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이 시는 조지훈 시인의 ‘승무’이다.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 밤에,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을 쓰고 긴 장삼자락을 펄럭이며 홀로 승무를 추는 사람은 속세의 번민으로부터 해탈을 염원하는 참회의 눈물이려나.

'승무'는 단순한 무용의 의미보다는 세속의 번뇌를 극복하려는 종교적 의미인 것 같다. 그래서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라는 구절은 지상적 번뇌를 벗어나서 천상적 해탈에 이르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장세붕 씨. ⓒ이복남

장세붕 씨를 인터뷰 하고 그의 삶에 대한 글을 쓰면서 ‘승무’를 골랐다. 장세붕 씨가 어느 날 부터인가 귀가 안 들리면서 타인과의 대화에서 점점 멀어지고 안으로 침잠하면서 사진 찍기에만 골몰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장세붕(1957년생) 씨는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 의성은 마늘고장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의성이 마늘 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2018년 2월 ‘영미영미’로 전 국민을 웃고 울게 만들었던 여자컬링이었다. 그런데 그 보다 먼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의성에 있는 금성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화산이라고 한다.

금성산은 의성의 명산으로 숱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해발 531m의 국내 최초의 사화산으로 태백산맥의 남쪽 일부이다. 약 2000여 년 전 금성면 대리리, 학미리, 탑리리 일대에 존재 했던 고대국가 조문국의 도읍지로 이곳은 신라 벌휴왕(伐休王) 2년(서기 185년)에 신라의 영향권으로 편입 되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볼 수 있다.

금성산은 영산으로서 신라시대 의상이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 수정사와 산운 대감마을을 함께 둘러보며 등산하기에 좋은 곳이다. 금성산 정상에 무덤을 쓰면 석 달 동안 이 지역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이 들고, 묘를 쓴 사람은 운수 대통하여 큰 부자가 된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곳에 묘를 쓰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으며, 날이 가물게 되면 주변 지역의 주민들이 모여 묘를 파내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 ⓒ이복남

그리고 또 하나 수정리에는 울창한 송림 사이에서 수정(水淨) 같은 맑은 물이 흘러내리므로, 신라 신문왕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비봉산 계곡에 절을 짓고 이름을 수정사(水淨寺)라고 했다는데 수정사 주변의 자연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단다.

그래서 장세붕 씨는 성인이 된 후 부산 살 때 가끔 산악회 회원들과 금성산 등반을 하곤 했단다.

장세붕 씨는 그런 고향마을 수정리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는데, 제일 큰 형은 그 보다 24살이 많았고 큰 조카도 그 보다 두 살이나 많다고 했다.

“집은 제법 잘 살았던 것 같습니다. 논도 많았고 밭도 많아서 집에 일꾼이 두 명이나 있었습니다.”

집에는 식구들이 열 명이 넘었기에 항상 사람들이 와글와글했다.

그 많은 식구들의 밥은 누가 다 했을까.

“예전에는 엄마도 있고 형수도 있고 그리고 누나들도 거들었습니다.”

어머니와 돌사진. ⓒ이복남

그는 산운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산운국민학교는 지금은 폐교가 되고 없다.

“국민학교 다닐 때는 공부를 잘 했고 특히 산수를 잘 했습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소를 끌고 풀을 먹이러 다녔는데, 그 때 친구들 하고 산에서 노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철모르는 어린 시절에는 마냥 즐겁고 행복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는 더 이상 행복하지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생각한 장래 희망은 사업가였다. 왜 사업가가 되려고 했을까.

“어렸을 때는 우리 집이 제법 잘 살았다고 알고 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고 집안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이 어려워진 것하고 사업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우리 집은 어려워졌는데, 앞집에 사는 친구 집은 부자라서 모사 때도 음식을 잔뜩 해오고 돈도 펑펑 쓰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커서 돈을 많이 버는 사업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잘 살았다면서 왜 가난하게 되었을까.

“큰형이 노름을 했습니다.”

엄마와 누나. ⓒ이복남

도박이란 불확실한 결과에 대해 돈을 걸고 경쟁을 포함하는 놀이이자 금전을 추구하는 행위로, 그 결과가 언제나 불확실하다. 도박중독에 빠진 사람은 알코올중독이나 마약중독처럼 물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물질중독과 유사한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행위중독이라 한다. 따라서 도박중독도 내성이 생기고 도박을 못하게 하면 금단증상이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도박을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이 쉽지는 않겠지만, 처음부터 돈을 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심심풀이로 또는 재미와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가, 도박 자체가 주는 재미와 승부에서 이길 경우 발생하는 쾌감이 중요한 요인이라고 한다. 지금도 정선카지노 등에서는 도박중독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한 번 노름에 빠진 사람은 누구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름꾼들은 돈 많은 큰형이 있어야 판돈이 되니까 자꾸 큰형을 불러냈습니다.”

그때 여러 사람들이 큰형을 노름판에 끌어들였는데, 그 중에는 함께 노름에 빠진 친인척도 있어서 그 사람들이 정말 미웠다고 했다.

초등학교 친구들. ⓒ이복남

어머니는 큰형을 노름에서 빼내려고 울며불며 애원을 했다. 큰형의 아들 즉 큰 조카도 자기 아버지에게 제발 돌아오라고 사정을 했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부모님은 큰형의 노름빚을 갚느라고 논팔고 밭팔고 집안은 점점 쪼들리기 시작했고, 큰형의 노름 때문에 지친 어머니께서는 신장염으로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나중에는 중풍이 와서 돌아가셨다.

큰형은 노름을 어떻게 끊게 되었을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제 노름할 돈이 없으니까 자연히 큰형도 노름에서 손을 떼게 되더라고요.”

집안이 가난 했다면서 그 많은 식구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누나들은 중학교만 졸업하고 공장 등에 돈 벌러 갔고, 큰조카도 제대로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가 그나마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초등학교 육학년 때 담임선생이 큰형의 친구인데 선생도 큰형 걱정을 하면서 그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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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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