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의 깃발 아래” 박애와 장애인의 시민권
혁명의 깃발에 새겨진 ‘박애’의 이상
【에이블뉴스 김경식 칼럼니스트】1789년 프랑스 혁명은 절대왕정과 봉건제에 맞서 ‘자유–평등–박애’라는 인류 보편의 이상을 외쳤다. 이 세 단어는 이후 공화주의 정신의 핵심이 되었고, 프랑스 삼색기(tricolore)에 각각의 색으로 상징화되었다.
파랑(Blue)은 박애를, 하양(White)은 자유를, 빨강(Red)은 평등를 나타낸다.
파랑은 파리 시민의 색으로, 혁명의 열망과 공동체적 연대를 상징했다. ‘박애’는 단순한 감정적 우정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민들이 공공의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연대의 약속이었다. 혁명기의 박애는 자유와 평등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는 공화국을 지탱하는 사회적 접착제였다.
시민권의 세 단계와 장애인의 배제
영국 사회학자 T. H. 마샬(T. H. Marshall)은 1949년 『시민권과 사회계급』에서 시민권이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확장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그는 시민권을 세 가지 권리로 구분했다.
가장 먼저 18세기에 발전한 시민적 권리는 자유, 재산권, 법 앞의 평등과 같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권리였다. 그 다음 19세기에는 정치적 권리가 확립되어, 시민들이 선거에 참여하고 공직에 나설 수 있는 권한이 생겨났다. 마지막으로 20세기에 들어 사회적 권리가 등장했는데, 이는 교육·복지·사회보장 등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사회적 기반을 국가가 책임지는 개념이다.
마샬은 이러한 사회적 권리의 발전이 계급적 불평등을 완화하고, 시민 모두를 공동체 안으로 통합하는 핵심적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장애인은 이 세 단계 모두에서 역사적으로 주변화되어 왔다.
시민적 권리에서는 ‘정상성’을 전제로 한 법과 제도가 장애인의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했고, 정치적 권리에서는 선거 접근성의 한계와 의사소통 지원 부족으로 인해 실질적 참여가 어려웠다. 사회적 권리의 영역에서도 복지 제도가 종종 시혜적이거나 시설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장애인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파랑의 박애, 권리의 공백을 메우다
프랑스 삼색기에서 파랑(박애)은 자유와 평등이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간극을 메우는 색이었다. 자유와 평등은 법과 제도를 통해 선언할 수 있지만, 박애는 시민들 간의 상호 인정과 신뢰, 연대라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만 실현된다.
장애인의 시민권 역시 단순히 법적 평등이나 제도적 복지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활동지원, 이동권, 접근성 제도가 마련되어도, 장애인이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박애적 전환’, 즉 상호 책임과 공동체적 연대의 문화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버스 저상화와 엘리베이터 설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장애인이 버스에 오를 때 자연스럽게 공간을 비켜주고, 함께 기다리며 불편을 감수하는 시민적 문화가 형성될 때, 이동권은 비로소 실질적으로 보장된다. 이것이 바로 파랑의 의미, 박애의 구현이다.
한국 사회와 장애인의 시민권: 박애의 결핍
한국의 장애인 정책은 지난 20년간 제도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뤘다. 장애등급제 폐지, 활동지원 시간 확대,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등은 중요한 진전이다. 그러나 여전히 법과 제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장벽’이 곳곳에 남아 있다.
지하철역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장애인의 통행권은 즉시 박탈되고, 키오스크 주문이나 금융 서비스에서는 디지털 장벽이 여전하다. 장애인권리운동이 거리에서 외롭게 싸워야 하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연대의 부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는 자유와 평등이 법과 제도에 머무르고, 박애가 시민문화로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시민권을 위한 ‘파랑의 깃발’ 들기
장애인의 시민권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환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권리에서 관계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제도적 권리를 넘어, 시민들이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연대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또한 복지의 틀에서 공화국의 틀로 시선을 옮겨, 장애인을 수혜 대상이 아닌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식하는 정치적 변화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배려에서 상호책임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장애인을 ‘도와주는 선행’이 아니라,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당연한 책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야 한다.
프랑스의 파랑은 혁명의 이상이자 공동체적 연대의 상징이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의 시민권을 완성하는 깃발 또한 파랑이어야 한다. 그것은 감정적 연민이 아니라, 제도와 문화를 잇는 사회적 접착제, 연대의 색이다.
1789년 삼색기 속 파랑은 “우리는 함께 공화국을 만든다”는 약속이었다. 오늘의 한국 사회가 장애인을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도 바로 그 약속이다.
자유와 평등 위에 박애의 푸른 깃발을 세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마샬의 시민권 이론을 21세기 한국의 장애인 권리 현실에 적용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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