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이 핀 꽃

눈물겹지만 따라야 하는 순리입니다.

2007-10-24     칼럼니스트 김남숙
10월에핀 철쭉/성남 한산이씨 문화유적지(토정 이지함 가족 묘역)에서 10월 22일 촬영. ⓒ김남숙

철쭉은 잎이 피고난 후 5월에 꽃이 핍니다. 그런데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지나는 10월 하순에 이렇게 피었습니다. 누가 이 꽃을 철모르고 피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주어진 시스템을 따르는 것일 뿐, 꽃을 피워 낸 이 철쭉의 탓은 아니겠지요?

열매 맺지 못할 때에 피어나 서리와 눈 맞아 스러져야 하는 일이 어찌 이 꽃뿐이겠습니까? 눈물겨운 사람 사람마다의 사연이 이렇게 붉게 피었다가 집니다. 우리 안에 일렁이는 바람과 망울진 꽃 같은 사랑이 철없이 피어 멍울이 되기도 합니다.

10월에 핀 개나리/ 태백 삼수령에서 10월 12일 촬영. ⓒ김남숙

이른 봄, 잎 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개나리가 상강이 지난 10월 하순에 이렇게 겨울눈을 터뜨려 꽃을 피웠습니다. 날씨가 하도 요상하여 겨울을 앞 둔 날씨가 마치 겨울을 지나고 찾아 온 봄 같아서 내년에 꽃 피우려 잎겨드랑이 사이사이마다 따로 모아 겹겹이 꼭꼭 싸 입은 비늘 옷을 벗었습니다. 옷을 벗고 보니 서리가 내리고 겨울 문턱이네요. 어설픈 몸짓으로 활짝 열어 보이지 못하여 속으로 움츠러드는 꽃, 스스로 피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누가 알아줄까요?

10월에 핀 수수꽃다리(라일락)/10월23일 양평 용문사에서 촬영. ⓒ김남숙

4월에서 5월에 피는 수수꽃다리가 10월 하순 용문산 용문사에 피었습니다. 이미 꽃 피워 열매 달린 나무가 바로 옆에 있는데 여기 꽃을 피운 나무에는 열매가 달려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꽃을 뒤늦게라도 피우는 경우를 보면 열매가 달려있는 나무에서 보다는 달려있지 않은 나무에서 흔히 일어납니다. 열매 맺지 못한 아쉬움이란 것이 사람뿐만이 아니라 식물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10월에 핀 으름꽃/양평 용문사에서 10월 23일 촬영. ⓒ김남숙

4~5월에 피는 으름 꽃이 10월 하순에 피었습니다. 한 송이 피어난 것이 아니고 긴 덩굴 전체에 수백송이가 피었습니다. 지금이면 열매가 익어 벌어져 다 떨어질 때인데 이렇게 꽃을 피웠으니 그 꽃이 아무리 많은들 결실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단 한 송이도 없습니다.

이루어내지 못할 너무나 확실한 시기임에도 환경을 따르는 것, 그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순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환경을 따르는 것은 우리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우리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오염된 환경에서는 으름 꽃처럼 우리 후손들의 희생이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