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상의 회복, 진정으로 삶의 회복까지 이어지려면

아무리 뛰어난 약도 그 자체로 삶의 자아효능감을 만들어줄 수는 없어

2025-02-28     칼럼니스트 김세이
회복이란 빈 컵에 물을 채우듯이 결핍을 채우는 것일까? 회복 중에서도 정신장애인의 회복은 의료적인 치료만으로 정의되지 않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얼음은 녹으며 물로 어우러지듯, 정신적 장애인의 삶 또한 고립이 아닌 사회의 일원으로 조화되어질 수 있기를. ⓒ pixabay

【에이블뉴스 김세이 칼럼니스트】 요즘 회복 패러다임에 대해 정신(심리사회)장애인에 대해서 다루는 글들을 종종 찾아 읽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정신장애인의 회복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그때그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본 글들에서 정신장애인의 회복은 공통적으로 약물 처방이나 입원 치료를 통해 증상이 잡힌 것으로 보이는 상태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완치를 회복과 동치시키는 것도 물론 아니었다. 그나마도 정신장애는 완치보단 관해 관점의 접근을 의료적으로도 하고 있다. 

당사자가 지역사회 내에서의 주도적인 삶을 회복하는 것, 정신장애가 있음에도 사회에 어우러져 일상 속 삶의 질을 회복하는 것 등 정신장애인의 회복은 증상을 줄이기 위한 의료적인 지원 이외에도 사회적, 정서적 측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정신장애인은 경제적 어려움에 극히 취약한 계층임이 여러 통계에서도 나타나는 실상이며, 이는 자기결정권을 가진 삶을 침해하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함과 동시에 그의 결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정신장애인을 포함한 정신적 장애인 전반이면 어떨까? 이에 대해서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것 같아서 글을 쓰게 되었다. 

자신이 쓸모없는 짐짝이라는 생각, 사회심리적 맥락에서 형성된다

사회심리적 맥락(socio-psychological context)은 개인의 심리적 경험이 사회적 환경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정신적 장애에서 흔히 당사자의 목소리는 전문가와 당사자 가족(부모 등)의 목소리로 대체되고 만다. 정신적 장애인은 통째로 해결해야 하는 문젯거리, '짐짝'으로 전락하는 셈이다.

많은 정신적 장애인은 생애 내내 집안의 '아픈 손가락'이고, 부끄러움과 불쌍함이고, 내부 불화의 화근까지 되고 만다. 자립마저 녹록지 못한 이런 상황에서 정신적 장애인은 더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는 내면을 갖게 됨이 필연적인 결말이다. 당사자 가족과 전문가의 목소리만으로 이것을 생생히 조명할 수 있을까?

정신적 장애인이 직접 목소리를 내고 글을 쓰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하며, 자신이 지향하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것은 이런 점에서 중요하다. 사회적 편견을 줄이고 사회와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당사자의 사회적 기능을 기르고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쓸모 없는 짐짝'을 벗어나 능동적인 사회구성원으로 의미를 찾는 것은 하나의 투쟁으로서도, 개인의 회복으로서도, 다른 당사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로서도 의미를 가진다.

물론 정신적 장애인은 능동적인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때와 위치여야만 '짐짝'이 아니라는 메시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모두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각자 하나의 과정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온전한 치료가 있는데 '정신적 장애인 출신'에 대한 차별과 낙인이 그대로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역시 회복의 중대한 방해 요인일 것이다. 또한 이는 그 자체로 의료적인 발전이 정신적 장애에 있어 전부일 수 없음을 나타낸다.

아무리 '장애가 있는 사람'의 인권을 외치는 사람이 있어도 언젠가는 발전된 의학과 기술이 정신적 장애로부터 당사자를 구원할 거라고 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일견 과학을 신봉하고 추상적인 사상을 배척하는 현실주의자(이 말이 맞나 싶지만)로 보일지 모른다. 이러한 주장은 인공지능의 성장이 주도하는 '기술적 특이점'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기술의 발전이 인류와 사회에 공헌하고 불평등을 완화하며 해방을 가져다 준 사례는 많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고 굳이 반대할 리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를 보자. 출신 차별이 낙인이 되어 다시 소수자성이며 약자성이 되지 않으리라는 장담이 가능할까?

가령 겉만으로 구분할 수 없더라도 당장 한국 사회에 ○○지역 출신 핏줄은 어떤 기질이 있다느니 같은 말도 공공연히 쓰이는 판국이다. 다문화, 비정규직 노동자, 정상가족 밖의 가족구조 등에 대한 차별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헌데 아예 온전치 못한 인간이나 몹쓸 질병으로 취급받던 것이 출신 차별에서 예외가 될까? 그것이야말로 현실적이지 못한 환상이다. 도태되어야 할 열등한 유전자 취급이나 안 당하면 다행인데 그럴 리가 있나. 해당 기술에 접근하는 비용으로 인한 접근성 격차는 오히려 취약계층의 소외 강화를 불러올 수 있다.

'치유'된다고 해도 편견의 대상이 되고 차별받으면 무슨 의미일까. 이것을 현실적인 고민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질병이나 장애를 악으로 만드는 것은 어떤 의도이든 당장의 당사자를 사회에서 멀어지게 하고 아프게 만드는 길이다. 당사자를 괴롭히고 시민권 내지는 생명에의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권과 삶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

우리가 AI를 비롯한 기술이 빠르게 발전해도 그에 따른 인권과 윤리의식이 따라오지 못한다면 두려움을 느끼는 것과 같다. 완치할 수 있는 기술이 불러올 해방에만 기대는 것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라고 할 수는 없다.

정신적 장애인에게 자율적인 삶으로의 복귀를 지원하고 삶의 자아효능감을 가질 수 있게끔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삶을 회복해 이어가는 첫걸음이다. 증상을 없애는 것에 포커스를 두는 것이 아니라, 증상이 있어도 평범하고 가치를 느끼는 일상을 살 수 있도록 함은 이런 점에서 하나의 실현 가능한 타협이라는 의의도 가진다. 

사회적 비용 측면에서 보더라도 정신적 장애인의 자립을 지원해 세금을 납부하는 입장으로 살아가게 하는 건 필요하고 필수적인 시점이다. 정신적 장애가 있어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어야 삶의 회복이라는 것. 또한 의미있는 삶은 아무리 뛰어난 약이라도 그 약만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는 것. 이것이 기술, 과학, 의료에 대한 대립으로 악선전되어진다면 곤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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