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장애인복지법이 제정 된 것은 1981년이다. 그 이전에도 몇몇 유형의 장애인단체들은 나름대로의 활동을 해 왔다. 그러다가 장애인복지법이 제정되면서 각종 장애인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는데 각 유형의 장애인단체들이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제각각이었다.

그러다가 88올림픽을 앞두고 많은 장애인들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기는 했지만 실천은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였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어떤 한 사람의 선두주자에 의해서 달라지게 마련이다.

정화원 씨, 그가 당시 부산시각장애인복지연합회 회장으로서 부산시각장애인복지관장을 겸하고 있을 때였다. “동정과 시혜의 복지가 아니라 우리 일은 우리가 하자”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완전참여 완전평등으로, 21세기 장애인복지의 초석이 되자”고 주장했다. 몇몇 사람들이 반대 아닌 반대를 했으나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호응을 했다. 반대란 장애인연합회 설립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정화원 회장이 앞장선다는 것이 못 마땅했던 것이다.

부산장총 30주년. ⓒ이복남

정화원 회장의 장애인운동은 1979년 시각장애인 침술 합법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당시만 해도 시각장애인들의 유일한 생계수단은 역술 또는 안마피리였다. 맹학교를 다니지 못한 사람은 역술을 공부했고, 맹학교 졸업생들은 고등부 이료과목에서 안마와 침술을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장애인이 침술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계속되었고, 안마를 시각장애인 독점하는 것을 반대하여 이는 최근까지도 문제가 되었다(안마 문제는 지난 12월 28일 일단락이 되었다.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전원일치로 합헌결정이 났다).

그렇게 시작된 정화원 회장의 장애인 운동은 시각장애인만으로는 제도적·법적 문제를 타개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부산장애인총연합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87년 12월 12일 부산구덕운동장에 5,300여명의 장애인들이 모여서 부산장애인총연합회(이하 부산장총) 창립대회를 개최했는데, 2017년 지난 해 말, 30주년을 맞았다.

부산장총은 장애인복지의 결성임과 동시에 시작이었다. 부산장총의 결성은 부산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현재는 서울의 한국장총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지역에 장총(장애인총연합회)이 다 있지만 당시만 해도 부산장총 설립을 계기로 2년 뒤인 1989년에서야 광주장총이 설립되었다. 부산장총 정화원 회장은 광주장총의 지영완 회장과 의기투합하여 전국장총 설립을 위해 부산과 광주의 중간쯤인 하동에서 만나 의견을 조율했다.

‘우리끼리라도 한 번 뭉쳐 보자’ 그렇게 시작 된 한국장총 설립은 준비 작업부터가 쉽지 않았다. 그 당시 광주와 부산의 장애인단체 관계자들이 모여서 서로의 현안을 집어보고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 했다. 1994년 9월 28일부터 29일까지 부산장총에서 시작된 부산·광주 교류간담회에 부산장총 관계자와 광주장총의 지영완 회장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그야말로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그 때 필자도 부산장총의 사무총장으로 실무를 맡고 이 자리의 감동을 함께 할 수 있었다.

1997년 10월 송도비치관광호텔에서 개최된 제4회 한마음교류대회는 다시 부산장총에서 주최하였는데, 경남·경북·광주·대전·울산·제주 등 7개 지역에서 120여명이 참석하였다. 이때부터 쓰이기 시작한 ‘한마음교류대회’라는 행사명은 지금까지 그대로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다.

제1회 부산·광주 교류간담회. ⓒ이복남

그 후 전국의 지역장총이 합심하여 이끌어 낸 것이 1998년 12월 3일에 결성된 한국장총 즉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이다. 이후 2000년 제7회 한마음교류대회는 울산장총과 한국장총 공동주최로 현대호텔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부터 한마음교류대회가 전국적인 대회로 명실상부하게 자리 잡았다.

이 자리는 전국 장애인단체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장애인 현안 및 지역별 장애인 복지사례를 공유하는 교류의 장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17년에는 ‘제24회 한마음교류대회’가 한국장총과 울산장총 공동주최로 6월 8일부터 9일까지 울산 롯데호텔에서 개최되었다.

1987년 12월에 설립 된 부산장총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부산 등록 장애인실태조사였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등록은 1987년 10월 서울 관악구와 충북 청원군에서 시범사업으로 시작하였으며, 1988년 11월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장애인등록 현황은 장애인복지의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실태를 파악해야 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989년 전국의 등록 장애인은 21만 8601명이고, 부산의 경우에는 애석하게도 정확한 숫자를 알 수가 없었다.

두 번째로 한 일은 1992년 12월 1종 운전면허를 위한 교통대책위원회 구성이었다. 자동차가 나오고 세계최초로 운전면허를 획득한 사람은 1893년 3월 프랑스의 에밀 르바소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운전사는 1915년 영친왕의 미국제 오버랜드를 운전한 윤권 씨였고, 최초의 면허는 1915년 필기시험에 합격한 이용문 씨가 우리나라 운전면허 1호이다.

그 후 산업화의 발전으로 자동차는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장애인의 운전면허가 불허였다. 능력 있는 장애인들은 외국에서 국제면허증을 받아 오기도 했다. 그러자 정부에서도 어쩔 수 없이 1983년부터 장애인에게도 운전면허를 허용했으나 2종 면허에 불과했다. 운전면허는 대형 소형 보통이 있는데 보통 중에서도 2종 운전면허만 장애인에게 허용된 것이다. 1종 보통과 2종 보통의 차이는 영업용과 자가용이다.

몇 년 동안 장애인은 그나마 운전면허가 허용되었다는 것에 감지덕지했다. 그런데 운전을 할 줄 아는 장애인들이 늘어나자 점차 운전으로 생계를 꾸리고자 하는 장애인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2종 면허로는 택시 등 영업을 할 수가 없었다. 장애인들은 자가용으로 불법 영업을 하는 이른 바 나가시(ながし)를 시작했다. 경찰에서도 장애인들의 나가시를 묵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멋모르는 한 경찰이 장애인 나가시를 적발 한 것이 기폭제가 되어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보건복지부 앞에서 농성. ⓒ이복남

정부에서는 삶의 질을 논하며 세계화를 외치고 있었지만 장애인에게는 1종 운전면허도 안 된다고 했던 것이다. 노자 도덕경 57장에 의하면 천하다기위 이민미빈(天下多忌謂 而民彌貧)이라, 천하에 금하는 일이 많으면 백성은 더욱 가난해진다고 했다.

그 후 장애인 1종 운전면허 취득을 위해 참으로 많이 싸우고 가열하게 투쟁했다. 그 때가지만 해도 전국적인 투쟁은 아니었었다. 부산장총에서는 각계각처에 공문을 보내고, 부산역에서 서명운동을 벌이고, 서울 경찰청을 비롯하여 민자당, 보건복지부 등을 항의 방문했다.

1종 면허 취득을 위해 서울로 가는 날은 예정했던 전세버스를 경찰이 에워싸는 바람에 첩보전을 방불케 했다. 교통대책위 조창용 위원장을 비롯하여 필자 등 임원진들은 버스근처에는 접근조차 못하고 다른 승용차로 갈아타고 비밀리에 다른 곳에서 기다리다가 바로 서울로 출발하고 대형 버스는 뒤따라 출발하는 일도 있었다. 요즘 같은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은 깨지 마라 했거늘, 정치권과 경찰청에서 장애인에게도 1종 운전면허를 허용하겠다는 확답을 받았으나 보건복지부에서 반대를 했다. 보건복지부에서는 모든 장애인이 아니라 양하지 장애인에게는 1종 운전면허는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누가 복지를 투쟁의 산물이라 했던가. 그날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대부분이 울고 또 웃었다. 몇 년을 두고 투쟁한 결과였으나 반쪽의 승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후 제2차 교통대책위를 재정비하여 김용국 위원장을 중심으로 투쟁한 결과, 2001년 1월부터 양하지 장애인에게도 1종 면허가 허용되었다. 제2차 교통대책위 때는 부산장총의 활약상이 이미 전국적으로도 알려지기도 했지만 김용국 위원장이 각 지역 장총을 방문하고 설득해서 연대를 끌어내기도 했었다.

자동차산업부산유치 시민연대. ⓒ이복남

장애인복지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우리를 좀 도와주지 않으냐?”고 시민들에게 원망 아닌 원망을 하곤 했었다. 부산장총에서는 방법을 달리했다. “네게 오라고 말 할 게 아니라 우리가 다가가자”였다. 부산장총의 장애인 운동은 경제는 물론이고 환경 분야 등 대부분의 시민운동에 함께 했다.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한 부산시민운동협의회, 자동차산업 부산유치추진위원회,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 부산시협의회, 부산시민운동단체협의회, 낙동강살리기 위천공단결사저지 부산총궐기본부, 국난극복을 위한 부산시민회의, 부산지역 실업대책협의회, 부산경제가꾸기시민연대 등 부산의 현안이 되는 대부분의 시민운동에 참여를 하였으며 때로는 부산장총의 정화원 회장이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낙동강살리기 위천공단결사저지 부산총궐기본부에서는 부산역에서 여러 번 집회를 했다. 그럴 때마다 부산장총에서 많은 장애인들이 참여했는데 그 때마다 무대 한편에는 수화통역자가 통역을 하게 되어 많은 시민들이 장애인의 참여를 직접 느끼기도 했다.

장애인등록 홍보캠페인. ⓒ이복남

그 밖에도 각종 선거 때마다 후보자들에게 정책을 제안하고, 나누리봉사단을 설치해서 장애인들에게 투표를 독려했다. 그리고 장애인등록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부산역에서 홍보캠페인을 했는데 당시만 해도 장애인등록은 무료였음에도 장애인들은 등록을 잘하지 않았다.

1990년대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척박했다. 장애인 가정은 두 부류 정도로 첨예했다. 가족들에게 천시 받고 친인척이나 이웃이 알까 봐 다락방에 숨겨진 장애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간혹 장애인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해서는 안 되는 왕자나 공주처럼 길러지기도 했다.

부산장총에서는 장애인복지 운동을 하면서 장애인이 되기를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장애인도 보통사람으로 길러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부산장총과 동아대학교에서는 장애인인식개선을 위해서 해마다 부산역에서 인식개선 한마당을 펼쳤고 부산장총에서는 후원이사들까지 나서서 대대적인 홍보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등록장애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장애인등록을 하게 되면 지하철은 무료이고, 장애인 차량은 특별소비세 취등록세, 자동차세 등이 면제되고, 전기요금 수도요금 전화요금 철도요금 등이 할인되었다.

그리고 1500CC 이하로 묶여있던 장애인 차량이 2000CC로 늘어나고 자동차 관련 면세가 보호자 등 가족까지 확대 된 것도 일조했을 것이다. 고속도로 통행료는 반액이고 유료도로는 면제였다. 더구나 병원이나 관공서 마트 등에서 출입구에 가까운 자리에 장애인주차구역이 있었으므로 장애인등록은 자연스레 늘어난 것 같았다.

부산장애인종합회관 개관식. ⓒ이복남

무엇보다도 장애인등록이 늘어난 것은 택시만 사용할 수 있던 LPG연료를 장애인도 사용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시만 해도 유류 값이 꽤 비싼 데 비해 상대적으로 LPG 값이 쌌던 것이다. 물론 등록 캠페인을 떠나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장애인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으로 보도한 덕도 있다.

그러다가 정부에서 RV차량에 LPG 연료를 허용하게 되자 LPG가격이 급등하게 되었다. LPG가격 오르자 LPG연료를 사용하던 장애인들이 아우성을 쳤다. 정부에서는 오른 가격만큼은 장애인에게 지원하겠다며 장애인들의 분노를 무마시켰다. 당시 장애인들은 한 달에 250리터까지 1리터당 200원씩을 지원했는데 금액으로는 보통 5만~6만 원가량이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차량을 소유한 소수의 장애인만 혜택을 본다는 지적을 받아 지원은 점차 줄어들더니 2010년에는 아예 폐지가 되고 말았다.

부산장애인총연합회 30년사. ⓒ이복남

LPG 지원금 폐지에 대해서 많은 장애인들이 반론을 제기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반대를 했던 사람들은 거의 다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었다. 정부에서는 LPG 지원금을 폐지하고 그 돈으로 장애인연금을 주겠다고 했는데 장애인연금은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 등이었다. 그나마 차량 유지비라도 아껴서 알뜰살뜰 살아가던 장애인들을 나락으로 떠다밀어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이와는 별개로 2001년에는 정화원 회장의 사임과 함께 필자도 부산장총을 그만 두게 되었다. 그 후 장애인등록은 유료화가 되고, LPG 지원은 폐지가 되었으나 부산장총 회원단체는 부산장애인회관에 입주하게 되어 남의집살이에서 벗어나 번듯한 사무실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후 부산장총은 해마다 광안리 해변에서 펼쳐지는 장애인한바다축제를 비롯하여, 거제도에서 치르는 바다낚시대회 등 개별 단체에서 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행사를 치르고 있다. 그리고 내몽고와 일본, 중국 등 해외 장애인단체들과도 교류를 맺고 오가면서 교류전시회를 비롯하여 초청공연도 하는 등 부산장총으로서의 위상을 제대로 확립하고 있다.

정화원 회장 이후, 이인영 회장, 김상호 회장을 거쳐 현재는 조창용 회장이 부산장총을 맡고 있다. 덕분에 지난 연말에는 부산장애인총연합회 30年史도 발간하게 되었다.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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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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