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6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27편 접수됐다. 이중 최유리씨의 ‘우리 집에 DJ가 산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20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20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여덟 번째는 우수상 수상작인 조은미 씨의 ‘나의 꿈, 나의 인생’이다.

나의 꿈, 나의 인생

조은미

돌아보니 참 숨 가쁘게도 살아왔다. ‘네가 사는 시대에는 컴퓨터만 잘하면 먹고 살 수 있다’고 하시던 면사무소 주사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분은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였던 우리 가정을 살뜰히도 챙겨 주시던 사회복지 공무원이셨다. 정말 컴퓨터를 잘하고 싶은 마음에 하루하루 어렵게 버티는 형편이란 걸 잘 알면서도 어머니를 졸라 6학년 때부터 컴퓨터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아버지는 언어장애, 어머니는 희귀 난치질환으로 인한 지체 장애, 그 사이에서 나 역시도 구루병으로 인한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아버지는 하루벌이 막노동을 해서 힘들게 끼니를 이어갔지만, 계속되는 생활고 끝에 어머니는 친정 마을로 이사를 하여 마을 회관을 저렴한 비용으로 임대해 살림을 꾸리고, 작은 구멍가게를 하시며 가까스로 생계를 이어갔다. 양수가 터진 줄도 모르고 일을 하다 쓰러진 어머니를 동네 어르신이 발견하여 병원 도착 후 6시간 만에 제왕절개 수술로 세상의 빛을 본 주인공이 바로 나였다.

힘겨운 출산을 하고도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젊은 나이에 바짝 굽어진 허리로 빨랫감이 담긴 바구니를 옆에 끼고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냇가로 향하던 어머니가 힘겨워 보인 나는 “엄마! 그거 내가 들고 갈게.”하며 바구니를 들어다가 빨래를 함께 했다. 밥을 먹고 나면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 설거지하시던 어머니가 또 안쓰러워 “엄마 그거 재미있어 보이는 데 나도 해볼까?”하며 은근슬쩍 자리를 빼앗고,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땔 때면 그 옆에 꼭 붙어 땔감을 나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잘거렸던 기억이 난다. 다 쓰러져가는 흙집이었지만 그곳에서 내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

그런데 4학년이 되던 해부터 어머니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다. 걷는 것조차 힘들어진 어머니는 누워 계시고,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이 내 기억의 대부분이다. 그때는 어려서 생각 못 했지만, 성인이 된 후에 문득 생각한다. 언어장애로 세상과의 소통이 어려웠을 아버지가 일터에서 다른 사람들의 멸시를 견디며 얼마나 힘드셨을지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그 탓에 아버지는 술을 그리도 좋아하셨을까? 성인이 되고 나도 술을 한두 잔 접하게 되니, 그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에 눈물 흘리며 술잔을 기울이시던 아버지 마음을 이제야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는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은 나를 그럴 수 있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10월, 휴대전화 제조 공장에 취업했다. 장애가 있는 나를 받아 준다는 회사가 있어 감사하고, 우리 가족이 조금은 넉넉하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감사했다. 그런데 친구들은 “네가 왜 그런 곳에 취업해야 하냐?”면서 장애인에게 인색한 사회를 탓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 한때 나는 ‘내가 아무리 뛰어나도 세상은 날 좋은 곳에 써주지 않을 것 같은데 공부는 해서 무엇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학업을 등한시했던 때도 있었다.

취업하고 몇 해가 지난 어느 설날, 시골집에 가니 그날도 술에 취해 아랫마을에서 올라와 우리 집을 지나쳐 윗마을로 향하는 아버지를 보고 “저녁 먹을 시간 다 됐는데 어딜 또 가시는 거야!”하고 소리쳤다. 다른 때 같으면 금방 온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달리셨을 분이 그날은 배시시 웃으며 “그려, 밥 먹으야지.”하시며 들어오셨다. 저녁상을 치우고 앉은 나에게 “은미야, 아빠 오래 살아야지?”하고 말을 건네셨다. 나는 속상한 마음에 “그럼! 오래 사셔야지! 술을 안 드셔야 오래 사시지!”하며 쏘아붙인다. 그게 마지막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연휴가 끝나고 직장으로 복귀한 지 이틀 만에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시골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그날따라 기차는 왜 이리도 느린 건지…. 마음은 벌써 집에 도착해 있는데, 몸은 한참 멀리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만 훔쳤다. 마을 어른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르고 직장으로 복귀했지만, 혼자 남은 어머니가 걱정되어 맘이 편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 2~3시에 전화벨이 울려 깜짝 놀라 전화를 받으면 한숨만 내쉬며 잠이 오질 않는다고, 몸이 이상한 것 같다고, 울먹이던 어머니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결국,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어렵게 새 직장을 구해 시골로 내려왔다. 월급은 반 토막이 났지만, 어머니와 함께 있으니 내 마음도 편했다.

그런데 1년 후 나는 수술대에 올랐다. 구루병으로 인한 통증이 나날이 심해지던 차에 휘어진 두 다리를 임의로 골절 시켜 교정하는 수술을 하면 좋아질 수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장장 6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마치고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휠체어 생활을 하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공부였다. 컴퓨터 관련 자격증을 몇 개 더 취득하려고 목표를 세우고 공부를 시작했고 장애인복지관 정보화 교실에도 참여했다. 정보화 선생님의 추천으로 ‘장애인 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하여 지방대회 1위를 거쳐 전국대회 1위까지 석권하게 되었다. 종목은 엑셀과 액세스, 두 과목으로 구성된 ‘컴퓨터활용능력’ 직종이었다.

전국대회 결과 발표를 하던 날, 1등 발표만 남은 상황에서, 감독관님이 하신 강평을 잊을 수가 없다. “엑셀에서 100점 만점자가 2명이나 나왔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두 사람은 순위에 들지 못했습니다. 액세스 점수가 낮아서…. 그런데 1등은 정말 독보적이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나는 순위에 들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내심 나의 엑셀 점수가 100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등!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나는 엑셀에서 실수로 98점을 받은 것이었다. 그 독보적이라는 존재가 나였다니! 교정기를 달고 퉁퉁 부은 다리를 끌어안고 컴퓨터 앞에서 씨름했던 그동안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이것이 지역에서 크게 화제가 되어 재활이 끝난 후 취업까지 하게 되었다. 취업한 곳은 고등학교의 행정실이었다.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고, 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음에 더 감사했다. 행정업무가 끝난 후에는 특수학급 학생들의 방과 후 컴퓨터 교육도 맡아 하게 되었다. 특수학급 학생들이 자격증 시험에 응시해 좋은 성과를 얻으며 제자들로 인해 지역에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감사하며 생활하는 중에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나를 설득했다. 나를 제외한 행정실 직원들 모두가 공무원이었는데, 나도 공부를 해서 공무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두려웠지만 다부지게 마음먹고 공부를 시작했다. 꿈에 그리던 공무원 임용시험이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10년도 훌쩍 넘긴 나이에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니 눈앞이 캄캄했다. 게다가 직장생활까지 병행하며 공부를 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1년 차에 낙방! 2년 차에도 낙방! 그러다 3년 차에 드디어 합격!

2015년! 참 많이도 돌고 돌아왔지만, 결국 내 꿈을 이룬, 내 인생 최고의 해로 꼽을 수 있다. 임용시험에 합격하고, 결혼을 하고, 꿈도 꾸지 못했던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그때 내 나이 서른다섯, 내 남편은 14살이 더 많은 마흔아홉이었다. 남편은 이미 결혼을 했던 경험이 있었고, 중학생인 딸도 있었다. 게다가 휠체어를 타는 중증장애인이었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골인해 예쁜 딸아이를 낳았고,

몇 달 전, 내 집 마련에도 성공하며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인생 역전의 드라마를 썼다. 아니, 아직도 진행 중이다. 남편은 가족들을 위해 뭔가를 해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했고, 그 결과 얼마 전, 공공기관 채용시험에 합격해 준공무원이 되었다. 늦은 나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온 결과다. 장애는 그저 우리의 인생을 더 빛나게 해준 수식어일 뿐, 우리의 성공을 방해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더 열심히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자극제이고, 길잡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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