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석미와 떠나는 무장애 여행지 “수원의 초록 피서지, 일월수목원”

한여름, 초록 그늘 속에서 마주한 쉼과 사색

2025-08-14     칼럼니스트 하석미
일월수목원과 나, 휠체어 여행자가 마주한 수목원의 첫인상. ©하석미

【에이블뉴스 하석미 칼럼니스트】입추가 지난 계절. 달력은 가을 문턱을 가리키지만, 한낮의 기온은 여전히 나를 지치게 만든다. 그러나 아침과 저녁, 나무가 드리운 그늘에 들어서면 숨이 쉬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하루의 온도차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그 짧은 순간이 얼마나 귀한지 알기에, 오늘은 그 그늘과 바람을 찾아 나섰다.

한낮의 열기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내가 향한 곳은 경기도 수원에 자리한 일월수목원. 수원에 있는 이곳은 도심 속에 자리하면서도 자연에 푹 잠길 수 있는 곳이다. 초록이 만들어내는 시원한 터널과 실내외 온실, 그리고 휠체어로도 편하게 둘러볼 수 있는 무장애 동선이 잘 갖춰진 공간이다. 정돈된 길과 쉬어갈 수 있는 그늘진 벤치들이 곳곳에 놓여 있어, 여름 더위를 피하기에 더없이 좋은 여행지였다.

더위 속에서도 초록을 품은 무장애 수목원이라니, 그 자체로 마음이 움직였다. ‘길이 잘 되어 있으니 안전하게 둘러볼 수 있을 거예요.’ 누군가의 말이 떠올라 휠체어를 타고 길을 나섰다.

방문자센터한여름에 만난 숨구멍 같은 공간

주차장에 도착하니 시원하게 열린 입구가 나를 반겼다. 매표소 앞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바깥의 뜨거운 공기가 서서히 식어 내려갔다. 일월수목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건 실내 로비 공간. 천장이 높고 통창으로 햇살이 부드럽게 들어오는데, 그 안에 햇빛정원이라는 원형 온실과 물빛누리홀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공간은 조용히 숨 고르듯 앉아 있으면, 바깥의 더위가 잠시 잊히는 곳이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나도 바닥이 매끄러워 불편 없이 둘러볼 수 있었고, 내부는 냉방이 잘 되어 있어 여름철에도 무리 없이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넓고 탁 트인 방문자센터 로비는 마치 커다란 숨구멍 같았다. 햇빛정원의 중심에는 100년 넘게 매산초등학교 교정을 지켜온 단풍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이 나무는 마치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듯했고, 주변으로는 양치식물과 습지식물들이 어우러져 자연의 다양성이 느껴졌다. 오래된 나무의 굵은 줄기에는 세월의 무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고, 곁의 식물은 막 심긴 듯 싱그러웠다.

햇빛정원과 마주한 순간, 유리 온실 속 100년 된 나무와 초록이 반기는 방문자센터 로비. ©하석미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잎사귀에 닿으며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유리 온실 안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야외정원의 초록빛도 참 예뻐서, 그 앞 소파에 한참이나 앉아 바라보았다. 흐린 날씨 속에서도 바깥 정원은 생기를 잃지 않았다. 빗방울이 잔디 위에서 반짝이고,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다녔다. 그 웃음소리와 바람 스치는 소리가 묘하게 들리는 듯했다. 여행 중이라는 사실도, 더위도, 휠체어의 무게도 잠시 잊혀졌다.

다산의 정원 철학과 마주하다

로비 한쪽에서는 정원기, 다산이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정원을 어떻게 바라보고, 식물을 어떻게 관찰하며, 사물에 어떤 의미를 담았는지를 글과 그림, 그리고 조형물로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휠체어로도 전시관 입구까지 전혀 불편이 없었다. 하나하나 설명문을 읽으며 전시를 따라가다 보니, 식물이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다독이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국영시서의 고요함, 국화꽃과 촛불 그림자가 전하는 다산의 사유. ©하석미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국영시서였다. 촛불 하나를 켜놓고, 국화꽃 하나를 그 앞에 두고, 벽에 드리운 그림자를 바라보며 그 모양이 변하는 과정을 천천히 감상했다는 이야기다. 단순한 풍경이지만, 그 안에 많은 생각이 담겨 있었다. 마치 잠시 멈추고, 천천히 바라보라는 말을 건네는 듯했다.

다산의 정원은 단순한 조경이 아니었다. 식물과 사물에 의미를 담고, 그 안에서 사유를 길어 올렸다. 국화 한 송이, 촛불 하나,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통해 세상을 읽어냈다는 그의 담백한 사유는 내 마음까지 고요하게 만들었다.

온실 속 모네의 정원, 계절을 건너는 문

야외로 나서니 유리 외벽이 반짝이는 전시온실관이 눈앞에 나타났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투명한 유리 외벽이 인상적인 이 건물이 도심 속 식물 궁전처럼 서 있다. 산책길과 꽃길이 온실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발걸음을 이끈다.

이곳에서는 정원을 사랑한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특별기획전 모네 × 일월914일까지 열리고 있었다. 지베르니의 꽃의 정원물의 정원을 재해석한 공간들이 온실 안에 다채롭게 펼쳐져 있어, 마치 모네의 그림 속을 산책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온실 내부는 넓은 동선과 푸른 식물들 사이를 천천히 거닐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고, 휠체어 접근이 어려운 구간에는 우회 안내 표지판이 마련되어 있어 누구나 불편함 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전시물 안내판은 휠체어 이용자의 눈높이에 맞춰 설치되어 있어 시각적 부담 없이 편안하게 전시를 즐길 수 있었다.

네의 작업실에서, 그림 속 풍경과 하나 된 특별한 체험. ©하석미

온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계절이 바뀐 듯 공기가 달라졌다. 300여 종의 식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고 있었는데, 선인장의 날카로운 선, 유칼립투스의 은은한 향기, 방크시아의 독특한 실루엣까지 자연이 건네는 다정한 인사처럼 느껴졌다. 실내지만 천장이 높고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들어 시원하게 둘러볼 수 있었고, 식물 사이사이 숨어 있는 귀여운 인형들이 방문자를 즐겁게 했다. 나무 위의 코알라, 선인장 옆 아기 캥거루, 지붕 위에 누워 있는 커다란 곰 인형까지 곳곳에 숨겨진 장난감들을 발견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나는 식물과 예술, 그리고 작은 놀라움이 함께 어우러진 특별한 정원 속에 있었다.

누구나 쉴 수 있는 길

수목원 안에는 총 세 가지 산책 코스가 마련되어 있다. ‘쉬엄쉬엄 남녀노소 산책길’, ‘오감만족 알짜배기 산책길’, ‘느릿느릿 여유만끽 산책길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쉬엄쉬엄 남녀노소 산책길을 선택했다.

온실 식물원을 나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자 숲정원이 나타났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고, 곳곳에 벤치와 의자가 놓여 있어 누구나 편하게 앉아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펼쳐졌다. 이 숲정원은 마치 도심 속에 숨겨진 작은 자연의 안식처 같았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부드러운 바람과 은은하게 켜진 조명은 바쁜 일상을 잠시 잊게 해주었고, 그곳에 발을 디딘 순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생태적으로 잘 가꿔진 이곳은 단순한 정원을 넘어, 한국형 도시숲의 따뜻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특히 휠체어를 타고도 편안히 걸을 수 있는 흙길과 데크길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라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부드러운 흙길 위에서 바퀴는 가볍게 굴러갔고, 데크길에서는 나무 냄새와 함께 발 아래로 전해지는 감촉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곳곳의 벤치에서는 사람들이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그늘 아래 앉아 숨을 고르니, 초록빛 터널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이렇게 소중하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됐다.

다산정,이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다산정원으로 향하는 입구 바닥에는 큼직한 휠체어 마크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마치 이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라고 조용히 말을 건네는 듯했다. 이어지는 데크길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부드럽게 가로지르며, 숲이 건네는 초록빛 인사를 따라 천천히 나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휠체어를 탄 나에게도 무리 없는 이 길은, 그 자체로 따뜻한 환대였다.

초록 터널을 지나며, 숲길 데크 위를 부드럽게 굴러가는 휠체어. ©하석미

길의 끝자락, 전통 정자가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자 안에는 어르신 두 분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그 곁 연못에는 연꽃이 피어 있었다. 연잎 사이를 유영하는 올챙이들, 잔잔한 바람, 그리고 정자 위로 흘러가는 구름. 나는 휠체어에서 내려 대청마루에 누워 보았다. 사방을 감싼 초록과 새소리, 바람 소리만이 들리는 그 순간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다산정 연못, 연못 위 여름의 수채화. ©하석미

이 정원은 단지 쉼의 공간이 아니라, 다산 정약용의 정신이 깃든 장소이기도 하다. 정약용은 평생 정원을 가꾸며 살았으며, 동호를 죽란사라 부르고 석류, 매화, 치자, 금잔화, 파초, 국화 등을 식재했다고 전해진다. 수원화성 축성 때 명례방에 거주하며 집 뜨락에 화분을 배치해 정원을 꾸몄고, 남인계 선비들과 죽란시사라 불리는 시동회에서 살구꽃, 복숭아꽃, 연꽃, 국화가 피는 계절마다 모여 시를 짓고 술잔을 나누며 풍류를 즐겼다. 그러니 지금 이 다산정의 풍경 또한, 단순한 자연이 아닌 사유의 정원으로 이어진 셈이다. 내게도 그 고요한 사색의 순간이 선물처럼 주어졌던,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초지원과 일월저수지, 도심 속 여름의 숨결

충분히 쉼을 가지고 초지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초록빛 풀밭이 펼쳐진 초지원을 지나자 작은 연못이 고요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물 위에는 하얀 종이배 조형물이 살포시 떠 있었고, 습지원 가장자리에서는 흰 왜가리 한 마리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조금 더 나아가니, 오리들이 모여 햇살 아래에서 한가롭게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풍경은 마치 자연이 들려주는 낮은 숨소리 같았다. 데크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도시의 소음이 멀어지고, 대신 생명의 숨결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초지원의 평화, 종이배가 떠 있는 연못과 흰 왜가리의 느린 발걸음. ©하석미

이 길의 끝에는 일월저수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8월의 일월저수지는 도심 속 여름 휴식처였다. 아파트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저수지 너머에는 길게 뻗은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짙은 초록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더위에도 불구하고 산책로를 따라 걷는 시민들의 발걸음은 가볍고 여유로웠다.

한때 일제강점기에 농업용으로 조성되었던 이 저수지는 이제 새들의 보금자리로 변해 있었다. 가마우지와 흰뺨검둥오리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물 위를 스치고, 때로는 잔잔한 수면 위에 고요히 머물렀다. 여름의 일월저수지는 탐조의 계절은 아니지만, 오히려 짙어진 초록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자연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도심 한가운데서 만난 이 고요한 풍경은, 바쁜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선물 같은 장소였다.

채소원에서 마무리

드넓은 잔디광장과 빗물정원을 지나 걷다 보면, 어느새 계절의 향기를 품은 작은 채소원에 닿게 된다. 이곳은 직접 손으로 만져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자리한 채소들이 정겹고, 그 사이사이 탐스레 달린 청포도 송이들이 초록빛 햇살을 머금고 있었다. 아직 덜 익어 풋내를 머금고 있지만, 그 생명력만큼은 여름 한가운데서 가장 선명하게 빛났다. 나는 한참이나 그 풍경 앞에 멈춰 서 계절의 숨결을 들이켰다.

계절을 머금은 청포도, 여름 햇살 아래 알알이 영근 포도송이. ©하석미
누구에게나 열린 길, 휠체어·유모차를 위한 산책로 표지판. ©하석미

그렇게 걷다 보니 방문자센터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숲과 정원을 지나온 몸에 더위가 한껏 차오를 즈음, 센터 안의 카페로 들어가 시원한 음료 한 잔을 마셨다. 단숨에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청량함에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푸르름을 지나온 길 위에, 잠시 멈추어 마신 그 한 잔의 여유는 여행의 또 다른 풍경이 되었다.

아쉬움과 바람

주차정산기, 턱 앞에서 멈춘 무장애. ©하석미

일월수목원은 무장애 설계가 잘 되어 있어 이동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

었다. 주차장 주차정산기가 휠체어 이용자에게는 접근이 불가능했다. 정산기 앞에 턱이 있고 높이가 맞지 않아 직접 이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문제로 바로 민원을 접수했고, 이후 받은 답변은 2026년 상반기에 새로운 정산기를 설치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비록 당장은 불편했지만, 개선을 약속받았다는 점에서 다음 방문은 더 나아진 환경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을 마무리하며

입추가 지난 여름, 한낮의 열기와 아침·저녁 그늘의 시원함이 교차하는 계절에 찾은 일월수목원은, 그 자체로 한 모금의 시원한 바람 같았다.

무장애 여행은 단지 도착이 아니라, ‘도착하는 과정그곳에서의 시간이 모두 중요하다. 일월수목원은 그 과정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조금의 아쉬움은, 다음에 더 좋은 길로 나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장애 여행을 위한 접근성 정보

휠체어·유모차 대여: 1층 안내소(수량 제한)

장애인 화장실: 자동문, 손잡이, 기저귀 교환대 완비

엘리베이터: 실내 주요 관람 공간 연결

산책로: 야외 테마정원 전 구간 휠체어 통행 가능

휴식 공간: 실내·야외 모두 다수 마련

 

일월수목원 관람 정보

주소: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일월로 61

운영시간: 09:30~17:30 (월요일 휴관)

입장료: 무료

문의: 031-369-2380

대중교통: 1호선 화서역 하차 후 도보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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