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정책의 sit point 접근방식에 공감하며
【에이블뉴스 김경식 칼럼니스트】김도현님의 『장애학의 시선』은 이전의 저작(著作) 『장애학의 도전』에 이어 ‘섹스·젠더, 재난·참사, 능력주의, 노동, 기후위기’ 등 동시대 의제를 장애학의 관점으로 그 시선을 넓히고 있다.
책 표지 디자인이기도 한 “누구도 뒤에 남겨지지 않는 세계-No one left behind”은 책을 읽는 동안 그리고 그 후에도 나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앞서 이 글의 제목으로 정한 ‘sit point’는 기존의 ‘stand point’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sit point’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의 시선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저자의 해석을 덧붙이자면 ‘위에서 부터의 접근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부터 접근’ 방식인 것이다.
‘sit point’의 관점에서 장애를 이해하고 정책을 설계하는 방식에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장애인을 단순히 제도의 수혜자로 보지 않고, “앉아 있는 자리(sit point)”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장애인의 구체적인 체험과 신체적 조건을 정책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단순한 관점 전환을 넘어 사회 구조 자체를 재구성하라는 요청이다.
한국의 장애인 정책은 오랫동안 행정 효율성과 비장애인 중심의 ‘정상성’ 기준을 바탕으로 해왔다. 이동권 정책은 대체 교통수단 증차에 그쳤고, 활동지원 제도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 시간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디지털 접근성 역시 안내 인력 배치와 같은 임시방편에 머물러, 장애인을 ‘예외적 사용자’로 규정해왔다. 그 결과 장애인은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이 아니라, 제도의 보완적 관리 대상에 머물렀다.
sit point 접근은 이러한 한계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휠체어 사용자의 자리에서 본 도시는 승강기 위치와 저상버스 배차 간격이 삶의 질을 좌우한다. 근자의 한 야구장의 휠체어 이용 장애인 관람석 미비에 대한 논란 또한 같은 시선에서 바라보게 한다.
또한 시각장애인의 자리에서 본 키오스크는 음성 안내의 유무가 식당과 은행, 병원을 가르는 경계가 된다. 중증장애 대학생의 자리에서 본 활동지원은 단순히 화장실 보조가 아니라 학업·노동·사회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권리의 문제다.
이처럼 당사자의 자리에서 정책을 바라보면, 지금까지의 제도 설계가 얼마나 협소했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불평등을 재생산하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국제적으로도 sit point 관점에서 정책을 재설계한 사례가 주목된다. 호주 빅토리아주 지롱(Geelong)의 ‘Inclusive Visitor Centre’ 설계 과정에서는 건축가와 설계자들이 장애인 사용자들과 함께 초기 단계부터 참여(co-design)하여 문턱의 높이, 손잡이 위치, 경사로 설계 같은 세부 사항을 경험적 시선에서 검토했다. 이 과정은 단순히 법적 기준을 충족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 이용자의 만족도를 높이며 유지관리까지 개선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남미 콜롬비아 메델린의 사례도 흥미롭다. 이 도시는 AT2030 프로그램과 협력해 장애인 주민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보도, 대중교통 정류장, 경사로, 승강기 접근성 문제를 해결해왔다. 특히 빈곤 지역과 부유 지역 간 접근성 격차가 심각했는데, 장애인의 ‘자리’에서 드러난 문제들이 정책 우선순위로 채택되면서 현실적인 개선이 가능해졌다.
아시아·아프리카 등 저자본(低資本)도시들 역시 sit point 접근의 중요성을 확인시켜준다. 인도네시아 솔로(Surakarta)에서는 장애인들이 직접 사진 일기(photo diaries)를 작성해 일상 이동에서 마주치는 장벽을 제시했고, 이를 바탕으로 도로, 상점, 공공 화장실의 개선이 이뤄졌다. 이는 예산과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장애인의 체험이 정책 성패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해외 사례는 한국 정책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장애인 당사자가 단순한 피드백 제공자가 아니라, 정책 설계 과정의 동등한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
둘째, 제도는 형식적 평등을 넘어, 실제 이용자의 체험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셋째, sit point 접근은 복지 영역을 넘어 도시계획, 교통, 디지털 기술 등 사회 전반에 적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이동권, 활동지원, 디지털 접근성 정책은 sit point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장애인의 체험적 시선에서 정책을 다시 설계할 때, 제도는 시혜적 보조가 아니라 권리 기반 제도로 전환될 수 있다. 나아가 이는 장애인을 사회의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는 정치적 실천이다.
sit point 관점의 전환을 위한 제안
첫째, 정책 설계 단계에서의 당사자 참여 보장이 필요하다. 공청회나 사후 의견 수렴을 넘어, 초기 기획 단계부터 장애인이 ‘공동 설계자(co-designer)’로 참여해야 한다. 이는 장애인의 경험이 부차적인 참고자료가 아니라 정책의 출발점임을 선언하는 변화다.
둘째, 체험 기반 평가 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 교통, 주거, 디지털 접근성 등 모든 정책은 전문가 평가와 더불어 장애인의 현장 체험 평가를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예컨대 키오스크 인증 과정에 실제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지체장애인이 참여해 ‘실사용 테스트’를 제도화하는 방식이다.
셋째, 권리 기반 접근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정책은 ‘불편을 줄여준다’는 시혜적 관점이 아니라, ‘동등한 권리를 보장한다’는 원칙을 가져야 한다. 활동지원 제도의 경우, 생존 보조에서 시민권 보장(노동, 학업, 문화 참여)으로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
넷째, 유니버설 디자인과 맞춤형 지원의 결합이 요구된다. 공공시설과 디지털 서비스는 유니버설 디자인을 원칙으로 삼되, 개인별 차이를 반영할 수 있는 맞춤형 지원 체계를 함께 마련해야 한다. 예컨대 모든 지하철역에 저상 승강기를 설치하는 것(보편적 설계)과 동시에, 개인 이동 보조를 지원하는 것(맞춤형 지원)이 결합되어야 한다.
다섯째, 정책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장애인 정책을 ‘특수한 집단을 위한 부가적 제도’로 보는 관점을 버리고, 사회 전반을 다시 설계하는 핵심 과제로 삼아야 한다. sit point 접근은 결국 “누구의 자리에서 사회를 바라볼 것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 이는 장애인 정책을 넘어 모든 사회정책의 철학적 토대가 되어야 한다.
sit point 접근은 장애인 정책의 한 방법론을 넘어, 사회를 재구성하는 정치적 실천이다. 해외의 co-design, inclusive infrastructure 사례들이 보여주듯, 당사자의 체험은 정책을 더 실효성 있고 정의롭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한국의 이동권, 활동지원, 디지털 접근성 정책이 이러한 전환을 이룰 때, 장애인은 더 이상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를 새롭게 설계하는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장애인의 자리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곧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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