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은 이상한 일 투성이였어요”
후원품 들어오면 바로 안 주고 창고로
감사 나오거나 손님 오면 반찬 달라져
사회복지시설 비리척결과 탈시설 권리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단은 지난 4월 10일 서울시청 앞에서 탈시설을 위한 시설생활인 증언대회를 개최했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살고 있는 생활인들이 구성한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장애인 10명이 "내가 시설에 있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면서 시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전했다. 이들은 지난 3월 25일부터 5월 13일까지 50일간 서울시청 앞에서 사회복지시설 비리척결과 탈시설권리쟁취를 위한 노숙농성을 벌였다. 에이블뉴스는 제28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진행하고 있는 장애인 주거권 특집의 일환으로 공동투쟁단측의 협조로 이날 발표된 10명의 수기를 연재한다. 공동투쟁단의 요청에 따라 생활인들의 이름은 가명 처리하고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어머니가 살아생전 조금이라도 덜 힘들었으면 하는 마음에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어렸을 땐 꿈이 많았어요. 지금은 두 가지 꿈이 있어요. 우선 몸이 안 아팠으면 하는 거예요. 될 수 있는 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프면 안돼요. 한번 아프면 너무 오래가고 정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또 다른 꿈은 자유롭게 혼자서 여행하는 거예요. 여행하면서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좋은 데도 다니고 싶어요. 사실 나는 태어나서 47년 동안 거의 밖에 나가 본 적이 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이랬으니까, 학교는 커녕 집문 밖에도 못 나가봤죠.
내 고향은 전라북도 부안이예요. 4남 1녀의 막내고요. 아버지는 25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저 세상으로 가셨지요. 태어난 다음에 집 방에만 있고 나가지는 못했죠. 집이 구멍가게를 했는데, 손님이 와서 물건 사가면 돈 받아주고 가게 지키면서 아주 조금씩 용돈을 받았어요. 몸이 이렇게 됐으니까 친구도 거의 없었어요. 얘들은 저를 놀리기만 했죠. 병신이라고 그러고 ‘앉은뱅이, 앉은뱅이’라고 하면서 놀리고 쳐다보는데 정말 죽고만 싶었어요. 아버지도 제가 이러니까 술 먹고 들어오시면 어머니를 힘들게 한다고 싫은 소리를 많이 하셨고요. 그래도 그냥 이렇게 사나 싶었는데, 어머니가 연세가 드시면서 저 돌보는 것을 너무 힘들어하셨어요. 그러는 거 보면서 내가 시설에 오겠다고 했어요. 식구들은 못 가게 했는데 어머니 살아생전에 조금이라도 덜 힘들었음 하는 마음에, 나도 나이 더 먹기 전에 오려고 한 거예요. 그때가 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였으니까 저 28살 때였어요. 어머니는 저 여기 온 다음에 딱 한번 뵈었는데, 그 뒤 4~5년 후에 돌아가셨지요.
시설은 항상 이상한 일 투성이었어요
그렇게 온 곳이 석암베데스다 요양원이었어요. 시설에 와서 몇 개월은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친구 사귀는 것도 어려웠고요. 또 나한테는 별로 그러지 않았는데 지적 장애인들은 차별하고 그랬어요. 똥 싼다고 밥 조금씩 주고, 또 어떤 직원들을 때리기도 하고. 또 시설은 항상 이상한 일 투성이었어요.
손님들은 분명 왔다갔는데, 그 사람들이 가져온 먹을 것이나 후원품을 주지 않았거든요. 나중에야 알았는데, 후원품으로 들어오는 물건을 바로 주지 않고 창고에 넣어두고 안 줬어요. 대신 유통기간 지난 과자랑, 빵을 줬어요, 라면도 그렇고. 그렇지만 8~9년 전에 새로운 원장님이 온 다음부터는 조금 바꿨어요. 새로 온 원장님은 인권을 존중해주겠다고 했어요. 대표적으로 반찬이 좋아졌어요. 예전에 반찬은 김치랑, 무말랭이랑 마늘쫑이었는데, 김치는 아주 오래돼서 정말 먹을 수 없는 거였어요. 마늘쫑이랑 무말랭이도 끊임없이 줘서 싫증나도록 먹었죠. 그런 반찬도 이후에는 세 가지에서 두 가지로 줄었고, 밥은 항상 설어 있었지요.
근데 새 원장님 오고 나서는 반찬이 달라진 거예요.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어요. 해서 우리가 매일 감사 나오라고 했어요. 감사 뜬 날이나 손님 왔다간 날은 반찬이랑 밥이 아주 잘 나왔거든요. 요즘은 시청 앞에서 농성하고 있으니까 반찬이랑 밥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김치하나가 나와도 잘나오고, 고기는 질리게 줘요. 예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도 못 먹었는데. 지금이 이 시설오고 20년 동안 가장 괜찮은 식사가 나오고 있는데, 농성장에 나오느냐고 자주 먹진 못해요.
시설에서 살면서 끔찍한 경험도 했어요. 8~9년 전에 일인데, 그때는 1년에 한두 번 사회적응 훈련이라고 나가는 게 외출의 전부였어요. 마침 그해는 사회적응 훈련이라고 개울가로 소풍을 갔는데, 돈을 아끼려고 했는지 직원들도 거의 데려가지 않고 봉고차 한 대에 20명의 장애인들만 태워서 간 거예요. 그냥 막 집어넣은 거죠, 차안에. 거기에 마침 그날 비가 와서 개울이 불어가지고 난리가 났었어요. 모두 다 쓸려갈 뻔했고요.
그게 두려워서 안 싸울 수는 없잖아요
우리는 시설이 민주화가 됐으면 좋겠어요. 안에서도 터놓고 얘기할 수도 있고, 자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 말도 못했어요. 원장이나 선생님한테 불만이 있어도 대화를 못했지요. 얘기를 하면 찍히니까, 그러면 대우가 나빠지고, 왕따를 당하니까. 원장이랑 선생님들이 얘기도 안하려고 하고, 쳐다도 안보고, 그 사람을 시설에서 아주 왕따를 시켜요. 그렇게 은근히 차별을 해서 다시 그런 말 못하게 하는 거예요. 아니면 다른 재활원으로 가래요, 요양원에 있지 말고 다른 시설로 옮긴다고 하는 거예요. 예전에 한 물리치료사가 지적 장애인을 신발로 막 때린 일이 있었어요. 그걸 보고 우리가 그러지 말라고 하니까 우리보고 여기 있지 말고 다른 재활원으로 가라고. 그래서 우리가 단합해서 집에 가겠다고 대들었어요. 시설에는 사람 인원수 당 지원금이 나오니까 차마 우리보고 집에 가라고는 못하더라고요.
시설 비리 문제 터지고 시청 앞에서 농성을 하니까 원장이 가족들에게 전화를 했데요. 우리가 걱정된다고, 그러면서 시설에 오셔서 얘기 좀 하자고 했데요. 그 전화 받고 우리 형이 놀래서 전화를 했어요. 내가 말했죠. 좋아지기 위해서 한다고, 이사장과 원장이 많은 비리를 저지른 이중인격자고 앞에서는 잘해주는 척하고 우리 돈을 몰래 훔쳐가고 그런다고. 사실 나는 여기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어요. 집도 없고, 가족들이랑 살 수도 없고요. 형이랑 누나들은 다 결혼해서 가정이 있고, 큰 형님은 63살이시니 나이도 있으시고. 그렇지만 그게 두려워서 안 싸울 수는 없잖아요. 내 권리를 찾기 위해서 해야 해요. 지금 문제가 해결되고 시설 비리가 없어지면 다른 사람들은 나가서 자립생활을 하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나가서 살 수가 없어요. 나도 시설에서 나와서 자유롭게 간섭 받지 않고 살고 싶지만 지금 정부에서 지원하는 활동보조 몇 시간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시설에서 살 수밖에 없어요.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이곳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터놓고 얘기하고 같이 놀았던 때예요. 선생님들하고 우리하고 같이 밥 먹고, 과자 먹고 얘기하고 그랬는데. 남들에겐 평범한 일상이겠지만 우리는 지금 비리가 있어도 말할 수 없는데서 살아요. 우리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해 주지 않고 존중해주지 않는 곳에서 살아요. 우리를 이용해서 돈을 더 훔쳐갈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랑 살았지요. 해서 우리에겐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고 놀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예전의 그때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그때가 나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에요. 다시 그런 시간이 생겼음 좋겠어요.
*이 글은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장수혁(가명)씨가 지난 4월 10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탈시설을 위한 시설생활인 증언대회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증언대회 수기 연재는 이번 글로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