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가 자를 넣은 커다란 디자인 가방을 메고 다니는 것을 눈여겨 본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제가 자를 가지고 다니는 것을 유심히 보았던 모양입니다.”

양장점을 운영하는 아줌마인데 그를 부르더니 양장점을 같이 해 보자고 했다.

“아줌마는 서울에서 양장점을 해 보고 싶은데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서울 양장점에서. ⓒ이복남

아줌마와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도 심사숙고 했다. 그도 집 그리고 가족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아줌마를 따라 나섰다.

“사장님이 아니라 아줌마라고 불렀는데 서울 천호동에 양장점을 차렸습니다.”

그는 초년생으로 시다에 불과 했지만, 패턴을 뜨고 마름질을 하고 치마나 바지의 밑단을 뜨고 주머니와 단추를 달고 그리고 다림질을 했다.

집을 떠나서 객지에서 생활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을까.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집에서는 매일 생선반찬으로 잘 먹었는데 반찬이 김치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1980년대 산업화의 열풍으로 여러 가지 공장이 잘 돌아갔다. 잘 돌아가는 공장에서 일하는 아가씨들도 돈을 잘 벌었기에 옷을 잘 맞추었다.

“당시만 해도 맞춤옷시대라 장사는 엄청 잘되었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장사가 잘되었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아줌마가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았습니다.”

쉬는 날도 없이 거의 매일 야근을 하다시피 일이 많았음에도 아줌마가 직원들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아줌마가 여기저기 돈 나가는 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직원들 월급이 몇 달씩 밀려서 나중에는 다 떠났습니다.”

재단사와 미싱사는 월급을 안 주자 아줌마에게 툴툴대다가 양장점을 떠났다.

“저는 월급 한 푼 못 받고 4년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인데 그때는 약간의 용돈을 주면서 나중에 돈 벌면 월급은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월급은 받았을까.

“4년을 버티다가 저도 떠났는데, 30년 후에 우연히 연락이 닿아서 월급을 줄 테니 서울로 올라오라고 해서 갔더니 백만 원을 줍디다.”

엄마와 올케와 설악산 여행. ⓒ이복남

그렇게 세 번 즉 3백만 원을 받았는데, 그 후에 한 번은 전화를 빨리 안 받았다고 화를 내더니 그게 끝이었다.

그는 서울 양장점을 그만두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 왔다.

“큰오빠가 국제시장에서 실비집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카운터를 봤습니다.”

실비집을 하다 보니 여러 군데 외상이 많았다.

“하루는 외상값을 받으러 가보니 의상실이었습니다.”

의상실 재단사 P 씨는 그 후에도 실비집에 자주 왔고, 그러다보니 이러저런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의상실 재단사 P 씨는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P 씨와 같은 의상실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남자가 있었다.

“공무원이었는데 만나다보니 정이 들었습니다.”

그 남자도 김태순 씨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다.

“집에다 남자 이야기를 했더니 성한 사람은 안 된다고 엄마가 펄쩍 뛰었습니다.”

그가 장애인인데 남자가 비장애인이면 그를 구박할 것이므로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헤어진 이별은 참으로 가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랑은 가고 아픔만 남았지만, 그는 의상실 일에 매달렸다.

“P 씨가 알고 보니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아내가 없었습니다.”

아들은 10살인데, P사장은 그 보다 9살이 많은 남자였다.

“하루는 P 씨가 자기 아들을 좀 키워주면 안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비장애인 공무원은 결사반대를 했는데, 아들이 있는 P 씨는 별로 반대를 하지 않았다.

“엄마가 대청동 집 근처에 의상실을 차려 주었습니다.”

그는 손님을 받고 P 씨는 재단을 하고 옷을 만들었다.

“P 씨 집에 들어가서 아들을 키웠는데, 알고 보니 사장이 술주정꾼에다 폭력적이었습니다.”

전처도 P 씨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이혼도 하지 않고 집을 나간 상태였다.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P 씨는 술만 마시면 온갖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세간을 부수고 저를 때렸습니다.”

장애인단체에서 금강산 여행. ⓒ이복남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었다. 의상실을 운영해야 했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티를 낼 수도 없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있겠는가만은 P 씨의 불만 이유는 무엇일까.

“엄마가 공부를 안 시켜 줬다는 이유였는데, 뭘 비는 지 잘 모르겠지만 틈만 나면 산기도를 다녔습니다.”

그는 P 씨와 안 살고 싶었지만, 아들 때문에 어찌할 수도 없었다.

“참 이상한 우연도 있습니다. 이상한 데서 우리 큰 아들(전처 아들)하고 닮은 여자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P 씨의 전처였습니다.”

P 씨의 전처는 남편의 폭력에 못 견뎌서 몰래 도망친 것이었음에도 이미 다른 지방에서 재혼해서 숨어 살고 있었다.

“더 이상 숨어살지 말라고 전처를 설득하여 이혼을 하게 했습니다.”

남편은 전처가 그렇게 달아났음에도 술만 마시면 술주정을 했고, 집에 오면 그를 때렸다. 그래서 날마다 헤어질 궁리를 했으나 아들 때문에 차마 헤어지지 못하고 차일피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한테 맞고 사는 것 보다 더 큰일이 생겼습니다.”

아들 둘은 점점 커 가고 돈 들어갈 일은 많은데 의상실에는 손님이 없었다.

“패션가에도 기성복 바람이 불어서 의상실이나 양장점이 하나 둘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손님이 없어서 결국에는 의상실 문을 닫았다.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오고 싶었지만 애들 때문에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런데 애들을 맡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고모(남편의 누나)가 애들을 데려가서, 저는 서면에 있는 남의 집 의상실에서 일을 했습니다.”

혼자 살다보니 조금씩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가끔씩 전화가 오면 가슴이 철렁했는데, 남편이 아니라 지인들이었습니다.”

여수애양병원에서 깁스 풀던 날. ⓒS 씨 제공

지인들이 어떻게 돈 냄새를 맡았는지 그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거절을 하다가도 세 번 이상 졸라대면 거절을 못했습니다.”

그도 정말 돈거래는 안하고 싶었지만 계속 부탁하면 거절을 못했고, 큰돈은 없지만 그때 몇 백씩 빌려간 사람들은 그 후로 깜깜 무소식이었다.

혼자 나와서 전셋집을 떠돌다가 지인의 소개로 영도에 임대아파트를 신청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장애인이고, 장애인이면 나라에서 여러 가지 혜택이 있다는 것도 까맣게 몰랐습니다.”

영도 임대아파트에 들어가면서 다니던 의상실도 그만두고, 장애인복지관에 나가기 시작했다.

“복지관에서 다른 장애인들을 만나면서 참 아름다워라를 알게 되었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일터’는 장애인복지공동체로 재가 중증(지적)장애인들이 자활자립을 하는 곳인데 주로 봉제 등을 하고 있었다.

“제가 의상실을 했던 경험이 있던지라, 참 아름다워라 일터에서 봉재 일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다른 장애인들에게 여수애양병원 이야기를 들었다. 여수애양병원에 가면 자신 같은 장애인도 나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도 왼발이 자꾸만 앞으로 접질러져서 가까운 병원에서 수술을 한 번 한 상태였지만, 좋아지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에나, 나이 사십이 넘어서 그 이야기를 처음 듣다니, 기가 막혔지만 귀가 솔깃했다.

“주위에서 지금이라도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수까지 어떻게 가겠습니까?”

여수애양병원에서. ⓒS 씨 제공

‘참 아름다워라 일터’를 맡고 있는 S 씨가 기꺼이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S 씨는 자신도 장애인임에도 그 전에도 여러 사람을 여수애양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는 것이다.

“정말 가슴이 설렜습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왜 여수애양병원을 몰랐을까.”

그는 허리 아래는 거의 사용할 수가 없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특히 왼쪽발이 자꾸만 안으로 접혀서 걸음걷기가 힘들었고 수술도 해 봤지만 마찬가지 상태였다.

“양쪽 다리를 한꺼번에 수술을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두 시간마다 진통제를 주사했는데 시계만 쳐다보면서 밤을 꼬박 새었습니다.“

깁스를 한 채 일주일 만에 퇴원했다. 병원에서는 한 달 뒤에 오라고 했다. 물론 S 씨가 데리러 와 주었다.

“깁스를 하고 다림질을 하면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깁스 아래 쇠가 박혀 있습니다.”

수술을 하기 전에도 보조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보조기가 부딪혀서 삐걱거렸지만, 수술 후에는 그런 것도 없어지고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동안 S 선생은 저를 위해서 한 열 번쯤은 여수애양병원을 오갔을 겁니다. 처음에 진단 받으러가고, 수술하러가고, 깁스 풀러가고 나중에 보조기도 맞추러 갔는데, 은혜만 입고 아직 갚지를 못했습니다.”

김태순 씨가 잘 살아 주면 그게 S 씨에게 은혜를 갚는 겁니다.

S 씨는 필자도 아는 사람이므로 S 씨에게 전화를 해서 김태순 씨 관련해서 몇 가지 문의를 했더니, S 씨가 당시에 찍은 사진 두 장을 보내왔다.

“왜 우리 엄마는 여수애양병원을 몰랐을까요. 처음에는 원망도 들었지만 그게 어찌 엄마 탓이겠습니까?”

어머니도 나이가 들어서 이제 수산센터에서 일도 못하게 되자 그의 집에 와 있었다.

“남편이 술만 마시면 자꾸 찾아 와서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때마다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가족일이라고 제대로 안 받아 주었다.

장애인복지관 나들이. ⓒ이복남

“한번은 남편이 칼을 들고 설치는 바람에 엄마 귀가 찢어지기도 했는데, 경찰에서는 하루 만에 남편을 돌려보냅디다.”

지금은 어머니도 그런 남편도 다 세상을 떠났단다.

“요즘은 복지관에서 탁구도 하고 파크골프도 치고 비누도 만들고 여러 가지를 하면서 재미있게 삽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면 옛날 친구들이 그립습니다.”

옛날의 친구들과 어떻게 해서 헤어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도 지란지교를 꿈꾼다고 했다.

“나를 제일 힘들게 한 사람이 남편인데 남편은 폐암으로 죽었습니다. 그렇게 애 먹이던 남편인데 죽고 나니까, 지금도 길 건너 아파트 숲에서 조잘조잘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면 정겹고 화목한 가족 같아서 부럽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화목한 가정을 가져보지 못했다. 예전의 친정도 그랬고 결혼해서 남편과의 사이도 불화의 연속이었다. 돌아보면 그가 살아온 세월은 눈물뿐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나는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살아오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은혜를 입으며 살았는데 죽기 전에 기회가 된다면 그들에게 은혜를 갚고 싶단다.

그리고 예전하고는 시대가 많이 달라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부디 자신처럼 참고 살지 말란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자유롭게 살라고 당부하고 싶단다. <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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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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