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공안이 밀어닥쳐 잡혀갔습니다.”

이유도 없었고 원인도 없었다. 이유라고는 ‘왜 이렇게 사람을 많이 모았느냐’였다.

“외국기업이고 죄목이 없어서 풀려나기는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법륜공으로 오해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강신주·손필자 부부. ⓒ이복남

화타가 살아 왔다고 소문이 나면서 D의료기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그는 본사 소속이 되어 중국 전역에 강의를 하러 다녔다.

사진을 보니까 중국 뿐 아니라 동남아도 다니신 것 같은데 어떤 말로 강의를 했을까.

“중국 뿐 아니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강의도 많이 했는데, 그럴 때는 통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어는 좀 할 줄 알아서 외부 강의는 통역이 있었지만 우리 체험실에서는 혼자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의료기가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한국에서 서너 개의 의료기가 더 들어 왔다. 그야말로 한국 의료기의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십여 년이 흐르면서 중국 전역에 3만개 정도의 체험실이 생겼습니다.”

너무 유명해진 것이 사단이었다. 매스컴에서 보도를 하고 광고가 나오자 여기저기서 짝퉁이 나왔을 뿐 아니라 의료기 관련자들에게서 반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한국 뉴스에까지 보도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앞만 보고 달려 온 저의 불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중국에서 D의료기 사업이 한창 잘 나갈 때 중국에서 골프 붐이 일었다. 그도 D의료기 회사에서 일을 하려면 여러 사람을 만나야 되므로 골프를 배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골프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점점 많은 사람들이 골프 대열에 합류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장애인이라고 본인이 말하기 전에는 그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골프를 치고 나서 회식을 하곤 했다. 그도 오기가 생겨 골프를 배워서 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지기 싫어서 골프를 시작했지만, 첫째는 일반인들을 따라 걷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골프 연습에 매달렸다.

“나중에는 85타 정도는 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의료기 사업에 회의를 느끼며, 당장이라도 중국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복귀하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당장 그만 둘 수 없음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애들이 북경한국국제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외국에서 고등학교를 2학년까지는 다녀야 한국 대학에 특례입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골프장에서. ⓒ이복남

“제가 한국으로 돌아와 버리면 애들이 한국에 와서 대학입시 공부를 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골프에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고 85타 쯤 치게 되면서 D의료기를 그만 두었다.

“북경에서 골프 연습장을 차렸습니다.”

처음에는 외부에서 코치를 초빙했고, 나중에는 그가 직접 중국골프협회에서 피팅자격증과 지도자자격증을 취득했다.

“의료기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도 어려웠는데, 골프연습장도 처음 시작하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작은애가 고2때까지는 참고 견뎌야 했다.

“아들이나 딸이나 둘 다 마도로스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아들이 먼저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대학에 입학했고 나중에는 딸도 해사대학에 입학해서 둘 다 국비장학생이 되었다.

“둘째 딸이 해사대학에 입학하자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렸을 때는 운동하기를 참 좋아 했었다. 그러나 다치면서 더 이상 격렬한 운동을 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등산은 즐겨 했다.

“하루는 통영 사량도 지리산에 올랐는데, 일행보다 제일 먼저 정상에 올랐습니다.”

정상에 올라 의족을 벗고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때까지 등산 일행들도 제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든 겁니다. 사실 그 산이 일반인들도 쉽지 않은 코스거든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제가 특이하게 보였나 봐요.”

등산객들은 그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통영 사량도(蛇梁島)는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약 1.5㎞의 거리를 두고 윗섬과 아랫섬으로 되어 있다. 섬모양이나 해협이 뱀처럼 생겨서 사량도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실제로 사량도에는 뱀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윗섬에 있는 산에서 맑은 날에는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 해서 지리망산(智異望山 397.8m)이라고 부르다가 지리산이 되었다고 한다. -필자 주.

“사실 제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 처음 생각했던 것은 장애인 골프 지도였습니다.”

썬바이오 체험실에서. ⓒ이복남

그가 한국에 와서 처음 생각했던 것은 골프라고 했는데 그때가 2016년 2월이라고 했다. 그는 부산에 자리를 잡았는데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보니 골프를 치려면 삼락공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삼락 공원에서 골프를 치는 장애인을 만나기는 했는데, 만나보니 골프가 아니라 파크골프였습니다.”

중국에는 파크골프가 없었기에 파크골프라는 용어도 처음 접했고, 예전에 병원에서 말고는 그렇게 많은 장애인도 처음 만났다. 필자가 강신주 씨를 처음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한국에서 장애인을 상대로 골프연습장을 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골프를 치던 사람이라 파크골프를 치는 데는 대부분이 비슷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시 연습이 필요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유통회사에 투자를 했는데, 어이없게도 사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는 언제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기 마련인 모양이다. 사기를 당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E의료기 회사에게 그에 대한 소문을 어떻게 들었는지 콜이 왔다. 혼자 중국 청도로 갔다.

“그동안 중국에서 의료기 사업을 했던 경력이 있었던 터라 사업은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처음 중국에 갔을 때는 아내와 아이들이 같이 갔었지만 이번에는 혼자 갔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립고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가슴이 아렸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9년 여름이었고 중국에 온지 2년 쯤 되었을 때다.

“요즘 코로나가 한창인 우한에 출장 중이었는데,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받았습니다.”

어머니 연세가 팔십 중반을 넘었고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아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강신주 씨는 어머니 이야기에 목이 메었고, 눈시울을 붉혔다.

파크골프를 지도하는 강신주 씨. ⓒ이복남

“어머니는 이상하게 어렸을 때부터 저를 이뻐하셨지만 제가 다친 이후에는 특히 더 저는 어머니의 시린 손가락이었습니다.”

6개월이나 행방불명되었을 때, 그리고 그가 다쳐서 장애인이 되었을 때,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아파 하셨던 어머니셨다.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어쨌든 빨리 가서 어머니 가시는 길을 같이 하고 싶었지만 우한에서 서울로 가는 직항로는 없었습니다.”

우한에서 청도로, 청도에서 서울 김포로, 다시 고속버스터미널로 가서 합천행 고속버스를 타고 합천에 도착하니 아침 7시였다. 어머니께서 임종하신지 만 하루 만에 도착한 것이다.

“연결시간이 촉박하여 승무원의 도움도 받고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뛰어 다녔던 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는 울었다. 어머니의 임종도 못 지킨 불효자식이 되어 통곡했다.

어머니께서 임종하시기 전 약 2주간 가족들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위중하셨는데 그의 생일을 기억하고 가족들에게 둘째가 생일인데 미역국이나 먹었는지 확인해보라고 하더란다.

“눈감고 계셔도 날짜 계산도 하시고 자식 생일까지도 기억을 하시다니 참으로 어머니의 사랑과 관심은 놀라울 뿐입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를 홀로 남겨둔 채, 그는 다시 중국 청도로 돌아가야 했다. 아버지가 연세도 높으셨지만, 아직은 정정하셨고 집에 요양보호사가 와서 돌봐 주고 있었다. 그가 청도로 떠나기 전 아버지가 그를 불러 앉혔다.

“내가 죽어도 니 엄마 때처럼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의 그 말은 당신의 임종만큼은 네가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소원이었다.

“아버지의 그 말을 듣고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목이 메어서 대답을 못했습니다.”

돈을 얼마나 벌겠다고 먼 이국땅에서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다니, 아버지는 그에게 자신의 임종을 지켜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번에 가서 사업을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그는 청도에서의 사업을 정리하고 돌아 왔다.

“그렇다고 놀 수는 없고 뭔가를 해야겠는데, 가장 자신 있는 것이 의료기 사업인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별의별 의료기가 많아서 사회적으로 다소 부정적인 견해도 있는 것 같지만 저는 이 사업이 천직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썬바이오에 전무로 스카우트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손필자 씨는 밀양에서부터 같이 일을 해왔기에 썬바이오 체험실 사직지점을 개설했다.

“요즘은 사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실정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이복남

필자도 강신주 씨와 인터뷰 약속을 했다가 두 번이나 미루어야 했고, 그러다가 2월 어느 날 사직지점을 찾아가서 그의 강의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얼마 후 동래 **교회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면서 ‘사회적 거리두기’의 동참으로 체험실은 문을 닫았다고 했다.

당시 사직지점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썬바이오 의료기를 체험하면서 그의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고객들을 가족처럼 대하며 한 분 한 분에게 맞춤형 건강지도를 하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는 사업이 좀 더 번창하게 되면 장애인장학재단을 만들고 싶단다.

“장애인 중에서 골프나 파크골프를 하는 선수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실력향상을 위해서 지도를 하고 싶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20여 년 전에 의사도 포기한 시한부 판정을 받았는데 아직도 정정하신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아버지께서 저를 믿는다는 긍정의 힘이고, 둘째는 온열요법의 효능이고, 셋째는 온열요법으로 낫는다는 플라시보 효과일 겁니다.”

누가 뭐라 해도 건강의 일 순위는 자신을 사랑하는 긍정의 힘이라고 했다.

“내가 긍정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항상 몸을 따뜻하게 하고, 의료기의 힘을 빌리는 것은 그 다음이라고 했다.

그가 살아오면서 느끼는 것은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지만, 무엇보다도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란다. 그의 오늘은 아내 덕분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아내와 가족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더 젊어지고 건강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특히 자신의 엄마처럼 등이 시리고 굽은 어머니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아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싶다는 그 소원도 꼭 이루시기를. <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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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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