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국민문화운동본부 이일세 대표. ⓒ에이블뉴스DB

장애인계에서는 17대부터 19대까지 여·야당에서 1명 이상씩 비례대표 당선 안정권에 장애인계를 대표하는 장애인당사자를 배정했지만 20대 비례대표에서는 단 1명도 없는 것을 두고 장애인계를 무시한 처사이니, 처절한 응징을 하겠다느니 말들이 많다.

장애인 관련 단체에서 활동을 했다는 30명 이상이 이번 총선 비례대표 후보 공천 신청을 하였다고 하고 그분들 중에는 물론 국회의원이 될 자격이 충분한 후보들도 여려 분 계신다. 그간 꾸준히 장애인을 대표하는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그 충격이 더 클 것이다. 당연하다는 듯 여·야에서 최소한 한 명씩은 비례대표 당선 안정권에 들어갈 것이라는 자만에 뜻하지 못한 일격을 당한 셈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자. 여당인 새누리당의 비례대표 2번에 2000년 DMZ 수색 작전 중 전우를 구하려다 지뢰 폭발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이종명 예비역 육군 대령이 남성으로서는 최상위로 비례대표에 배정이 되었지만 모든 장애인 관련 언론에서 그 분은 장애인의 대표성을 갖지 못한다며 마치 장애인이 아닌 것 같은 기사일색이었다.

그리고 이참에 나도 16년 만에 한 마디 해야겠다. 나는 2000년, 소위 밀레니엄 시대가 시작할 때 당시 여당의 신당 창당 영입 인사로써 주제에 넘칠 만큼 화려하게 정치판에 등장을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간의 지역감정을 없애고 화합의 전국 정당을 만들겠다는 큰 포부를 밝혔고 특히 보수 계층과 영남권 인사 영입에 큰 공을 들였었다.

3차에 걸쳐 창당추진위원 명단을 25명씩 언론에 공개를 했는데 나는 1차 추진위원으로 영입되어 모든 주요 일간지 1면 전면을 가득 메울 정도로 큰 기사에 이름과 사진을 올리며 정치를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 하버드 케네디 정책대학원에서 의회정치를 공부하고 연구했기 때문에 영입될 때에도 장애인 대표라기보다는 정책과 의회정치의 새로운 변화의 방향을 세운다는 역할로 영입이 되었다. 물론 1984년 불의의 스키 사고로 사지마비의 중증 장애인이 되었으므로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부정할 이유는 전혀 없었고 나 스스로 당당히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밝힐 때였지만 장애인이기 때문에 장애인에 관련된 일만을 한다는 것은 뭔가 다소 부족하다고 여겨졌었다.

장애인을 위해 일하는 것은 그저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자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 같은 것이었다. 당무위원과 장애인특위 위원장으로써 참 바쁘게 활동했다. 지금은 정치 거물이 된 천정배, 추미애 의원 등과 함께 정강기초위원회 위원으로써 정당의 근간이 되는 정강과 당헌, 당규를 만드는 일을 힘들게 하기도 했다.

신당 창당 홍보 영상물 제작에도 큰 역할을 했고 전국적인 홍보 행사, 이익단체들과의 간담회 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당시만 해도 흔하게 볼 수 없던 전동휠체어를 탄 중증장애인이라는 희소가치 덕에 중요 정치 행사 때의 내 위치는 항상 대통령이나 당대표 바로 옆자리였다.

그리고 비례대표 번호를 발표하는 당일 조간신문에 “이일세 당선 안정권 확정적”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당 내에서도 공천 심사 위원회의 말을 인용해 내가 안정적인 번호에 들어갔다며 축하 인사를 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마지막 청와대 결재 과정에서 번호가 당선권 밖으로 밀려났다. 운동권 인사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는 후문을 들으며 어쩔 수 없는 정치판의 한계를 실감하며 잠시 서운하기도 했지만 마흔이 안 된 나이에 현실정치에 참여해 값진 경험했다며 스스로 위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고두고 정말 마음 아프고 안타까웠던 것은 비례대표 후보 발표 며칠 전 장애인계, 소위 말하는 ‘장판’에서 힘깨나 쓴다는 지도층 인사 한 분이 이일세는 장애인 단체의 대표성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고 인터뷰를 했던 것이다.

나에 대해 별로 호의적인 반응은 분명히 아니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대학 강의와 방송활동 등을 하며 장애인 단체에 관련된 일을 안 했기 때문에 대표성을 띄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 당시 장애인계의 세력다툼은 참 볼썽사나웠다. 하나로 통일되어 한 목소리를 내도될까 말까 한데 장애인계 인사들이 하는 소리는 “남북통일보다 장애인계의 통일이 더 어렵다”고 까지 했다. 웃기는 일이었지만 남의 일이 아닌지라 부끄럽기도 하다.

사지마비의 중증장애인일지라도 장애인 단체에서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대표성을 띄지 않았다고 16년 전에도 말하더니 두 다리가 잘렸지만 군대에서 나라를 지키다 장애인이 된 여당의 비례대표 2번인 분도 장애인의 대표라고 할 수는 없다는 논지는 너무 졸렬하다.

그 분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16년을 장애인으로 살아왔다면 분명히 비장애인과는 인식 자체가 다를 것이다. 나 역시 22살에 장애인이 되었지만 그 전까지 알고 지내는 장애인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장애인이 얼마나 힘들고 또 열심히 살아가는지 등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장애인으로 살아 보니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스스로 겪으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두 다리를 잘린 그 분이 장애인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비장애인과 다를 것은 굳이 직접 만나보지 않아도 분명할 것이라 확신한다.

비례대표 공천 신청을 하는데 어떠한 제약도 없고 기준도 없으니 원하면 누구든지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기존의 정치인들이 국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어 한심하고 보잘것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의 입법기관으로 법을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인데 자격도 되지 않을 사람이 욕심만 가지고 국회의원을 하겠다는 것은 참 기가 막힌 노릇이다.

능력도 없고 실력도 없는 사람이 그저 장애인입네 해서 국회의원을 하겠다, 고위 직책에 가겠다고 나서는 것도 문제다. 나는 분명히 말 할 수 있다.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똑같은 지위에 오르려면 그들보다 두 배, 세 배 이상의 피나는 노력을 하고 그 이상의 능력을 갖추었을 때만 겨우 가능한 것이다. 화나지만 장애인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아직 그 수준에 머물러있다.

이제 20대 총선을 교훈으로 장애인계도 정치판의 생리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들은 그 동안에도 장애인을 진심으로 배려해서 후보로 공천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무언가 쓸모가 있었기 때문에 얼굴마담 역할을 하도록 마지못한 배려를 한 것이다.

같은 정체성과 뜻을 갖고 모인 당 내에서도 계파간의 갈등으로 상대 계파의 유력인사를 가차 없이 잘라내는 게 정치판의 생리이다. 필자도 이번 총선 과정에 모 정당으로부터 영입 제의가 들어왔지만 정중히 고사를 하였다. 이미 16년 전에 당시 여당의 핵심 멤버로 적극 참여하였고 뭔가 다 될 것 같기도 했지만 결국 들러리만 섰던 결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전철을 다시 밟을 수는 없었다.

우리나라의 고위 정치인들과 경제 관료들이 장애인인 내 앞에서는 복지와 인권의 중요함을 침 튀어 가며 떠들지만 뒤돌아서 자기들의 업무에 돌아가면 “복지는 무슨… 우리나라는 경제가 최우선이야”하고 말한다는 것을 잘 안다.

능력 있는 장애인들이 정치만이 아닌 경제, 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역할을 해야 국가와 사회가 자연스럽게 변화하게 된다. 우리 장애인들도 복지 혜택과 권리만을 요구하지 말고 국가와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 역할은 하며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맡겨둔 짐 보따리 돌려달라는 듯 정당에 비례대표를 요구하는 장애인계도 깊이 반성해야 한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식의 텃세는 말아야 한다. 4년 후에는 꼭 장애인을 대표하는 인재가 국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능력 있고 미래지향적인 젊은 장애인 인재의 양성에도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21대 총선에는 존경 받는 훌륭한 중증장애인이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 받아 당당하게 당선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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