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성마비란 뇌에 이상이 있다는 것으로 지능에 장애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운동성장애 내지 경직성장애로 나타난다. 부모님은 원인도 잘 모르는 ‘마비’에 겁내면서 여기저기 병원을 다녀 보았으나 별다른 차도도 없이, 자세와 운동의 장애가 생긴 채로 나이만 들어갔다.

“그래도 엄마는 심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이뻐했습니다.”

필자가 보기에 그는 뇌성마비였지만 그의 장애는 지체장애라고 되어 있다. 처음 장애인등록(1988년)을 할 때는 지체장애와 뇌병변장애가 분리되지 않았었고 2000년에 분리가 되었는데 서은숙 씨는 그 때 재등록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은숙 씨. ⓒ이복남

“나는 모르지요. 처음 진단 받으러 갔는 대 의사가 오른팔 올려 보세요. 왼 팔 올려 보세요. 하던데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서은숙 씨는 처음 진단 받을 때처럼 오른팔과 왼팔을 올려 보였는데 팔은 똑바로 올려지지 않았다.

“양사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엄마가 느리다고 9살에 입학시켰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 하고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집에서도 막내이자 모든 것이 느려서 가족들은 어버리라고 불렀다.

“엄마나 아버지가 아무것도 못하게 해서 지금도 좀 버릇이 없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설거지 한번 안 해 보았다. 바로 위가 여섯째 언니인데 가끔 언니가 그를 뭐라고 했는데 그러면 아버지는 언니를 혼냈다. 그는 7남매의 막내이자 장애아로 부모님에게는 아린 생이손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도의원에 출마하셨다가 떨어지셨는데 그 때 재산을 다 날리셨는지 그 후부터는 논에 물대는 양수기 사업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봄부터 가을까지 남의 논에 물을 대주고 추수가 끝나면 품삯으로 나락가마니를 받았다. 그래서 집은 별로 가난하지 않았다.

“우리 동네에서 테레비를 제일 먼저 샀습니다.”

‘여로’가 방송하는 날이면 동네사람들이 전부 그의 집으로 텔레비전을 보러 왔었다.

오빠들하고 식사. ⓒ이복남

그런데 촌이라서 그런지 도시락 반찬은 언제나 고추장에 박은 무장아찌가 전부였다. 어쩌다 생일날이면 오뎅볶음이나 계란후라이 같은 것을 넣어 주기도 했다. 체육시간에는 당연히 교실지킴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서럽다고도 했지만 서은숙 씨는 장애인이라 그런 거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장애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잘못 된 반복 세뇌교육의 효과이라.

공부를 썩 잘하지도 못했지만 장래에 뭘 해 보겠다는 희망 같은 것도 없었다.

“장애인이라 되는 것도 없었고 그냥 슬프고 고독했습니다.”

중학교 때만 해도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였다. 혼자 울었고 혼자 웃었다. 울산여고를 다니면서는 두세 명의 친구가 생겨서 학교를 마치면 같이 떡볶이도 사먹고 생엿도 사먹으며 어울려 다니기도 했다.

“학교는 잘 다녀서 국민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다 개근상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문대학 산업디자인과에 입학했다. 디자인은 재미가 있었지만 졸업은 하지 못 했고 방콕을 했다. 왜 졸업을 못 했을까.

“그 때 사춘기가 온 모양이지요.”

언니 오빠들은 다 결혼을 했고 집에는 그와 부모님 세 사람만 남았다. 어머니는 부실한 막내딸에게 든든한 짝을 지어주고 싶어 했다.

중매쟁이를 통해서 어머니가 물색해 온 신랑감은 그보다는 10살이나 많았고 배우지도 못했고 가진 것도 하나 없는 빈털터리였다. 당시 남자는 길거리에서 책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냥 싫었다.

당시만 해도 그의 집이 괜찮게 살아서인지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왔는데 마음에 들 만한 사람은 나중에 그를 버릴 거라며 어머니가 마다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책장사하는 그 사람이 성실하니 평생 배필이 될 거라며 그 사람을 고집했다.

“22살 1월에 강제로 결혼식을 했습니다.”

손자 돌잔치. ⓒ이복남

어머니가 주선했던 신랑 이**(1949년생) 씨와 결혼을 하자 어머니는 부산 자성대에 전셋집을 하나 얻어 주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남편이었다. 아이가 생겼다. 첫 딸(35살)과 둘째 딸(31살), 그리고 셋째 아들(24살)을 낳았다.

“그동안 남편은 이것저것 장사를 했는데 여러 번 이사를 했습니다.”

아이가 셋일 때는 울산 성남시장에서 신발 장사를 했다. 큰엄마가 보기 딱했는지 막내아들을 키워주겠다며 데려가고 가게가 딸린 조그만 뒷방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남편은 가게에서 신발 장사를 했고, 그는 장사를 하면서 아이를 길렀다.

집은 좁아서 변변히 몸을 뉘일 곳도 없었고 아이들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짜증이 났다. 그래서 아이들을 때리기도 했다. 그가 아이들을 때리면 남편은 그를 때렸다. 그는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했고 남편은 그를 때리면서 아이들은 커 갔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건물을 하나 샀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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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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