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대선 '점자형 선거공보' 없었다
후보 12명 중 5명 제작·배포했지만 수준 미달
12월 19일에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면 빠짐없이 제17대 대통령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중대한 일에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차별을 받게 되어 다시 한번 나의 의견을 제시하는 바이다.
대통령 후보들은 후보자의 개인정보와 정책이 담긴 선거공보를 제작해 유권자, 주권자인 국민들에게 배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들은 일반 활자를 볼 수 없기에 후보자들은 점자로 된 '점자형선거공보'를 만들게 되어 있다. 점자는 6개의 점으로 이루어지는 시각장애인 특수문자이다.
점자형 선거공보가 필요한 시각장애인들은 경증시각장애인을 제외한 중증시각장애인이며 이번 선거에는 약 7만 명 정도가 점자형 선거공보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이번 선거에 들어간 공보물 제작비는 몇 억 이상이 소요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각 가정에 배달된 선거공보물 현황을 살펴보면 정안인(비시각장애인)들이 보는 '활자형 선거공보물'은 대통령후보 12명 중 7명이, 시각장애인들이 보는 점자형 선거공보는 후보 12명 중 5명이 제작 배포했다.
활자형 선거공보물을 배포한 후보 7명 중 2명은 4페이지 분량으로 제작, 나머지 5명은 16페이지 분량으로 제작해 배포했으며 점자형선거공보는 5명 중 2명은 4페이지 분량, 2명은 8페이지, 1명은 16페이지 분량으로 제작된 것을 배포했다.
앞서 밝힌 활자형 선거공보물을 제작배포한 5명은 모두 선거법에 맞게 선거공보물(활자형)을 16페이지로 제작했으며, 이 후보자들이 점자형 선거공보물도 함께 제작 배포한 셈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점자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읽는 것이기에 점의 크기 조절이 되지 않는다. 또한 손끝으로 읽어 내려가는 것이기에 종이의 재질과 점자인쇄방법에 따라 상당히 민감성을 보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번 대선에서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점자형 선거공보는 하나도 없었다. 인쇄방법과 종이재질에 있어 시각장애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인쇄 방식을 채택하지 않아 점자를 읽는데 어려움을 주었다. 이는 일반 활자 인쇄물에서 잉크가 흐릿하거나 얼룩졌을 때 글의 내용을 분간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고 보면 된다.
따라서 시각장애인이 손끝을 이용해 잘 읽을 수 있도록 여러 사항들을 고려해 제작되어야 한다. 물론 후보들 나름대로 신경 써 만든 것이겠지만 정안인(비시장애인)들이 보기에 깔끔하고 세련돼 보인다고 해도 정작 점자를 읽는 시각장애인이 읽기 어렵거나 불편하다면 점자공보물을 제작한 것은 정말 '생색내기'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점자형선거공보는 비시각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각장애인에게만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하여 다음 선거 때부터는 시각장애 관련 기관으로부터 자문을 거치는 등을 통해 제대로 된,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점자 공보물을 만들어 이번 대선과 같은 착오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점자는 일반활자와 달리 크기 조절이 되지 않기에 같은 한 페이지의 종이라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내용이 활자형에 비해 크게 줄어든다(점자는 그 특성상 일반 활자에 비해 3배 이상의 공간을 차지한다).
때문에 배포된 점자형 선거공보물에는 후보의 개인신상정보만 적혀 있고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해진 페이지 분량에 맞춰 제작되어야 하는 선거공보물 법으로 인해 시각장애인들은 활자 선거공보 내용에서 부분부분 발췌된, 알맹이 빠진 정보만 받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시각장애인들은 후보 각각의 공약과 비전 등을 자세히 기록해 놓은, 후보 선택에서 가장 기준이 되고, 되어야 하는 것들을 모두 살펴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시각장애인차별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왜 시각장애인들은 한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까지 비장애인과 다른 내용의 선거공보물을 받아보아야만 하는 것인지 꽉 막혀있기만 한 선거공보법으로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다.
당사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탁상공론식, 행정 편의주의 식으로 일하는 나라는 좋은 국가가 될 수 없다. 후보자들은 어느 누구도 차별 받지 않는 나라가 되도록 하겠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홍보하기 위하여 사진 찍기에 열중하기보다는 선거를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진정성이 담긴 관심으로 모든 이들이 공정하게 후보를 선택할 수 있도록 선거활동에 임해주기를 기대한다.
점자형 선거공보에 문제가 있다는 것에 대해 필자가 약 10년 전부터 의견을 제시했지만 아직까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꼴이 되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하나 부탁드린다. 잘못되어 읽지 못하고 알맹이 없는 점자형선거공보물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 다시 반송하거나 되돌려 주는 운동에 참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직무유기를 꼬집어 주기를 바란다. 한낱 폐지에 불과한 점자형선거공보가 다시는 이 나라에서 만들어지지 못하도록 다함께 노력하자.
*이 글은 이재호 경북점자도서관장이 에이블뉴스에 보내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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