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6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27편 접수됐다. 이중 최유리씨의 ‘우리 집에 DJ가 산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20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20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열한 번째는 가작 수상작인 신송희씨의 ‘4월 10일’이다.

4월 10일

신송희

“송희야, 동생 태어났대. 남자애래.”

아빠가 전화를 끊고 조금 상기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그날은 나의 아홉 번째 생일이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동생이 엄마가 알려주었던 예정일보다 3주나 일찍 태어난 것이다. 점심도 먹지 못했지만, 뛸 듯이 기뻤다. 내 생일에 귀여운 동생이 태어났다니! 꼭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생일선물 같았다.

2녀 1남 중 막내. 그렇게 세상 빛을 본 내 동생 희중이는 커다란 눈에 속눈썹도 길고 정말 인형처럼 예뻤다. 데려가는 곳마다 희중이를 본 어른들은 어쩜 아기가 벌써 쌍꺼풀도 있고 눈이 이렇게 예쁘냐며 한마디씩 하시곤 했다. 하지만 희중이는 커갈수록 어린 내가 보기에도 다른 또래 아이들과는 무언가 달랐다. 유난히 조용했고, 말문이 트일 나이에도 말을 하지 못했다. 어른들은 우리 부모님께 간혹 말문이 늦게 트이는 아이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실제로 사촌 동생 중에는 5살이 지나서야 겨우 ‘엄마, 아빠’를 하기 시작한 아이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이 희중이를 데리고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 다녀오셨다. 어떤 검사를 했는지 머리 이곳저곳에 흰 가루약 같은 것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 후로도 부모님은 정기적으로 서울에 다녀오셨다. 단순히 발달이 느린 줄로만 알았던 동생은 그즈음에 ‘자폐성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다. 희중이가 아픈 것에 대해 부모님이 나에게 어떻게 설명해 주셨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우리 반에도 희중이랑 비슷했던 친구가 있어서인지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희중이가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된 후 4학년쯤이었을까. 아마도 도덕 수업 시간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께서 대략적인 인간의 발달단계에 관해 설명해 주셨다.

“보통 아기가 8개월에 기어 다니기 시작해서 돌쯤이 되면 걸음마를 하고, 18개월 정도 되면 말문이 트이죠.” 여기까지는 별문제 없는 말씀이었지만, 선생님께서는 우스갯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3살이 지났는데도 말을 못 하면? 사람이 아니죠.”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손을 번쩍 들고 선생님께 묻고 싶었다. ‘선생님, 제 동생은 아직 말을 못 하는데, 그럼 제 동생은 사람이 아닌가요?’ 하지만 숫기 없고 내성적이었던 난 마음속으로만 몇 번이고 소리 없는 항의를 할 뿐, 결국 수업 종이 칠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선생님께서도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하신 말씀은 아니셨으리라. 그러나 그 실언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토씨 하나하나 기억날 만큼 내 마음속에 큰 상처로 남아있다.

희중이는 또래보다 몸집이 작고 발달이 느려 열 살에 일반 초등학교를 보냈다. 다행히 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났고, 두 살 어린 친구들도 희중이를 따뜻하게 대해줬다. 비장애인 친구들과 학교생활을 해서인지, 눈치도 빨라지고 똘똘해졌다. 엄마가 집 앞 큰 건널목까지만 같이 길을 건너 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혼자 씩씩하게 학교에 갔다. 가끔 학교 가는 길에 있는 빵집을 지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단팥빵을 몰래 집어간다거나 하굣길에 책가방을 내버려 두고 오는 등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시간이 될 때면 내가 바쁜 엄마를 대신해 희중이를 데리러 학교에 가기도 했는데, 친구들 사이에서 줄을 서서 급식을 받고, 밥을 먹은 후 수저를 수저통에 야무지게 정리하는 모습을 복도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을 때면, 그 사소한 순간들이 너무 감사하고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한 번은 희중이가 학교에서 누군가에게 콧잔등을 여러 번 꼬집혀온 일이 있었다. 평소 자해를 하는 행동은 전혀 없었기에 엄마는 선생님께 누가 그랬는지 알아봐달라 부탁드렸다.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모두 눈을 감고 희중이를 꼬집은 사람은 혼내지 않을 테니 조용히 손을 들라 하셨다. 범인은 뜻밖에도 항상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희중이를 너무나 잘 챙겨주던 여자아이였다. 선생님께서 희중이를 계속 돌봐줄 순 없으니 짝꿍을 붙여주셨는데, 그게 그 아이에겐 너무 큰 짐이었나 보다. 친구의 양심 고백에 그 부모님까지 우리에게 사과했고, 우리 가족은 배신감보다는 어린아이가 얼마나 버거웠을지 굉장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또, 사실대로 말해줘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6학년 무렵, 희중이가 내성발톱 수술로 입원을 해서 며칠 동안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때 약 서른 명 정도 되는 반 친구들이 모두 희중이에게 쾌유를 바라는 카드를 써주었다.

‘희중아, 수술 잘해서 원래 15살로 돌아가. 그래서 네가 꿈을 꾼 것을 이루길 바라.’

‘빨리 나아서 우리 반이랑 다시 만나자. 너는 우리랑 다른 게 아니고 특별한 친구야.’

어쩜 이보다 따뜻한 말이 있을까? 엉뚱한 내용에 웃다가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카드에 친구들의 진심이 느껴져 눈물이 났다. 벌써 9년 전이지만, 나는 아직 책상 서랍 속에 그때 그 친구들의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가장 큰 혐오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내 동생 희중이가, 그리고 희중이와 같은 모든 장애인이 사회의 그늘 속에 숨어 지내지 않고 비장애인과 일상 속에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길 희망한다. ‘장애’를 극복해야 할, 안타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의 특성으로 인정하고 편견 없는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이 오길 소망한다.

희중이는 어느덧 24살 청년이 되었다. 아직 신변처리도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고, 자발적인 발화도 힘들다. 하지만 눈 맞춤도 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허공만 응시하던 아이가 이제는 이름을 부르면 쳐다보고, 상대방의 말을 따라 하며 간단한 대답도 할 줄 알게 되었다. 가끔은 불쑥불쑥 상황에 맞는 말을 던져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한다. 남들보다 몇 배는 느리지만, 희중이는 분명 희중이만의 느린 걸음으로 아주 천천히 성장하고 있다.

가끔 길을 걷다 희중이 또래의 친구들을 볼 때면 ‘내 동생도 아프지 않았다면 저렇게 친구들이랑 어울려 놀러 다녔겠지?’, ‘내가 밤늦게 들어오는 날엔 나를 데리러 와줬을까?’하는 생각에 울컥해질 때가 있곤 하다. 하지만 천사같이 순수한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런 생각도 이내 사라지고, 감사한 마음만 남는다.

나는 희중이에게 조금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 또, 세상에 희중이를 숨기지 않고 보여주고 싶다. 아직도 ‘지적장애’와 ‘지체장애’라는 단어조차 잘 구별하지 못하는 비장애인들이 많다. 예전 MBC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방영되었던 <진호야, 사랑해>라는 코너처럼, 희중이를 통해 발달장애인의 삶에 대한 영상을 만들고 알리는 것이 내 인생의 큰 목표 중 하나이다. 이것이 내가 영상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또 장애인 동생을 둔 누나로서 앞으로 살아가면서 희중이를 위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1997년 4월 10일, 나의 아홉 번째 생일. 내 생에 최고의 선물 희중이가 태어났다. 어린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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