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7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86편 접수됐다. 이중 김효진씨의 ‘성준이가 왜 그럴까?’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19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19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다섯 번째는 최우수상 수상작인 신유나씨의 ‘5살 아름이와의 약속’이다.

5살 아름이와의 약속

신유나

나 역시, 나의 오빠여서 "고마워"

"유나야! 집에서 고기나 구워 먹지 뭔 식당을 가려고 그래."

"아빠! 인생에 한 번 있는 칠순인데 제 말 들으시고 그냥 가요."

"어휴~ 그 식당이 어디에 있니?"

"제가 식당 주인에게 잘 물어봤어요. 제발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니야, 철인이 때문에 내가 식당을 눈으로 봐야 마음이 놓이겠다."

43년 동안 단 한 번도 걷지 못한 오빠와의 외식은 절대 쉽지 않다. 아버지는 칠순 전날, 전동휠체어의 이동 동선을 직접 확인하러 식당으로 나섰다. 아버지의 칠순 일정을 눈물로 마무리하고 오빠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톡을 보내왔다.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해." 가족이 오빠에게 처음 들었던 온 힘으로 쓴 말, 지금부터 나의 오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땐, 오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 "미안해"

오빠는 돌이 채 지나지 않아 황달로 인해 소아마비라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 '적기에 치료했으면 장애를 갖지 않았을 텐데···.' 부모님의 마음은 늘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다. 오빠를 등에 업고 몸을 고치려 전국 각지의 종교단체를 다니며, 민간요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체적 장애를 가진 몸은 좋아질 리 만무하였다.

"유나야, 우리 집에서 예배 보는 날인디, 오빠랑 작은방에 들어가서 과자 묵고 있어라잉."

"알았어요. 엄마, 오빠 오줌통이나 줘요."

부모님이 집에 안 계신 날엔 오빠의 대변을 받았다. 오빠가 세 번째 서랍장을 잡고 서서 변을 누면 나는 방바닥에 신문을 깔아 변을 받고 항문을 닦아주었다. 나는 방학기간이면 일기 쓸 게 없다면서 부모님께 볼멘소리 했다. 동네 친구들은 산과 바다로 여행을 갔지만, 나는 그 어느 곳도 가지 못하고 마당 수돗가에서 물 뿌리는 것이 놀이였다.

교사였던 아버지께서는 특수학교에 다니며 학습이 부족했던 오빠에게 화를 내셨다.

"글씨를 읽어봐라잉. 니가 글씨를 쓰지는 못해도 읽을 수는 있어야제."

"내가--할--수--있는 게— 뭐—가 있--는데, 혼자--서--죽지 도--못하는데--"

오빠는 빨개진 얼굴로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악을 지르며 울어댔다.

"흑흑~ 이놈의 새끼야! 니가 건강히 살아야지 죽어븐다 하믄 쓰겄냐?"

오빠는 장애인 생활시설에 입소 후, 오빠의 옷 뒷면엔 ‘신’이라는 이름의 성이 검은 펜으로 써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옷가지만 보면 오빠의 공동체 생활에 마음이 아팠다. 시설에서 오빠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주말에 집에서 생활하다가 오빠가 가는 시간, 부모님과 나는 눈물을 숨겼다. 누구 하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건 그 눈물이 들켜, 더 큰 눈물을 만들까 염려에서였다.

가족 행사가 있을 때마다 조용할 날이 없었다.

"유나야, 니 결혼식인데 철인이한테 말을 못하겄시야. 니 시댁 식구들한테 오빠를 비치기가 그래서 말이다."

"엄마 마음이 불편하면 오빠한테 결혼식 말하지 말아요. 알아도 거리 때문에 오겠어요?"

"니 오빠 고집에 와서 가족사진 찍겠다 할 것 인디. 같은 핏줄인데 지 동생 결혼식도 못 가고 얼마나 맴이 찢어지겠냐. 지 몸 땜에 사람 구실도 못 하고 살건디, 짠한 내 아들···."

오빠는 장애인시설에서 자립생활과 권리, 인권, 직업과 사회생활을 배워 나갔다. 그리고 생활시설에서 새언니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다. 장애인의 성에 대한 인식이 무지했던 가족은 새언니의 임신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 아기가 장애를 갖고 태어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절대 아이 못 낳게 해요."

"옴매~ 그게 내 마음대로 된다냐? 어찌 하믄 좋으냐···. 흑흑"

나는 서둘러 오빠를 만났다. "내가 오빠 마음 이해 못 하는 거 아닌데, 새언니랑 둘이 행복하게 살아. 아이가 장애가 있으면 어떻게 키우려고 그래? 생각 좀 더 해봐!"

"내--가 내--자식--키운다--는데 신경--쓰지--마."

오빠와 새언니의 10개월간의 눈물로 건강한 딸을 낳았다.

"아빠, 아기 이름 지었어요?"

"신아름(가명), 심청이가 연꽃으로 피어났던 거처럼, 아픈 지 아빠를 잘 보살피고 효도하라는 뜻이야."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이한테 그런 이름을 지어요? 무슨 심청이 타령이에요?"

아버지는 기어이 아픈 자식을 향한 마음을 손녀의 이름에 담았다.

아름이는 사랑과 응원으로 건강한 아이로 자랐다. 아름이가 5살 되던 해 설날,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아름이가 말했다.

"아빠는 언제 걸어 다닐 거예요?"

"아--빠는--몸--이 불편해서 걷--기가 어--려워."

나는 아름이의 눈을 보며,"아름아! 아빠는 운동 많이 해서 걸을 거야. 아름이가 나중에 훌륭한 사람 되어서 아빠 몸 낫게 해주렴."

"그럼 나 아빠 걸을 수 있게 하는 의사가 될 거예요."

"그래, 우리 아름이는 꼭 꿈을 이룰 거야."

나의 성장 과정은 오빠의 건강과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부모님은 오빠의 배려와 관심을 놓치지 않았고, 삶의 소중함에 대해 항상 주입했다. 일상은 가족애로 버틸 수 있었지만, 큰 굴곡이 있었을 때마다 무너지는 경험들을 반복하며 우리 가족은 더욱이 단단해졌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 가족을 아프게 할까?, 이젠 아름이에게까지 아픔을 주지 말자.'

우리 가족 모두, 오빠 모습 그대로 “사랑해”

오빠는 부모의 지지보다, 동생의 응원보다 더 크고 강인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자신의 방식과 주관대로 삶을 살았으며, 건강한 생활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언어전달 과정에 어려움이 있지만, 주장을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손을 사용하는 것이 자유스럽지 않지만, 두세 배 걸리는 시간과 싸웠다. 스스로 걷지 못하지만, 가야 할 목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나의 오빠는 대한장애인체육회가 주관하는 보치아 대회에서 광주광역시 대표선수로 활동하며, 금메달과 4번의 수상 경험이 있다.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장애인복지 분야에서 장애인 일자리의 생산품을 홍보하였다. 현재는 장애인 관련 센터 대표로 관광사업의 정보제공과 문화체험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고 접근성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는 퇴직 이후, 어머니와 함께 ‘장애인 활동보조’ 교육을 이수하셨다.

"유나야! 네 오빠가 장애인복지 분야에서 꽤 유명하더라. ‘내가 철인이 아비 됩니다.’하니 철인이를 모르는 강사가 없더구나. 그리고 철인이가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에 대해 존경을 표현하더라. 내가 이 교육을 조금 더 빨리 경험했더라면 철인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내 40년의 공황장애가 다 치료되는 위로를 받았단다. 마음이 벅차구나."

"아빠, 오빠는 누구보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오빠의 장애는 누구의 탓이 아니에요. 이젠 아빠 몸 챙기세요."

"안녕하세요! 사회복지사 신유나입니다. 저에게는 저보다 한 살 많은 오빠가 있습니다."

과거, 오빠의 이야기를 내뱉을 때마다 목을 매였던 나는 사회복지사로, 또 수발보조와 인권 강사로 그 서두에 오빠의 이야기를 담는다. 오빠에 의지가 누군가에겐 감사와 용기, 삶의 원동력이 되고, 우리 가족의 이해와 수용이 누군가에겐 따뜻한 온기 충전이 된다. 가장 작은 사회의 출발점 가족, 그 시작이 곧 사회로 가는 통로이다. 어느 곳에서나 장애는 특별한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인정되어야 하기에···.

우리 가족은 ‘5살 아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함께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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