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은 무조건 하지 말라고만 합니다"

부모에게 버려져 시립아동병원 거쳐 시설로
시설에서 사는 건 밥 먹고 똥 싸는 기계일뿐

2008-04-25     에이블뉴스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정민호(37·가명)씨가 지난 10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탈시설을 위한 시설생활인 증언대회에서 탈시설 권리를 외치고 있다. ⓒ에이블뉴스

사회복지시설 비리척결과 탈시설 권리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단은 지난 10일 서울시청 앞에서 탈시설을 위한 시설생활인 증언대회를 개최했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살고 있는 생활인들이 구성한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장애인 10명이 "내가 시설에 있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면서 시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전했다. 이들은 지난 3월 25일부터 서울시청 앞에서 사회복지시설 비리척결과 탈시설권리쟁취를 위한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 에이블뉴스는 제28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진행하고 있는 장애인 주거권 특집의 일환으로 공동투쟁단측의 협조로 이날 발표된 10명의 수기를 연재한다. 공동투쟁단의 요청에 따라 생활인들의 이름은 가명 처리하고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나이는 37살이고, 석암 베데스다 요양원에 살고 있지요. 외할아버지네 집에서 자랐는데, 외할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지면서 저를 더 돌볼 수가 없자 아빠가 나를 버렸지요. 그때가 10살이었어요.

버려진 저는 시립아동병원에서 자랐어요. 거기 있는 아이들은 미혼모 아이들이거나 저처럼 고아였어요.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처음에 가서는 가족들이 보고 싶고, 무섭고 해서 막 울었어요. 그러다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웃기도 하고, 씩씩하게 살았어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재밌게 얘기도 하고 노는 게 좋았지만, 지내기는 힘들었어요. 밥 먹는 게 가장 싫었어요. 거기서는 조금만 먹어야 해요. 애들이 너무 많으니까 간호사들이 먹여주는 것도 힘들고, 대소변 처리해주는 것도 힘드니까 조금만 먹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배고프니까 나무를 먹었어요. 또 어떤 사람은 비닐도 먹어요, 천조각도 먹고, 벽도 막 뜯어서 먹고. 우리가 공식적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날은 1년에 한번, 어린이 날 뿐이었어요. 그날이 되면 방에 이불을 깔아놓고 그 위에 과자를 풀어놔요. 그리고 그걸 다 먹으라고 해요. 다 못 먹으면 밥 안준다고. 배가 불러서 다 못 먹는데, 그래도 먹어야 해요. 사람들이 이불 위를 기어 다니면서 입으로 과자를 집어 먹고, 아예 못 움직이는 사람은 간호사들이 먹여줘요.

20살 때 석암에 갔어요. 병원에서는 나이가 많으면 나가야하는데, 어느 날 석암 원장과 선생님이 찾아왔어요. 그리곤 애들을 불러놓고 ‘너 일로와, 너 일로와’ 그렇게 하면서 데려갈 애들을 찍었어요. 저도 그렇게 석암에 왔어요. 석암도 다르지 않았어요. 일어나서 밥 먹고, 똥 싸고, 텔레비전 보고, 그러다 자고. 예전엔 외출도 못했어요. 조금만 잘못해도 심한 구박을 받았어요.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면 어떤 선생님은 ‘저런 나쁜 놈’, ‘천하에 몹쓸 놈’이라며 욕을 했어요. 미안하다고 빌어도 소용이 없었어요. 고아니까, 내 뒤에는 아무 것도, 아무도 없으니까, 막 대한 거예요. 정말 내가 이렇게 살아야하는 이유가 뭘까 고민도 많이 했죠.

여기선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살다가 제복만원장님(현재 시설 내 비리 문제로 기소 중)이 석암에 왔어요. 우리에게 정말 잘 해줬고, 내가 그거보고 되게 좋아했어요. 근데 다 거짓이었어요. 앞에선 우리들을 개발시켜주고, 좀 더 좋게 지낼 수 있다고 했지만, 그 뒤에서는 직원들 월급을 떼어먹고, 장애인 수당 떼어먹고, 국가에서 나온 돈 떼어먹었죠.

외출도 예전보다 자유롭게 할 수 있었지만 진정한 자유는 없었어요. 저는 시설에서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직접 사람들과 부딪히고 얘기도 해야 이 사회가 뭔지 알고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시설에는 그게 없어요. 시설 안에서 직업훈련을 배워도 써먹을 수가 없어요. 컴퓨터, 글씨, 수화 등 시설에 있는 프로그램 내가 거의 다 해봤는데 도움이 안돼요, 써먹을 곳이 없어요. 내 꿈이 영화감독이어서 하루는 이사장님께 컴퓨터도 배우고, 비디오 찍는 것도 배우고, 사람들 만나서 인터뷰도 하겠다고 하니까 이사장이 그러더군요. ‘노’라고. 내가 뭔가 하고 싶은데, 여기선 무조건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어요?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에요. 장애인이 지금처럼 사는 건 밥만 먹고 똥만 사는 기계랑 다르지 않아요. 그리고 내가 그렇게 살아왔고요.

그래서 여기 나왔어요. 더 좋은 시설을 만들기 위해서. 나 혼자 떠나버리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솔직히 얘기해서 (시청 앞 농성하는 거) 너무 힘들어요. 엉덩이도 아프고, 다리도 저리고 아파요. 하지만 솔직히 이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시설에는 나보다 더 힘든 사람, 하루 종일 누워만 있어야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설을 더 좋게 바꿔야하기 때문에 나온 거예요. 나는 다 같이 살고, 다 같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시설에서 쫓겨날 각오도 하고 있어요.

밖으로 나오라고, 되게 좋다고

나는 국가랑 우리 국민들이 장애인을 조금만 더 이해해주고, 조금 더 발전적인 걸 장애인들에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제 원장은 자기가 시설, 석암재단의 주인이라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우리가 없으면 그 사람도 필요 없어요. 시설의 주인은 바로 시설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예요. 근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아요. 그리고 국가가 비리없는 시설을 만들어주길 바래요. 장애인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주길 바라는 거예요.

그리고 장애인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내가 농성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하고 얘기도 하고, 세상도 돌아다니다 보니까 생각이 넓어져요. 생각도 많아지고, 생각이 되게 좋아지고. 그전에는 내가 밖에 나가면 뭘 알겠느냐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이제 밖에 나오고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게 아닌 걸 알게 되고, 나 보다 더 심한 장애인도 나오는 걸 보고 용기도 더 나고, 그래서 점점 더 많이 나가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욕심도 생기고요. 그래서 말해주고 싶었어요. 밖으로 나오라고, 되게 좋다고.

※ 못다한 이야기

사랑

좋아했던 여자도 있었어요. 하지만 끝까지 좋아한다는 말을 못했어요. 거기는 비장애인이었거든요. 솔직히 나에게로 오면 좋겠는데, 이 세상에서 비장애하고 장애하고 좋게 안 봐요. 그래서 나는 사랑 같은 거 이제 안하려고요, 사랑 같은 거 하면 마음이 아파서요.

부모님

그때가 아직도 기억이 나요. 버려졌을 때 너무 힘들었으니까. 그래도 보고 싶어서 부모님도 찾아는 봤죠. 결국 찾긴 찾았는데, 나하고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셨데요. 연락도 없고. 이젠 얼굴도 기억이 안 나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보고 싶죠, 그립고.

어렸을 때는 꿈은 대통령? 되게 많았어요. 또 부자가 되고 싶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싶어서요. 부자가 되면 집도 있고, 가고 싶은 데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근데 내가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벌겠어요? 그러니까 꿈이죠. 못 배웠으니까 공부도 못했으니까 일도 못하고 그래서 돈이 없죠. 지금은 시설에서 나와서 자립생활 하는 게 바람이에요. 친구랑 시설에서 나와서 버려진 땅이나 건물 고쳐서 살려고 장애인 수당 받은 돈을 모으고 있어요. 아주 조금이지만.

*이 글은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정민호(37·가명)씨가 지난 10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탈시설을 위한 시설생활인 증언대회에서 발표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