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6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27편 접수됐다. 이중 최유리씨의 ‘우리 집에 DJ가 산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20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15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열번째는 우수상 수상작인 황단비 씨의 ‘누군가가 아닌, 우리’ 이다.

누군가가 아닌, 우리

황단비

우리는 모두 기억과 기억을, 경험과 경험을 쌓으며 살아간다. 기억을 쌓아두는 공간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흔적도 없이, 그 기억 속의 냄새와 날씨마저도 전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어떤 기억들은 너무나 강렬하고도 강력해 영원히 머릿속 기억 저장소에 한 공간을 차지한다.

‘아빠랑 가위바위보 하면 내가 맨날 이길 수 있겠다!’

내 기억 저장소에 한 공간을 차지한 강력한 기억은 아빠와의 가위바위보. 그리고 그때 내가 했던 말이었다. 내가 여섯 살이었나, 일곱 살 즈음이었다. 그 말을 들은 아빠는 조금 슬픈 미소를 지으셨다. 가위바위보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이 손가락 열 개를 모두 접어 만드는 주먹, 손가락을 두 개만 펼쳐 만드는 가위, 손가락과 손바닥 전체를 펼쳐 만드는 보자기를 상대방과 동시에 내면서 승패가 결정되는 하나의 놀이다. 즉, 모든 손가락이 다 필요한 놀이인 것이다.

아빠는 젊은 시절, 액세서리 공장에서 기계로 액세서리 부품을 만드는 일을 하셨다고 한다. 손재주가 있으셔서 가끔 내가 예쁜 끈 하나를 가지고 오면 그걸 팔찌로 만들어 주시기도 하셨다. 이십대의 아주 초반, 어리고도 젊은 나이의 건장한 청년이었던 아빠는 액세서리를 만드는 작업을 하며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계는 아빠의 왼쪽 손가락 세 개를 날카로운 어떤 부분과 맞닿게 하여 더 이상 세상 속에 존재하지 않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이전에는 예상치도 못했던, 예상하고 싶지도 않았던 안타까운 사고가 젊은 날의 한 청년에게 일어났다.

이 사고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내가 어렸던 어느 날에 아빠와 나는 가위바위보를 했다. 여섯 살 혹은 일곱 살 즈음의 나는 승부욕이 강한 어린이였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어떻게든 이기고 싶은 어린 마음에 굳이 왼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졸랐다. ‘가위, 바위, 보 -!’ 하고 힘차게 나의 손을 한 가지 모양으로 만들어 내밀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손가락이 없었던 아빠는 보자기를 낼 수 없었다. 아니, 내지 못했다. 아빠는 주먹과 가위만 낼 수 있었고, 그날도 내가 가위바위보에서 이겼다.

여섯 살의 나는 시간이 지나 스물둘의 젊은 청년이 되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살아온 나는 몇 년 전 문을 열고 다 함께 열심히 운영하고 있는 굿윌스토어에 자주 들리는 손님 중 한 명이다. 왠지 모를 정감이 느껴지고, 시간이 날 때마다 궁금해지고, 한 번씩 주기적으로 가고 싶은 가게.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온 세상을 감싸는 6월 초, 굿윌스토어에 읽을 만한 책이 있나 살펴보러 갔다. 각종 옷가지와 주방 가전, 잡화들이 놓인 진열대를 지나 가장 구석에 있는 책장에 꽂혀있던 꽤 많은 책들 중, 공지영 작가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라는 책을 골라 계산을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오늘도 좋은 물건을 잘 샀구나, 기분이 좋아 고개를 돌려 굿윌스토어의 출입문을 다시 바라보던 그때, ‘스토리텔링 공모전’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바로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와 했던 가위바위보가 생각이 났다. 아빠에게 무심코 던졌던 말도 생각이 났다.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포스터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왠지 조금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 날의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던 이유는 그동안 아빠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살아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아빠의 장애를 크게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고, 아빠는 당신의 장애를 누구보다 강한 모습으로 이겨내려고 노력하며 담담히, 또 무던히 살아오셨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겪은 어쩔 수 없는 ‘가위바위보를 했던 순간’과도 같은 순간들은 여럿 존재했다.

중학교 때 나는 음악 수업 시간에 기타를 배웠는데 처음에는 아주 서툴고 느리게 연주했던 ‘꼬부랑 할머니’부터 시작해 연습에 연습을 거쳐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을 제법 멋지게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옆에서 내가 기타 치는 모습을 지켜보시다가 문득 ‘아, 나도 기타치고 싶다.’라고 하셨다. ‘왜? 기타 치시면 되잖아요. 아빠도 연습하면 할 수 있어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아빠에게는 연습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고, ‘기타를 칠 수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한 문제였다. 대부분의 기타는 왼손으로 코드를 잡고, 오른손으로 기타의 줄을 내리고 올리며 연주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반적인 기타로 아빠가 연주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나는 잠시 기타연주를 조용히 멈추고서는 아빠에게 ‘반대로 치는 기타도 있지 않을까?’ 하고 물었다.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 기타가 있으면 좋겠다.’하고 아빠는 대답했다. 언젠가 나중에 돈을 벌게 되면 아빠에게 멋진 기타를 꼭 사드려야지, 하고 다짐했다.

우리 가족은 다 함께 장을 보기 위해 마트 혹은 시장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아빠는 항상 왼쪽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시거나, 아니면 휴대폰을 왼손에 쥐고 다니신다. 두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오랜 시간 쥐고 있으면 손가락이 아프거나, 힘이 빠져 휴대폰을 한 번쯤 떨어뜨릴 수도 있지만 아빠가 휴대폰을 떨어뜨리신 적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가족이 다 함께 장보기를 마치면 능숙한 손길로 박스에 그날 산 상품들을 담아 테이핑 작업을 마친 후 무게가 제법 느껴지는 묵직한 박스를 번쩍 들고 주차장으로 가셨다. 가끔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아빠가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십대의 정말 초반, 그러니까 아빠가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기던 그 해에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사고가 있고 나서 아빠는 한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으셨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은 서울로 올라와 일을 하며 일찍이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던 젊은 청년에게 좌절할 시간을 그리 오래 주지 않았다. 청년은 다시 일어나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장애를 숨기기도 하고 감추려 하기도 했지만,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기약도 없이 계속 숨길 수만은 없었기에 청년은 용기를 내어 세상에 당당히 부딪치며 살아갔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백년가약의 결실을 맺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녀에게 아낌없는 사랑과 정직한 신념을 가르쳐 주었다. 멋진 아버지로, 신뢰할 수 있는 직장동료로, 당신 그 자체의 진실된 모습으로 오늘 하루도 담담히, 또한 당당히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 아빠에게 정말 감사하다.

오늘 동네에 있는 빵집에서 빵 여러 개를 사서 집에 왔다. 그 빵집은 장애인들이 빵을 만들고, 판매하는 곳이었다. 가게에 들어가자 ‘안녕,,하세요!’하고 조금은 느리지만 씩씩하고 쾌활한 말투와 상냥한 웃음으로 나에게 인사를 건네주었다. 나도 인사를 했고, 친절한 미소에 나 또한 웃음을 따라 지으며 기분이 좋아졌다. 집에 와서 먹은 빵은 아주 맛있었다. 특히 생크림 빵이 맛있었는데, 빵은 쫄깃쫄깃하고 생크림은 느끼하지 않게 부드러웠다.

친절했던 빵집 직원은 제빵사로서, 빵을 판매하는 가게의 직원으로서 열심히 빵을 만들고, 진열을 한다. 아빠는 신체적인 결함이 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박스를 번쩍 들고는 힘차게 그날의 업무를 해낸다. 오늘을 살아가기 위한 용기와 노력은 매일 계속 된다. 그러니 우리는 절대로 장애를 ‘누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구분 짓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똑같은 사람이자, 직원이자, 친구이자, 가족이자, 나 자신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에. 우리 함께 살아가는 오늘이기에,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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