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아들 과실치사 집행유예 판결이 불편한 이유

나를 더 불편하게 한 판사의 판결문

2007-11-30     칼럼니스트 박정혁

어제 웹서핑을 하던 중, 왜소증 장애를 가진 50대 아들을 과실치사로 죽게 한 70대 노모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는 기사가 시선을 잡았다. 28일 오후 대구지법 21호 법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왜소증을 앓고 있는 50대 아들을 자신의 숙명으로 알고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해왔던 김 씨는 지난 3월 아들이 자동차 두 대를 할부로 구입한 후 이를 처분한 돈을 유흥비로 탕진한 것을 알게 됐다. 몇 년 전 아들의 무분별한 낭비 탓에 발생한 채무 2억 원을 갚아주고 전셋집과 구두수선점까지 차려준 터라 '더 이상 아들의 낭비벽을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아들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았다.

평소와 달리 김 씨는 흉기까지 들고 엄하게 다그쳤고, 그 과정에서 소파에 앉아 있던 아들이 갑자기 일어서다 넘어지면서 흉기에 찔렸다. 결국 김 씨는 지난 7월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정상을 참작, 불구속 기소하고 징역 1년을 구형했다.‘(11/29일자 매일신문 발췌)

왜 이 기사가 내 눈에 띄었을까? 내용만 보면 아들은 장애만 있었지 하는 행동은 여느 비장애인 못지않게 낭비벽 심하고 노모에게 불손했다. 그런 탓에 노모는 평소완 달리 흉기까지 들고 아들을 훈계 하려다 불행한 사고를 당하는... 뭐 그런 사건이다. 물론 왜 노모가 흉기를 들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남지만 나를 더 불편하게 한 점은 다름아닌 판사의 판결문이었다. 다음은 판결문의 요지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거늘 장애아들을 둔 운명 때문에 평생을 죄인 아닌 죄인으로서 남몰래 눈물을 삼키며 살아왔고 비록 스스로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피고인 역시 아들의 죽음으로 누구보다도 가장 큰 슬픔과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또 다른 피해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률적으로 피고인을 가해자로 망인을 피해자로 구분 지어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지만 50년간 장애를 가진 아들을 위해 헌신해 왔고, 아들의 잘못된 행동을 꾸짖다가 이 사건이 발생했으며 망인의 처가 관대한 처벌을 탄원하고 있는 점을 고려, 형의 선고를 유예한다."고 판시했다.

판사는 또 천병상 시인의 시 ‘귀천’을 인용해"피고인이 칠십 평생을 사회적 비난을 받을 만한 어떠한 잘못을 저지르지 아니하고 성실하게 살아 왔음에도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하늘로 돌아가는 날'까지 이 사건으로 치유할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남겼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무엇이 날 불편하게 했을까? 우리 사회는 아직도 장애인을 가족들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로만 여긴다. 판결문 서두를 보면 “장애아들을 둔 운명 때문에 평생을 죄인 아닌 죄인으로 남몰래 눈물을 삼키며...” 심파조로 나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장애인을 둔 가족들은 평생 죄인인가? 또 만약 죽은 그 아들이 비장애인이었다면 같은 판결이 나왔을까? 흉기를 들고 집으로 찾아갔다는 것 자체가 살인미수라고 봐야 한다.

몇 달 전, 우리는 어느 대통령 후보의 ‘장애아는 낙태해도 된다.’는 발언에 분노했었고 그의 선거 캠프로 쳐 들어가 항의하고 시원치는 않았지만 사과를 받아낸 적도 있었다. 이런 판결을 내린 판사의 머리 속에 생각하는 장애인관이 어떤 것인지 무척 궁금해진다. 과연 그 판사의 장애관과 장애아 낙태 발언을 했던 어느 대통령 후보의 생각과 다른 것이 있을까?

장애인과 그 가족은 우리사회에서 힘들고 고달프고 죄인 아닌 죄인 취급받는 것이 나는 불편하다. 죽은 그의 행동으로 보았을 때 노모의 꾸지람을 백번 들어도 마땅한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흉기로 위협받고 더 나아가서 죽어 마땅한 행위를 저지르진 않았다. 그러나 실수로 인해 죽음을 맞았다. 그것도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준 노모의 손에 말이다. 물론 노모의 형을 더 무겁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노모 역시 죽은 아들로 인해 평생 가슴에 피멍이 들어 살아가야 할 테니까.

다만 우리사회가 아직도 장애인과 그 가족들을 이런 판결문을 통해 바라보는 시선이 나는 불편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