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가 장애인 근로자 및 근로의지가 있는 장애인의 다양한 재능 역량을 계발하고, 장애인도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근로 주체임을 사회에 알려 올바른 장애 인식 개선에 기여할 목적으로 지난 2000년부터 ‘장애인 고용 인식개선을 위한 Talent Contest’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로 18회를 맞은 Talent Contest에는 운문, 산문, 사진, 컴퓨터그래픽, 광고영상/스토리보드 등 5개 부문에 총 348명의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작품 770점을 응모했고, 1·2차 심사를 통해 총 55점이 최종 선정됐다.

에이블뉴스는 운문, 산문 부문의 입상작 26점을 총 10회로 나눠 소개한다. 아홉 번째는 산문 부문 가작 수상작 5편이다.

예비사회복지사의 꿈

허 소 영(여, 정신)

일하는데 뒤통수가 따갑다. 고개를 드니 정한이가 나를 보다가 얼른 고개를 돌린다. ‘쟤가 날 좀 좋아하지 ㅎㅎ’. 근데 또 고개를 들다 정한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그 작은 눈망울에 근심이 있다. 얼른 일어나 정한이 한테 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정한이가 일어나더니 나를 엘리베이터에 태워 1층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 간다. 그러더니 정한이 특유의 알아듣기 힘든 외계어를 쏟아낸다. 그리고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는다.

정한이는 아타깝게도 다운증후군이고 언어장애다. 눈도 나빠서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23살인데 배도 좀 많이 나오고 키도 작다. 항상 누군가 자기를 괴롭힌다고 느껴지면 내게 “엄마, ~~혼내줘” 하며 나를 의지 한다. 그런 정한이게 나도 마음이 많이 간다. 그는 억울하고 속상하다는 듯이 같이 일하는 누나들 이름을 대고 뭐라고 설명을 한다.

얘기를 알아듣기 힘들지만 달래주고 문제도 해결해 줘야지 생각했다. 그 순간 1층 문을 열고 나오신 원장님께서 “남자는 참을 줄도 알아야지, 뚝 그쳐라” 하셨다. 정한이는 그 말에 어느새 눈물을 닦고 웃음까지 지으며 다시 2층으로 향한다. 무슨 사연이기에 정한이는 나를 불러 울면서 억울한 얘기를 하는 것일까?

나는 언제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곳인 용산구립장애인 보호작업장에서 일하는 정신장애인이다. 우리 모두는 대략 40명 정도 되는데 우리는 지적장애가 있거나 정신장애를 갖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다들 착하고 성실하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정한이는 우리 중에서도 아주 밝고 긍정적인 아이다. 그는 우리 작업장에서 막내이며 가끔씩 작업장을 웃음바다로 만드는 분위기 메이커다.

그리고 어느 누구 못지않게 춤을 잘 추고, 뮤지컬 레베카를 비장하게 따라 부르는 감성지수 만점의 가수다. 나는 정한이를 보며 장애를 가진 것이 참으로 많이 불행하고 힘들다는 것을 느낀다. 그 내면에 끼도 많고 사랑도 많고 성실한 점도 많은데... 내 마음을 많이 아프게도 하고 내 마음의 문을 열어 준 아이 이기도 하다!

우리 작업장 식구들은 모두 개성이 뚜렷하고 일도 열심히 한다. 1층은 봉제팀, 2층은 임가공 사업팀으로 나는 2층에서 주로 볼펜검수를 한다. 나도 이제 3년차인데 동료들이 보기에 어땠는지 나는 작업장에서 볼펜검수 외에도 이것저것 일을 한다. 하루는 혜경 언니가 아침에 출근을 하더니 울상인 표정으로 내게 온다. 그리고는 “소영씨, 나좀 도와 줘”한다.

언니는 기초생활 수급자인데 수급비가 깎였다고 동사무소에 전화 걸어서 상담 좀 해달라고 한다. 그래서 동사무소와 구청에 전화를 걸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또 다른 한 언니는 은행에서 수표를 출금하는데 돈이 안 나왔다면서 돈 좀 찾아 달라고 한다. 늘 그랬듯이 나는 은행 문이 열리자마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 했더니 수표를 보관 중이라고 하며 곧바로 입금시켜 주었다.

그 언니는 많이 고마웠던지 점심을 먹고 앉아 쉬는데 내가 젤 좋아하는 “옛날커피”를 내민다. 좀 쑥스럽지만 고맙게 마셨다. 그리고 스마트 폰 다루기 힘들 때, mp3에 음악다운 받을 때도 나를 찾는다. 비교적 젊은 동료인 정한이, 혜은이, 강희, 유진이 은비 또 몇몇의 언니들은 이렇게 억울하거나, 아프거나, 일하는 방법이 헷갈리거나, 혼자 해결하기 힘든 일이 있거나, 혹은 좋은 일이 있어도 나를 찾는다.

그 모습을 보고 팀장님은 “소영씨, 선생님 대우받고 일 하네요” 하셨었다. 가끔 시간도 없고 일이 고될 때 부탁을 하기도 하지만 나는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즐겁고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나는 한국 열린사이버 대학교 사회복지학과 4학년 학생이기 때문이다.

간혹 언니들은 “소영이 사회복지사 되면 일 잘 하겠다” 하신다. 흐뭇하다. 그리고 사회복지사라는 뜻깊은 직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게 자랑스럽기도 하다. 내 자신이 병으로 고생하며 사회복지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터라 그 의미는 좀 남다르다. 하나의 촛불로 우리 모두의 초에 불을 붙일 수 있듯이 내가 받은 사랑이 그렇게 타인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한 학기 남은 학교생활도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해 본다. 지금 나는 어딘가에서 간절히 도움을 기다리는 또 다른 제 2의 소영이 들을 위해 사회복지사를 준비하며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작업장에 다니며 긍정적으로 변한 내가 지금은 대견하지만, 암울했던 첫 출근 날이 눈에 선하다. 때는 2015년 3월 2일! 작업장에 첫 출근을 한다. 새벽녘 지하철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치고 말없이 헤어졌다. 서로 다른 행동을 하고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지하철의 풍경 속에서 장애인 보호 작업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 본다. 아마 없겠지!

새삼 이런 생각이 들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 본다. 15년째 정신과 약을 먹고 있고, 살 곳이 없어서 장애인 거주 시설에 산다. 그리고 일반 직장에 취업하지 못하고 장애인 보호 작업장에 가는 중이다.

그 날 아침에는 그런 나의 처지가 삶을 짖누르는 짐 같고, 나는 어디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 이었다. 이렇게 사는 건 구차하게 연명하는 것이고, 거주시설 만기 끝나면 갈 곳 없는 신세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를 알았던 사람, 나를 아는 사람,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게 될까? 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발병하고 오랜 시간 동안 내가 느낀 고독감, 갈등, 방황, 고민은 나를 더욱 위축시켰고,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는 암담하고 모든 것이 절망적 이었다.

그런데 아무 기대 없이 다니기 시작한 작업장에서 나는 참 기적 같은 사건들을 겪었다. 우선은 정신과 주치의가 직장 다닌다는 말에 약을 많이 감량해 주었다. 그전에는 머릿속에 ‘자고 싶다’, ‘저걸 먹어야 겠다‘, ’이 일은 하기 싫다’, 이렇게 대략 세 가지 생각이 나를 지배했었는데 약을 줄이니 이 모든 게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물론 보통의 사람이 갖는 정도의 생각은 하고 있다. 그렇게 좋은 기회를 얻어 열심히 일해서 10월에는 우수근로인 표창을 받았다. 성실하고 우수하다고 칭찬하시며 상품으로 운동화까지 사주셨다.

상을 받고 나서 한 달 정도 뒤에 원장님은 나를 사무실에 앉히고는 사이버 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하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 속에서는 생각이 날개를 달고 이 생각 저 생각 떠올랐다. 내가 제일 두려운 게 ‘미래의 나 자신‘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힘으로는 돌파구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장님은 내 인생을 전환시킬 수도 있는 대책을 내놓으셨다.

내색은 안 한 것 같지만 속으로 많이 벅차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무한한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기초생활 보장법에 따른 수급자인 나는 ‘학비는 어떻게‘라는 생각에 선뜻 다니겠다는 대답도 못하고 뻔뻔하게 ’대학 또 나와서 뭐해요‘라고 답변 한 것 같다. 그렇게 얘기는 얼렁뚱땅 끝났지만 팀장님이 그해 겨울에 열린사이버 대학교와 mou를 체결해서 학비 전액 장학혜택을 받고 편입에 성공했다. 그리고 ’공부 열심히 해서 all A+ 받자‘고 다짐하고, 원장님께서 기뻐해 주시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첫 학기가 끝나고 정말 여섯 과목 A+받고 한 과목 A를 받아 등록금 30%를 면제 받는 성적장학금 수혜자가 되었다. 난생 처음 성적 장학금을 받은 나는 정말 감격했다. 원장님도 적지 않게 놀라셨다 “빵점만 받지 말고 열심히 하거라” 라고 말씀하셨었는데 내 성적표를 보시고는 덩실덩실 춤을 추시는게 아닌가! 그리고 잠시 부르시고는 아낌없는 칭찬과 격려를 해주셨다.

그리고 나도 나를 격려했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 마음속에 희망을 품고 있으니 내 자신이 더욱 건강해지고 행복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내 인생에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민, 방황, 갈등을 저 하늘 위로 날리고 작업장과 학교에 잘 적응하고 동화되어 가는 내 자신이 좋았다.

나는 언젠가 글에다 ‘우리 원장님은 퍼펙트한 사회복지사다’ 라고 쓴 적이 있다. 원장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한 애정과 관심을 보이시고 격려해주시는 분으로, 약간은 성직자다운 느낌을 풍길 때도 있다. 그리고 지영이의 아재개그에 몰두해 하나라도 맞추려고 하시고, 정답을 얘기하면 순진하게도 마냥 재밌어 하시는데 그 모습을 보면 정이 많은 친구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내게 원장님은 좀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 온다. 가령 내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힘들어 할 때 학교에 보내주셨다. 그리고 공부에 흥미가 생기고 나도 더 큰 일 해보고 돈도 모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는 나에게 “5년 내에 작업장 떠나서 일반 직장 가거라” 하셨다. 가끔 원장님은 본인을 무식한 원장이라고 하시지만 누구보다 더, 아니 소름 돋도록 똑똑하시고, 어쩔 때는 내 마음을 읽는 독심술사 같기도 하다. 나는 원장님 모습에 나를 투영해 본다.

아직은 비교도 안 되게 내가 한참 모자라지만 난 원장님 같은 복지사가 되고 싶다. 봉제팀에서 손수 미싱 밟고 납품가시는 등 솔선수범 하시는 성실한 모습도 좋고, 가끔 기타를 가져오셔서 즐겁게 노래 불러주시는 모습도 좋고, 또한 수완도 좋으셔서 후원금도 잘 받아 오신다 원장님은 복지사로서 귀감이 되시는 분이고, 그 중에서도 난 원장님의 마음씨를 닮고 싶다. 아직 그 깊이를 다 알지 못하게 깊으신 원장님의 마음을 말이다.

지금은 원장님처럼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지만, 나도 어릴 때 꿈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읽고선 하이디처럼 학교에 가지 말고 매일 산이며 들로 또 계곡을 다니며 맘껏 뛰어 노는 게 꿈이었다. 그렇게 세상 물정에 늦게 눈뜬 나는 대학 4학년 때는 정치부 기자를 꿈꾸며 <조선일보> 기자 시험을 치뤘었다. 물론 낙방을 했다.

그리고 병이 찾아 왔다. 그리고 그 후로 더 이상 미래를 아름답게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병으로 꿈을 접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을 바로 잡아본다. 역경이 있다고 해서 모두 꿈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얼마나 세상을 모르고 또 나를 평가절하 했었나. 그리고 또 얼마나 게을렀던가. 이제는 내 병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나를 더욱 단련 한다.

나의 단점이 장점으로 승화되기를 바라며. 작업장의 동료들이 주는 편안함과 우정으로 위안 삼고 원장님의 관심과 조언으로 내 마음가짐을 다시금 새롭고 자신감 있게 고쳐나간다. 객관적인 성취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 수준이지만 나를 칭찬하며, 내 내면의 소리에도 귀 기울이고 가능성 있고 발전적인 인생목표를 추구 한다 병을 얻고서 가장 힘들었던 점, 후회되는 것이 내가 대인관계를 잘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요즘은 이런 생각을 한다. 타인과 마주 대하고 나서 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또 보고 싶어’ 라는 생각이 들면 좋겠다고 말이다.

나는 이 곳 용산구립 장애인보호작업장에서 월급 받고, 공부할 때도 전액 장학금을 받고, 사회조사 분석사라는 자격증도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예고 없이 내게로 다가온 희망을 단단히 잡고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언젠가 원장님은 “너는 재능이 많은 사람이야, 낙심하지 말고 미래를 꿈꿔봐” 하셨었다.

그래 나에게 힘을 주는 원장님을 비롯해 선생님들과 동료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다시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나와 약속 한다. ‘나의 재능을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내가 손수 마련한 붓과 물감으로 태양 빛이 가장 찬란할 때 나만의 ’행복의 그림‘을 그려 나갈 것이다’.

그리고 남들이 뭐라고 수근 거려도 소중한 나를 폄하하지 않고 사회의 편견, 차별을 미리 겁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행복은 꿈꾸는 자의 것이고, 성공은 노력하는 자의 것이다. 언젠가 나는 나를 “사회복지사 허소영 입니다”라고 소개하며, “저도 많이 아팠었기에 당신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 할 날을 꿈꿔본다.

옷 짓는 소리

박 영 숙(여, 청각)

6·25 전쟁이 한창일 때 나는 홍역을 앓았다. 갓 돌을 넘긴 여동생도 홍역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별 예고도 없이 마을로 찾아든 이 달갑지 않은 객은 뜸 들이는 법 없이 곧장 달려들어 아이들의 숨통을 낚아채갔다. 어미는 폭격을 피해 아이들을 데리고 아궁이 옆으로 몸을 숨겼지만, 질기게 따라붙는 홍역만큼은 피할 도리가 없었다. 폭격이 멎은 후 여동생의 숨도 멎어버렸다.

어미의 곡소리가 불안한 적막을 허물어뜨렸다. 죽은 아이를 업은 채 저물도록 땅을 치며 울었다. 전쟁보다도 무서운 것이 홍역이었다. 애끓는 곡소리가 담장을 넘는 건 비단 우리 집뿐만이 아니었다. 강줄기를 한데 끼고 사는 다섯 동리의 집집마다 애달픈 곡소리가 흘러나와 길을 가득 메웠다. 동리마다 아이들의 씨가 마르다시피 했다. 몇 안 되는, 살아남은 아이 중 하나가 나였다. 생과 사를 놓고 무엇이 나은지 고르기조차 힘든 날들이었다.

당시 나는 세 돌을 넘겨 곧잘 걷고 뛸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남은 자식마저 잃을 수 없다는 집념 때문이었는지 헐거워진 포대기로 수시로 나를 업고 다니셨다. 온 몸에 고름이 차고 진물이 흘렀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밭에서 무를 뽑아다가 즙을 짜내 피부에 바르는 게 전부였다. 위로 여섯 살이 많은 막내 고모가 울며 보채는 나를 업고 마을 정자나무 아래로 마실을 가면 사람들은 나의 몰골을 보고 혀를 차곤 했다.

전쟁이 끝나고 홍역의 기세가 한 뿔 꺾였는지 온 몸에 달려들던 고름과 진물은 호전되는 듯 보였으나 유독 한 군데, 오른쪽 귀만은 더딘 걸음으로나마 차츰 상태가 악화되었다. 자고 일어나면 베갯잇이 흥건하게 적셔 있곤 했다. 한약방으로 의원으로 약을 타러 다녔지만 진물은 멎지 않았고, 내내 솜뭉치로 귀를 틀어막고 다녔다. 초등학교 입학 전, 대도시에서 신문사 기자로 일하던 숙부의 도움으로 의료봉사를 와 있던 외국인 의사에게 수술을 받았지만 차도는 없었다.

집에서 생활할 때와는 달리 학교에서는 고충이 있었다. 가까이에서 나누는 대화 정도는 문제가 없었지만 먼 거리에서 들리는 소리는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 때는 학교라는 것 자체가 귀했던 때로, 특수학교라는 개념도 없을 때였다. 어떡해서든지 버텨내고 공부를 이어가야 했는데 다행이도 담임 선생님과 짝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종례 후 담임 선생님은 언제나 나의 공책을 확인하셨는데, 혹시나 빠뜨린 내용이 있으면 손수 적어주시곤 하셨다. 살면서 무수한 인연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는데, 당시의 담임 선생님도 귀한 인연 중 한 분이시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평탄한 길로만 걸어지는 게 아니었다. 어린 시절 나를 수술해 주신 의사 선생님이 말썽부리는 오른쪽 귀로 인해 멀쩡한 왼쪽 귀도 덩달아 탈이 날 수 있다고 예고했었는데, 기어이 그 날이 오고야 만 것이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단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베갯잇이 흥건하였다. 습관처럼 속 썩이는 오른쪽 귀를 만졌는데 진물이 묻어나지 않았다.

순간 심장이 땅 끝으로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왼쪽 귓바퀴를 만졌더니 축축한 진물이 만져졌다. 그 자리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 부엌에 계시던 어머니와 마당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일가족들이 일제히 달려와 나를 달랬다. 그러나 모두 나를 향해 입만 뻐끔거릴 뿐, 소리는 아득히 멀어지는 듯 했다. 그리하여 나는 한 차례 더 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큰 기대는 할 수 없는 수술이라고 못을 박았다. 다행히 수술 후 왼쪽 귀의 진물은 잡혔지만 오른쪽 귀는 그전처럼 내내 솜으로 틀어막으며 지냈다.

오른쪽 귀로 향하는 문이 완전히 봉쇄되고, 왼쪽 귀의 반쯤 벌어진 문도 이따금씩 바람에 여닫히며 덜커덩거렸다. 나의 사정을 빤히 아는 이웃들이나 가족들과의 대화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는 바짝 긴장을 해야 해서 차츰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기피하게 되었다.

한동안 집안일을 도우며 집 울타리 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금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것은 다섯 살 어린 남동생의 중학교 입학에 즈음해서였다. 어머니를 도와 남동생의 교복을 만들었는데 까닭 없이 그 일이 그렇게 재미났다.

우리 집에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재봉틀이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시집 올 때 장만해 오신 것이었다. 도시 처녀였던 어머니는 농사일에는 서툴렀지만 바느질 솜씨는 마을에서 으뜸이었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의 바느질을 대신 해주고 농사 일손을 얻곤 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어깨 너머로 어머니의 바느질을 보며 자란 덕분인지 나 역시 웬만한 바느질은 능숙하게 해냈다.

그러나 교복은 정해진 양식이 있고, 딱 떨어진 한 벌로 지어야 했기 때문에 혼자서는 자신이 없었다. 솜씨가 들어가는 교복 상의와 바지는 어머니가 맡아서 하시고, 나는 셔츠 두 벌을 맡았다. 마침, 중학교 가정 시간에 셔츠와 블라우스를 만드는 실습을 하며 마련해 둔 본이 있어서 참고할 수 있었다.

셔츠 앞판과 뒤판, 소매와 옷깃을 따로따로 제작해 이어붙일 때까지 남동생은 낮으로 밤으로 몇 차례씩 내 앞으로 끌려와 가봉 작업에 동참해야 했다. 그 때마다 동생은 누나가 얼마나 잘 만드는지 두고 보자며 썩 싫은 티를 내면서도 시키는 대로 꾸역꾸역 따라주었다. 지금은 훌쩍 저 세상으로 떠난 남동생이 살아있을 때 이따금씩 내게, 누나 바느질 솜씨 키우는데 제가 크게 일조 했노라며 농을 하곤 했었다. 남동생의 입학식 날, 어머니와 내가 마련한 교복을 입고 학교로 가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동생에게 급우들과 비교해 옷이 어떻더냐고 물었지만 사내 특유의 무뚝뚝함인지 별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후로 동생은 교복이 뜯어지거나 고칠 일이 있으면 나를 찾곤 했다. 어머니의 잔소리 때문이라고는 했지만 내 솜씨가 영 형편없지는 않은 듯 하여 자신감을 얻었다.

그때부터 나는 안방 다락이며 아래채 광을 열어 오래돼 낡은 옷이나 자투리 천을 찾아 이것저것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남동생 밑으로 두 명의 동생이 줄줄이 죽고, 어렵사리 태어난 어린 여동생을 위해 인형도 만들어주었다. 재미를 붙이니 실력이 느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마을 사람들이 한두 명씩 내게 바느질을 부탁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이웃 마을에까지 소문이 나서 숫제 수선점 간판을 내달아야 할 정도가 되었다.

지금과 달리 옛날 재봉틀은 소리가 유난스러웠는데, 나야 소리가 아득하여 크게 거슬리지 않았지만 밤낮으로 덜덜거리며 귀를 때리는 소음을 무던히도 참아준 가족들이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고맙다. 반만 벌어진 왼쪽 귓문조차 닫히는 날이 오면 나의 육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천덕꾸러기가 될 거라 생각하며 비관하던 나는 어느 새 세상으로 향한 길 위에 서 있었다. 닫힌 귀만을 생각하며 숨어 지낼 때에는 세상이 온통 소리만을 원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문밖의 세상에는 나의 길도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소리가 아니더라도 나의 몫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할머니와 함께 부산 국제시장을 찾았다가 편물기계를 보게 되었다. 생전 처음 보는 새로운 문물이었다. 당시만 해도 옷이란, 무명천으로 박음질하여 입거나 특별한 날을 위해 짓는 한복이 유일했다. 편물 기계로 짠 화려한 레이스나 스웨터 재질의 옷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그날로부터 머릿속엔 온통 편물기계 생각으로 가득 찼다.

몇날며칠을 열병 앓듯 앓다가 편물을 배우겠다며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리고 얼마 후 제사를 지내러 시골에 내려오신 숙부 편에 함께 부산으로 내려가 편물 학원에 등록을 했다. 얼마 간 모아둔 돈과 어머니가 챙겨주신 용돈으로 일전에 눈여겨 봐두었던 편물기계를 구입해 학원을 다녔다.

좁은 교실에 수많은 처자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수업을 들었다. 청력이 걱정되었으나 다행히 수업은 실습 위주로 진행되었고, 설명도 칠판에 그림을 그려가며 했기 때문에 크게 어려운 점은 없었다.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을 들었다. 숙부 댁에 빌붙는 처지라 아침저녁 집안일을 도맡아 했지만 힘든 줄을 몰랐다. 실력을 꽉꽉 채운 하루하루가 무서운 속도로 지나갔다.

몇 달 후 고향에 내려와 편물 기계로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스웨터와 같은 옷이 귀했던 때라 집으로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허나 실 값이 비싸서 선뜻 주문하는 이는 적었다. 그러다가 어머니와 함께 제사 장을 보러 장날 시장에 나갔다가 외국에서 보내 온 구호물품 트럭에 수북이 쌓인 옷을 얻게 되었다.

누구라도 공짜로 옷을 가져갈 수 있다는 말에 사람들이 너나할 거 없이 달려들어 옷을 채갔다. 그 틈에 나도 욕심껏 옷을 챙겼다. 주로 스웨터 재질의 옷들로 골랐는데, 한 올 한 올 실을 풀어 편물기에 걸고 새로 옷을 만들었다. 따로 실 값이 들지 않으니 공임비만 책정해 싸게 팔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든 옷들은 인기가 좋았다. 시간이 지나며 내가 별도로 시간을 내 시장에서 옷을 받아오지 않아도 사람들이 옷을 가져와 공임비를 내고 새 옷을 지어 달라 부탁했다. 개중 한센인 마을에서 오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 작은 고개를 하나 넘으면 한센인들이 모여 사는 텃골이라는 동네가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외가가 있던 웅평으로 가는 길에 텃골을 지나다니곤 했는데, 당시만 해도 소위 문둥이병이라고 불리던 한센병에 대한 유언비어가 많았을 때라 나는 그 앞을 지날 때면 겁이 나서 숨도 쉬지 않고 뛰어가곤 했었다. 그러나 내 귀가 온전치 못하게 되면서 그들에 대하는 나의 태도도 사뭇 달라졌던 것 같다. 내게 옷을 부탁하러 온 이는 텃골에 있는 교회의 목사였다. 그는 옷을 부탁하며 텃골에 한 번 들려달라고 청하였다. 텃골에는 별도로 배정된 구호물자가 많은데 좋은 옷을 두고도 외국 사람들과 체구가 달라 입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한센인들은 따로 격리되어 있으니 따로 와서 부탁하기도 힘든 형편이라 했다. 며칠 후 나는 텃골로 향했다. 용기를 냈다기보다는 실에 대한 욕심이 더 컸던 것 같다. 마을 입구에 있는 교회의 예배당에 앉아 기다리니 목사를 비롯한 마을 사람 몇몇이 옷을 들고 들어왔다. 얼굴을 가린 이도 있었고, 소맷부리도 손등을 가린 이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하는 이들 같았다. 나는 그들의 인상착의를 기억했다가 가져온 옷의 실을 풀어 새 옷을 지었다. 짓물러진 입을 가릴 수 있게 목이 긴 스웨터를, 손등을 가릴 수 있게 한쪽 소매가 긴 옷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내게 무척 고마워하며 미군에서 보내준 우유가루며 사탕 등을 챙겨주고는 하였다.

그렇게 수시로 텃골을 드나들다가 나의 귀에 대해 알게 된 사람들의 배려로 그곳 병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텃골에는 외국에서 보내 온 좋은 약들이 많았다. 나는 의사에게 하얀 가루약을 받아 수시로 진물이 흐르는 오른쪽 귀에 뿌리고는 했다. 내내 솜으로 틀어막고 살았는데 그 약을 뿌린 후로 낮 동안은 귀를 내놓고 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후로도 나는 시집가지 전까지는 주기적으로 텃골을 찾았다. 그 때의 고마운 기억 때문에 나는 일흔이 된 지금까지도 이따금씩 한센인 마을로 봉사활동을 가곤 한다.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미사를 함께 드리고 밥을 먹는 정도라 봉사라는 말이 가당찮지만, 어떤 이는 처음 접한 낯선 풍경에 겁을 집어먹고 버스에서 내리지도 못하기도 한다.

편물 기계로 옷을 만들어 팔아 차곡차곡 돈을 모아 남동생의 학비에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이웃마을에 살던 신랑과 혼인했다. 쌍꺼풀이 짙고 눈이 큼지막한 신랑은 키는 작았으나 체격이 좋았고 선해 보이는 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태권도를 하는 이라고 소개받았으나 당시에 나는 운동이 무엇인지, 태권도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에 어른들의 추천으로 혼례를 올렸다. 시집을 가서도 나는 사흘들이로 친정에 들렀는데,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장에 나갔다가 어머니의 지인의 집에 들렀다.

신혼집과 머지않은 곳에 있던 집이었는데 한복을 만들고 계셨다. 당시 공장에서 기계로 짠 스웨터가 막 나오기 시작할 때라 나의 편물 작물도 시들하던 참이었다. 한복을 짓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그 분의 앙상한 다리에 시선이 갔다. 먼저 묻기도 미안하고 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집을 나서며 소아마비로 어릴 때부터 다리를 전다고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다.

얼마 후 나는 어머니께 부탁해 그 분께 한복 짓는 것을 배우러 다녔다. 성실하였으나 벌이가 시원찮았던 남편의 짐도 덜어주고 싶었고 한복 만들기에 재미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후 남편과 함께 도시로 이사를 나오며 어시장 골목의 포목점 근처에 셋방을 얻어, 나무판자에 ‘한복’이라는 글자를 써 붙여놓고 한복을 지었다.

남편이 어렵게 마련해준 석 돈 짜리 결혼반지를 팔아 재봉틀을 샀다. 밤낮으로 재봉틀을 돌려 한복을 지었다. 그 사이 아들과 딸이 태어났다. 나는 혹여나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놀림이라도 받을까봐 가족들에게는 내내 귀의 사정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밤, 연탄가스가 새서 식구대로 죽을 뻔했던 일이 있었다. 나는 남편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사경을 헤맸다. 남편에게 울며 사정을 이야기 하자 남편은 나를 다독이며 이미 알고 있었노라고, 먼저 아는 체를 하면 마음이 다칠까봐 짐짓 모른 척 했노라고 고백했다.

나의 부탁으로 남편은 아이들이 클 때까지 비밀을 지켜주었으나, 후에 아이들은 자신들도 이미 알고 있었노라고 고백했다. 얼마 전 아들이 좋은 보청기를 구해 와 내게 내밀었다. 오래 전 마련했던 보청기는 아끼다가 고장이 나 무용지물로 서랍에 처박힌 지 오래였다. 미세하지만 소리를 들으니 그것 역시 행복했다.

이제 나는 재봉틀에서 내려왔다. 재봉틀은 아픈 몸으로 옷수선일을 하는 아랫집에 주었다. 재주가 있으니 떳떳하다고 칭찬해 덤으로 얹었다. 나의 삶은 고요했으나 행복했다. 재봉틀이 돌아가는 소리는 세상의 페달을 힘껏 밟고 있음을 외치는 것이었다.

ing인생(나의 꿈은 교육을 통해 진행 중이다.)

차 진 환(남, 지체)

내가 현재 앓고 있는 근육병은 루게릭과 같이 UN에서 지정한 5대 희귀난치성질환으로 현재로서는 치료법이 없으며 물리치료와 호흡재활만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질병이다.

대학교 때 발병되어 처음에는 자주 넘어지고 앉고 일어서는 게 고통이었지만 이런 불편함은 머지않아 나의 내부 장기까지 마비가 진행되어 폐렴과 감기 등으로 호흡부전과 심장이 약해지는 등의 합병증을 일으켜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난 늘 두렵다.

전신의 모든 근육에 단계적으로 근력저하가 생기기 때문에 일상생활 전 영역에서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보조인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즉 타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자립에 대한 생각이나 의지가 있지만 신체적 약점과 심리적 문제 때문에 실천에 옮기지도 못한다. 그래서 난 늘 나약하다.

하지만 나는 넉넉하지는 못한 생활이었지만 배움의 꿈을 펼쳐주는 자식들이 있어 행복하시며 아낌없는 지원과 사랑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헌신과 중도장애로 힘들어하며 해보지도 않고 도움부터 요청하려고 했던 내게 무엇이든 희망을 갖고 먼저 시도해 보게 하셨던 어머니의 똑똑한 가르침 덕분에 장애를 극복하고 꿈을 향해 멈추지 않는 도전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래서 난 늘 행복하다.

계절이 오고 가듯이 나의 꿈도 멈추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육교를 참 좋아한다.

요즘 보이는 육교의 형태는 그냥 일반적인 육교부터 엘리베이터가 있는 육교,

자전거육교, 육교 폭을 넓혀 육교 위를 공원으로 만들어서 작은 동산을 지나가는

기분을 주는 생태육교까지 정말 다양하게 있다. 육교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큰 길을 건널 수 있도록 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천국의 계단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내게 엘리베이터가 없는

육교는 친근함을 주지 못하고 그저 부담감만 줄뿐이다. 노량진 학원가에서 청춘을 보낸 수험생들에게 35년간을 버티며 노량진으로 오고 갈 때 가장 먼저 반겨주던 노량진 육교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있는 육교는 내가 가고 싶은 길과 길을 연결해주는 내 인생의 소중한 통로가 되었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영화와 같은 삶을 살게 된 나는 장애인들의 삶을 상당히

극적으로 표현하는 장애인 영화들 주인공처럼 드라마틱하게 내 삶속에서 인간

승리 자체만을 보여주고 싶어 날마다 최선을 도구로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현실을 덮어버리고 인간승리만을 강조하기에는 장애인들이 겪어야하는 좌절과 아픔이 너무 크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고 오늘도 그저 영화 속에서 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내게 또 다른 영화 잠수종과 나비는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내는 행복의 열쇠가 되었다. 영화<잠수종과 나비>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프랑스 패션전문지 ‘엘르’의 최고 편집장 ‘쟝 도미니크 보비’는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려져 20일 동안 의식을 잃은 후 왼쪽 눈꺼풀만 움직이는 장애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완전히 굳은 몸으로, 의식은 또렷한 채 세상을 지켜만 봐야 하는 상태로 살아가지만 좌절의 순간에서도 ‘쟝’은 희망을 가지며 자신의 상상력에 의존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 눈을 깜빡이는 횟수로 스펠링을 설명하여 자신의 일과 사랑, 그리고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상상하며 담담하게 책을 써 내려간다. ‘쟝’은 자신의 책 속에서 영원히 갇혀버린 잠수종을 벗어나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한 마리 나비로써 또 한번의 화려한 비상을 꿈을 꾸게 된다.

이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잠시 생각해본다.

우리 장애인 교육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왼쪽 눈꺼풀만 깜박일 수 있는 우리가 오르기 위해 통과해야 할 기준은 너무나 까다롭다. 우리 몸에 대한 선입견을 배제하고 과감히 역할을 맡기지도 않는다. 간혹 역할을 맡겨주는 사람이 있더라도 우리가 해낼 수 있도록 창의적인 연출과 조력까지 뒷받침해주지 않는다. 우리 인생의 무대를 새롭게 만들고 스포트라이트의 방향을 바꾸는 등의 놀라운 움직임이 뒤따르지도 않는다.

그저 화려한 무대의 객석에 앉을 기회를 1년에 몇 번 줄 뿐이다.

하지만 그 몇 번 없는 기회를 통해 다시 일어서게 된 나는 주변 장애인 친구들에게 객석에 앉을 기회라도 잡아 우리의 무대로 바꾸는 강력한 힘을 발휘해 보자고 말하고 있다. 현재 엘리베이터가 있는 육교처럼 많은 사회복지 시설, 장애인편의시설을 통해 많은 장애인들이 수혜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런 정책들은 장애인에 의한, 장애인을 위한 지속적인 정책이 되지는 못한다.

나는 광주광역시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장애인 행복 공감 아이디어 발표회에서 장애인 복지 콜 센터, 공직 디딤돌 찾기와 같은 장애인 당사자로써 정책 제안을 해서 광주광역시장상을 받았지만 광주의 장애인정책으로 될지는 미지수다.

그래서 이젠 정책의 방향이 장애인편의시설(육교)에서 장애인교육시설(교육)으로 바뀌도록 정책의 현장에 내 삶의 경험을 온전히 공유, 공감할 수 있도록 배움을 통해 직접 다가가고자 열심히 노력을 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장애인정책을 펼칠만한 사람이 현직에 없다면 “내가 엘리베이터가 있는 육교를 통해 가고 싶은 곳을 갔던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있는 교육을 통해 그 자리에 들어가서 마음껏 이런 장애인정책을 펼쳐보자”라고 결심을 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현실에서는 장애인 교육의 엘리베이터는 운행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좌절을 하고 말았다.

나는 하루도 성장하지 않는 해를 보낸 적이 없다.

나는 계속 변화해왔고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기대하며 살고 있다.

내가 만나는 온갖 기회, 빛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속에서 벅찬 감격과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행복의 열쇠는 바로 여기 교육에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누구보다 더 장애인 교육을 사랑하는 나는 늘 마음속에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어깨됨이 핵심입니다’는 적극적인 지원의 의미를 담아 Academy(어깨됨이)센터를 꿈꿔왔다. 일반적인 아카데미 센터가 아닌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중증장애인수험생들에게 어깨가 되어 주는 희망의 동반자들이 늘 함께 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어깨됨이 센터를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공모전을 계기로 미시적인 계획에서 거시적인 계획으로, 단편적 계획이 아닌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의 필요성을 깨닫고 생각정리의 기술을 통해 접근방법의 변화를 모색하게 되었다.

사랑은 빗물처럼..

최 선 영(여, 지체)

​휴일 오후의 한가로운 시간을 방해라도 해보고 싶은 듯

​열린 창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의 열기는 온 집안을 가득 채우며

심술궂은 붉은 미소를 보냅니다

하얀 커튼으로 녀석을 가려보려 하지만 좀처럼 물러설 줄 모르는 그의 온도에

항복이라도 하듯 커튼을 치다 말고 커피에 얼음을 동동 띄워 들고 옵니다

막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던 은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대학 동기 녀석의 전화였습니다

이번 동창회는 꼭 참석하라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간절한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하지만 썩 내키지 않았던 은수는 알겠다는 대답을 건성으로 하고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전화를 끊습니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던 은수는 다시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선배 언니의 전화... 은수를 무척이나 예뻐해 주던 선배라 그녀의 말에는 꼭 참석하겠다는 답변을 보냈지만

은수는 동창회가 부담스러웠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동창회는 늘 마음에서 멀리 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결혼식과 겹쳐버린 동창회... 결혼식에 얼굴만 내밀고 가려 했던 게 도저히 그럴 수 없어

예식이 끝나고 사진촬영까지 마치고 나니 동창회 공식행사는 이미 끝나버렸네요

2차로 모이는 자리에 선배 언니의 부름을 받고 은수는 달려갑니다

선배 중에는 은수의 이름만 알고 얼굴은 처음 보는 선배도 있었고

은수를 많이 예뻐하며 좋아했던 선배들도 있었습니다

동기들은 거의 자리를 떠나고 선배들만 가득한 자리에서 은수는 어색하지 않으려고

많이 웃고 궁금하지도 않은 것들을 물어보며 여기저기 안부를 건네고 있습니다

은수처럼 뒤늦게 나타난 선배가 조금은 불편한 걸음으로 들어섭니다

눈인사만 건네는 은수를 그 선배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은수 옆자리를 굳이 앉아야겠다며 이미 앉아 있는 다른 선배를 밀쳐내고

은수 옆에 앉습니다

그를 향한 다른 선배들의 야유 소리가 들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은수를 주시합니다

"너... 나 모르겠어?"

"선배님이시잖아요..."

당연한 질문에 은수 역시 당연한 대답을 건넸습니다

그는 말없이 피식~웃더니 그때부터 다른 선배들과 안부를 주고받습니다

3차를 가자는 말과 함께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고 은수도 이제는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함께 일어서는데...

"​야~밖에 비 오네"

어느 선배의 말에 다들 창밖으로 시선을 보냅니다

언제부터 왔을까... 제법 빗줄기가 굵어 보입니다

"우진아 너 차 어디다 세워놓고 왔어?"

"공용주차장"

은수 옆자리에 앉았던 선배는 우진이었습니다

"우린 뛰어가면 되는데 우진이 어떡하냐~ 우산 좀 빌려보자"

다리가 불편한 우진을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저... 우산 있어요 제가 씌워드릴게요"

은수는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들며 말합니다

"너 요즘도 우산 들고 다니니?"

우진은 은수를 바라보며 한가득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넸습니다

은수는 어린 시절 엄마가 직장을 다니셨기 때문에 혹시라도 비가 오면 엄마가 마중을 못 오니까

늘 우산을 가방에 넣어 다녔는데 그 습관이 지금도 남아있어서 일기예보에 맑음이라고 나와도

우산을 챙깁니다

그런데 은수가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것을 우진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우진을 향한 은수의 눈빛이 순간 달라지더니 표정까지 어두워집니다 

"우산 씌워준다며~ 어서 가자"

"아... 네"

은수는 굳은 표정을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조각들을 바라보다 우진의 말에

그제야 표정을 풀고 출입구 쪽을 향해 걸어갑니다

"톡으로 주소 남길게 그쪽으로 와"

"어~그래"

우진이 불편할까 봐 은수는 최대한 우산을 우진 쪽으로 기울여주었습니다

은수의 하얀 블라우스가 비에 젖고 있습니다

우진은 길을 걷다 말고 은수가 들고 있는 우산을 대신 들고는

은수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줍니다

"선배님 저 괜찮으니..."

"나... 때문에 네 어깨가 비에 젖는 거 싫어..."

우진은 은수의 말을 가로채며 말합니다

우진의 차 앞까지 온 은수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 합니다

"너 여기서 가면 나는 어떡하라고... 다음 모이는 장소도 주차장에서 한참 멀리 있는데...  그냥 비 맞으라고?"

우진의 말에 은수는 차에 몸을 싣습니다

우진은 은수와의 기억을 꺼내 보입니다

"우리 함께 우산 쓴 거 처음 아닌데... 혹시 기억 안 나?"

은수는 우진의 말에 다시 표정이 굳어지더니 말없이 차 유리를 타고 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며

기억을 되돌립니다

​잠시 은수가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기다리던 우진은 여전히 말없이 시간을 되돌리고 있는 은수를 바라보다

먼저 말을 꺼냅니다

"어쩌면 네가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몰라... 그때는 다리가 불편하지 않을 때였으니까..."

우진은 은수가 자기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확신한 듯 말을 합니다

"내가 고2였을 때였어 휴일이라 시내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서 막 내리려고 하는데

오늘처럼 굵은 빗줄기가 갑자기 쏟아붓기 시작했어

일단 버스에서 내렸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움직일 수가 없었어

그때 은수 네가 버스에서 우산을 들고 내리는 걸 봤어

무작정 네 우산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마 넌 그때 중학생이었겠지 어린 녀석이

당황하지도 않고 슬쩍 곁눈으로 보더니..."

"전 ㅇㅇ 아파트로 가요라고 말했었죠"

은수는 우진의 말을 가로채며 이미 기억하고 있던 것을 꺼내 보였습니다

"이제 기억나?"

"......"

​"나도 그 옆에 산다고 했었잖아..."

"근데 아니었죠 반대편이었던 거 알아요"

"어~ 너 그거 알고 있었어?"

은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은수가 아파트를 들어서고 건네주는 우산을 기어이 거절하며 바로 옆이니까 뛰어가면 된다고 했지만

왔던 길을 다시 달려가는 모습을 은수는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진은 빗속을 달리며 자신의 심장이 뜨겁게 뛰고 있는 것을 느꼈고

그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아무도 뛰는 심장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더 빨리 달렸습니다

​은수가 우진의 마음에 들어오고 우진은 은수를 멀리서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을 지켜만 보다 우진은 자신의 마음을 은수에게 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진은 은수 앞에 나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휴일 가족들과 나들이를 가는 중에 우진의 가족은 사고를 당했고

그 사고로 우진은 오른쪽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우진이 은수에 대한 마음을 접고 자신의 장애를 이겨내며 대학을 들어갔고 몇 년 뒤

학교에서 다시 은수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우진은 은수 앞에 그때도 나설 수 없었습니다

은수는 너무 아름다웠고 잃어버린 오른쪽 다리를 은수에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우진은 또 그렇게 은수를 바라만 보다 졸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후회했습니다

만약 다시 은수를 만난다면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지금 그 은수를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우진은 은수에게 마음을 전합니다

"오늘 바쁜 일 때문에 동창회 참석 안 하려고 했었어...

네가 그 자리에 온다는 말을 듣고 나도 급하게 갔던 거야

내가 많이 부족한 거 알아... 하지만 나 이제는 너를 놓치고 싶지 않다

네 옆에 아무도 없다면 그 자리 내가 채워주고 싶다 은수야..."

​우진의 말이 끝나자 은수의 눈에서 빗물처럼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우진은 순간 자신의 고백이 은수를 힘들게 했다는 생각에 당황해하며 말을 건넵니다

"은수야 미안해 네가..."​

"저 선배님 많이 기다렸어요"

우진의 말을 가로채며 은수는 말합니다

"선배님이 제 우산으로 들어오시던 그날... 시내에 나가시는 선배님 보고 서점을 가다 말고

저도 선배님 따라 시내를 갔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선배님을 따라 그 버스를 탔어요

오며 가며 버스정류장에서 선배님 봤었고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하면 선배님과 이야기해볼 수 있을까...

그랬어요... 그런데 그날 선배님이 제 우산으로 들어오셔서 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어요"

우진이 은수를 마음에 담기 전부터 이미 은수는 우진을 담고 있었습니다

우진은 손수건을 꺼내 아직도 반짝거리며 흘러내리는 은수의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은수는 매일매일 선배가 자기 앞에 다시 나타나주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기다렸다는 말과 함께

어느 날 선배가 보이지 않았고 선배의 사고 소식을 듣고 병실 앞에 찾아가 고통스러워하는

선배의 모습을 눈물로 지켜보았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그렇게 아파하고 그리워하며 선배를 지켜보았고 선배가 다니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는 말을 건넵니다

"은수야... 난... 네가 그런 마음인지 몰랐어 알았더라면 내가 그렇게 널 그리워하며

숨어서 지켜보지는 않았을 거야"

우진은 은수의 말에 울먹이며 대답합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선배를 봤는데 저를 못알아 보는 것 같았어요 

1년 동안 일부러 선배눈에 띄려고 선배 주위를 맴돌았는데... 그때마다 저를 피하는 것 같아서

저도 이제는 포기해야 하나보다 하고 마음을 접었어요

좀 전에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예전에도 우산 씌워줬다는 말에 너무 화가 났었어요

저를 기억하면서 모른 체 한 것 같아서..."

우진이 은수를 기억했으면서도 대학에 들어온 은수를 모른 체 했던 것에 대한 서운했던 마음을 말합니다

"은수야 바보 같은 나를 이제라도 받아주겠니..."

우진은 은수의 손을 잡으며 말합니다

은수는 대답 대신 우진의 품에 살며시 안기며 마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그날 그들을 기다리는 동창들에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서로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른 체 다른 길을 걷고 있었던

그 시간만큼이나 긴 시간을 못다 한 이야기로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비가 내리는 날 약혼하고 100번째 비가 내리는 날 결혼을 하자는 약속을 합니다

그들은 매일매일 비가 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의 기도를 들은 것일까요... 그들이 사랑을 시작한 그 해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100번째 비 오는 날 약속했던 대로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동창들은 비 오는 날 이게 뭐냐며 투덜거리면서도 내리는 비가 그날만큼은 너무 예쁘다고 말합니다

마른 땅을 촉촉이 적셔주며 새 생명에 단비를 주는 빗물처럼 그들의 사랑은

지켜보는 이들의 온 마음을 따뜻하게 적시며 아름답게 내립니다.

날아요 미순이 아줌마

이지윤(여, 지체)

“싫어!”

“엄마! 싫어.”

“난 그 아줌마 싫단 말이야!”

“나 그냥 간식 안 먹어도 된 다니깐!”

“알았어.”

“알았다니깐. 미순이 아줌마한테 갈게.”

은찬이는 툴툴대며 전화기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불룩해진 주머니가 걸을 때 마다 바람 넣은 볼처럼 퉁퉁거렸습니다.

은찬이가 아줌마를 처음 만난 건 이틀 전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래층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처음 보는 아줌마는 엄마와 이야기 중이었습니다. 한쪽 다리가 걸을 때 마다 땅에서 떨어지지 않고, 바닥에 질질 끌렸습니다. 마치 검은 망토를 걸친 유령이 지나다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은찬아, 인사드려.”

“아. 안녕, 하세요?”

마지못해 쭈뼛거리며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엄마 뒤로 숨어서 얼굴 반쪽만 슬며시 내밀어 쳐다보았습니다.

“미순씨, 우리 애가 부끄럼이 많아서 낯선 사람을 보면 종종 이래요. 이해하실 수 있죠?”

“그럼요. 1학년이라고 하셨죠? 씩씩해 보여요. 학교에서도 인기가 많겠어.”

“그렇게 봐 줘서 고마워요. 은찬이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편의점 안에 간식을 좀 챙겨줘요. 김밥이나 햄버거, 과일도 좋고요. 애들 할머니만 건강하셨어도 내가 미순씨 에게 편의점 일만 부탁하면 되는데, 미안해요.”

“네, 걱정 마세요. 그 정도야 해드릴 수 있어요.”

아줌마는 살갑게 은찬이를 바라봤습니다.

은찬이는 자꾸만 엄마 손을 뒤로 이끄느라 바빴습니다.

“왜 그래? 엄마가 어제 말했잖아. 이제부터 간식을 아줌마가 챙겨 줄 거야. 그거 먹고 학원 갔다 오면 엄마도 집에 와 있을 거야.”

“저런 아줌마라고 말 안했잖아!”

“저런 아줌마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무섭단 말이야.”

“무섭다니. 몸이 좀 불편해서 다르게 보일 뿐이야.”

“엄마! 저 아줌마 혹시 나쁜 짓해서 벌 받은 거 아니야? 그래서 저렇게 걷는 거 아니야? 그럼, 나쁜 사람 인거잖아”

“무슨 말이야? 나쁜 짓해서 그런 거 아니야!”

엄마는 평소답지 않게 강하게 말했습니다. 은찬이는 뽀로통한 입술을 내밀며 2층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딸랑∼딸랑∼”

은찬이는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편의점 진열대의 물건이 이전과 달라 보였습니다. 상품들이 하나같이 줄이 잘 맞춰져 있었습니다. 단 하나의 물건도 따로 떨어져 나와 있거나 다른 상품과 섞여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냉장고의 음료도 아이스크림도 줄이 잘 맞춰져 있었습니다.

은찬이는 진열대를 애써 못 본 척 하며, 창밖에 보이는 쪽 탁자에 가서 의자를 꺼내 앉았습니다. 양손을 턱에 괸 채 창밖만 바라보았습니다. 아줌마의 소리가 창고쪽에서 났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어! 은찬이 왔어? 아줌마가 창고 물품 정리하느라 종소리를 못 들었네? 간식 뭐 챙겨줄까?”

“아무 거나요.”

“오늘 안 좋은 일 있었어? 친구랑 싸웠어? 왜 이렇게 뾰로통한 거야?”

“ 아무 일 없어요.”

“그래? 표정이 좀 그래서. 미안. 아줌마가 괜한 참견했나보다.”

아줌마는 샌드위치와 우유를 내밀었습니다.

“이 샌드위치는 인기가 좋아서 아침에 다 팔렸어. 그런데 은찬이 주려고 아줌마가 미리 한 개 챙겨놨어.”

은찬이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샌드위치의 포장을 뜯도, 한 입 덥석 베어 먹었습니다.

“어때? 맛있어?”

“아니요.”

“그래? 그럼 다음에는 다른 걸로 챙겨놔야겠네.”

“아참! 숙제 없어? 아줌마가 도와줄게.”

“없어요.”

아줌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똑 잘라 말했습니다. 간식만 먹고, 휴대폰을 꺼내어 게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줌마는 계산대에서 손님 물건을 계산해 주고, 진열대의 물건들을 정리하느라 바빴습니다. 은찬이는 학원에 갈 시간까지 단 한 번도 아줌마에게 눈길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다음날에도 은찬이는 학교를 마치고 편의점으로 향했습니다. 오늘도 아줌마를 보려고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한참 공사 중인 인도 위에 튀어나온 블록을 보지 못하고 걷다가 그만 넘어졌습니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오른족 무릎에서 피부가 벗겨져서 피가 조금씩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에잇! 이 블록은 왜 튀어나와 있어!”

“아……. 따가워. 에잇.”

다친 상처 때문에 평소처럼 걷기가 힘들었습니다. 오른쪽 무릎을 굽힐 수가 없어서 뻣뻣하게 편 채 걸어가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걸어 들어오는 은찬이를 보자 아줌마는 깜짝 놀라 달려왔습니다.

“어머! 이걸 어째? 넘어졌어? 많이 아프겠다. 아줌마가 소독해 줄게.”

아줌마는 편의점 구석구석을 뒤져 구급약상자를 찾아왔습니다. 은찬이를 의자에 앉히고 다친 무릎을 자세하게 살폈습니다. 소독약을 열어 무릎에 발라주었습니다. 은찬이는 다칠 때 보다 더 따갑고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습니다.

“아……. 앗! 따가워!”

“조금만 참아. 이거 소독하지 않으면 세균이 더 아프게 할지도 몰라. 조금만 참자.”

아줌마는 하얀 거즈를 작게 잘라서 반창고로 붙여 주었습니다. 은찬이는 처음으로 아줌마의 얼굴을 가까이서 자세하게 보았습니다. 하얗고 동그란 얼굴에 주근깨가 깨처럼 흩어져있고, 작은 눈 끝이 아래로 쳐져 가만있어도 웃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동안 쩔뚝거리며 걷는 걸음만 보았던 은찬이는 괜히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그때, 용기를 내어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었습니다.

“아줌마는 어떻게 하다가 다리를 다쳤어요?”

“나? 글쎄.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하나? 나는 다치기 전까지 경찰 일을 했어.”

“어! 저도 장래희망이 경찰관인데.”

“그랬구나. 아줌마는 경찰 일을 하던 중에 소매치기를 잡으러 뛰어가다가 은찬이처럼 넘어졌어. 그때 옆에 쌓여있던 공사장 물건들이 함께 넘어지면서 아줌마 다리로 떨어진 거야. 그래서 이렇게 걸어. 아줌마가 이렇게 걸으니까 좀 이상했지?”

“처음에는. 조금 그랬는데요. 그러면, 아줌마는 소매치기 잡으려다 다친 거네요?”

“그렇지. 아줌마도 한 때는 은찬이처럼 씩씩하게 잘 걷고 뛰고 그랬는데.”

“음…….”

“왜? 음……. 이야?”

“저기……. 저는 아줌마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벌 받은 건줄 알았어여. 그래서 그렇게 걷는 줄 알았거든요.”

“뭐야? 그럼 여태 나를 나쁜 아줌마로 생각했던 거야?”

“네…….”

은찬이는 자신의 대답에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아줌마는 그런 은찬이의 두 눈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습니다.

“은찬이는 왜 넘어졌어?”

“길 가다가 튀어나와 있는 블록을 못 봐서요.”

“아줌마도 옆에 있던 공사장 물건들이 넘어질 줄 몰랐었거든. 사람이 다치는 건 크게 죄를 짓거나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야. 은찬이나 아줌마처럼 그냥 우연하게 다치거나 아플 수 있는 거야.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란다.”

“네.”

날씨가 무척 더운 8월의 어느 늦은 밤이었습니다. 엄마는 할머니가 계신 병원에서 급한 전화를 받고 나가셨습니다. 은찬이는 방학이라 늦게까지 방에서 놀다가 배가 고파서 1층의 편의점으로 내려왔습니다. 아줌마가 보이지 않자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줌마! 저 김밥 한 줄 먹어도 돼요?”

“잠깐만. 아줌마가 창고 정리 금방하고 챙겨줄게. 조금만 기다려.”

“네. 천천히 하세요.”

“미안한데, 계산대 밑에 검은색 노트 좀 꺼내 놔 줄래? 아줌마가 물품 개수를 적어야 해서. 부탁해.”

“네.”

은찬이는 계산대 근처로 갔습니다. 계산대 밑 검은 노트를 챙기려고 허리를 굽히는 순간이었습니다.

“딸랑~딸랑~”

소리가 났습니다. 손님인 줄 알고 굽히던 허리를 세우고 계산대에서 일어났습니다. 검은색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들어왔습니다. 진열대의 물건들을 고르듯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창고에 있던 아줌마가 계산대로와 서자 어느새 남자가 다급히 다가와 가방을 내밀었습니다. 은찬이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그때, 아줌마가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누, 누구세요?”

“여기다가 돈 넣어! 어서! 빨리!”

아줌마는 계산대에 돈을 꺼내는 척 하며 얼음이 된 은찬이 쪽으로 넘어졌습니다. 그 순간, 계산대 위 전화기가 옆으로 밀려나면서 계산대 아래로 수화기가 떨어졌습니다. 수화기 줄이 축 늘어져 버렸습니다. 당황한 도둑이 소리쳤습니다.

“뭐하는 거야! 신고할 생각 꿈에도 하지 마! 돈만 넣으라고!”

“네. 아이만은 건드리지 마세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

아줌마가 계산대에서 돈을 꺼내 도둑이 던져 준 가방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도둑이 은찬이를 더 놀라게 할까봐 아줌마는 은찬이의 어깨를 꼭 감싸 안았습니다.

“신고하면 가만 안 둬!”

도둑은 돈 가방을 챙겨 재빠르게 도망쳤습니다.

“괜찮아? 많이 무서웠지?”

은찬이는 너무 무서워서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아줌마! 흑. 흑.”

“걱정 마. 아줌마가 경찰 불렀어. 조금 있으면 경찰아저씨들이 도둑을 잡아 올거야.”

“아줌마 112에 신고한 적 없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경찰이 와요?”

“전화 수화기를 떨어뜨려 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정말이에요?”

“그럼, 아줌마 옛날에 경찰이었잖아.”

잠시 후, 편의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딸랑~딸랑~.”

“여기서 신고하셨죠? 이 사람이 여기서 돈을 춤쳐갔죠?”

경찰 아저씨 옆에는 수갑을 찬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도둑이 있었습니다.

“네, 빠르게 출동하셨네요. 서둘러 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저희가 할 일이죠. 파출소에서 신고 받고 가는 길이었는데, 다가가자 갑자기 도망가려 해 붙잡았습니다. 다친 곳은 없죠?”

“그럼요. 아이가 조금 놀았을 뿐입니다.”

은찬이는 아줌마를 보며 엄지를 ‘척’하며 올려 주었습니다. 아줌마도 은찬이를 보며 엄지를 ‘척’하고 올려주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은찬이는 그 날 아줌마의 눈 속에서 날아 차기를 하며 도둑을 잡던 미순이 아줌마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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