자가용이 있었던 시설이 좋았는데….

고3때 아버지는 또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하신다.

이제는 서소문이다. 조금 가까워진 곳이라 기분이 좋았다.

발이 멈춘 곳은 의료기 상사.

거기서 나는 새로운 발견을 하였다.

목발에 의지해 11년 간 지내온 내 다리는 나의 묵직한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휘어져 버린 것이다.

"초등학교 때에만 왔더라도 다리는 휘지 않았을 텐데…."

의료기 상사 주인은 속으로 되뇌이고 있었다.

아버지도, 나도 속으로 뇌까리고 있었다.

"조금만 일찍…."

보조기를 다리에 착용을 하고 겨드랑이에는 지팡이를 끼고 하루 하루를 산다. 마치 전장에 나가는 군인처럼 매일매일 중무장해야 하는 나의 삶은 반복된다.

장애자녀를 기르는 아버지도, 장애를 가진 나 자신도 재활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었다. 그저 소문에 의하여 가정형편이 닿는대로 한 때는 지팡이를, 한 때는 보조기를.... 그리고 오늘 나는 더욱 휘어져 버린 다리로 이 지구위를 밟는다.

그리고 10년 뒤.

보조기를 착용하고 여느 날과 같이 당당하게 길을 걸었던 어느 날.

태양은 뜨겁게 대지 위에 작렬하고, 세상은 밝아 보였다.

나는 설교하기 위하여 바쁘게 걸었다.(뛰어 봐야 벼룩이지만...)

그러다 갑자기 휘청 하면서 펄썩 주저앉고 말았다.

나무도 아닌 것이 보조기가 엿가락처럼 휘어져 부러져 버린 것이었다.

오도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삐삐도, 셀루러폰도 없던 시절.

간신히 공중전화에 매달려 아버지를 불렀다.

"보조기가 부러졌어요!"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소리는... "뭐 쇠가 부러져!"

기가 막힌 일이었다.

쇠가 부러지다니.

보조기에 의지하여 살아오던 나는 그 날 후로 외제를 사용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렸을 때 길거리에서 "국산품애용!"을 외치던 사람의 애국적인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래도 나의 다리에는 일제 보조기가 착용되어 있다.

나의 겨드랑이에는 미제 지팡이가 끼워져 있다.

그리고 지금 장애아동의 재활기기를 사기 위해 외국에서 보내온 재활기기 카탈로그를 뒤적거린다.

아 나는 매국노인가? 나는 한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인가?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척박한 정보, 일천한 기술, 열악한 운영, 그리고 고가의 장비.

이것이 장애인들이 접근해야 하는 재활기기의 현주소이다.

결국 외국의 재활기기를 또 기웃거려야 하는….

오늘도 길을 걷는다.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목발이 부러질지...

보조기가 또 부러질지...

모르는 인생길.

조심조심 걷는 이 길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