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의 시각장애인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 KBS 3라디오 ‘우리는 한가족’ 진행자인 이영호씨.ⓒ에이블뉴스

“에이블뉴스 이슬기 기자 연결됐습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국내 유일의 시각장애인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 KBS 3라디오 ‘우리는 한가족’ 진행자인 이영호씨와 인연을 맺은 지 벌써 1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가 어릴 적 엄마를 설레게 했던 청춘스타라는 것도, 수많은 고개를 넘었던 것도 알게 됐다.

“나는 두 가지 인생을 살았어요. 남들보다 행복한 삶이죠.”

그저 막내딸처럼 옛날이야기를 들려 달라 부탁했다. ‘허허’ 웃던 그는 이미 수백 번도 더 했을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연기를 하게 된 이유? 80년대 청춘스타는 우연히 만들어졌다는데. 홍익대학교 조소과 1학년이던 시절, 형 이장호 당시 조감독이 소설 ‘별들의 고향’의 원작료를 영호씨의 등록금으로 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전공에 큰 애정이 없던 그는 ‘잘됐다’는 마음으로 학교까지 그만뒀다. 모두가 기억하듯 ‘별들의 고향’은 큰 성공을 거뒀고, 이 감독은 ‘어제 내린 비’를 준비하며 영호씨에게 배우를 권유했다. ‘돈 벌어서 불란서(프랑스)를 가자!’ 오랜 기간 불문학을 꿈꿨던 그는 막연히 그렇게 연예계에 발을 디뎠다.

“아우~ 최고였죠. 지금의 ‘김수현’이냐고요? 뭐 글쎄요, 그건 비교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당시 나는 최고였어요.”

‘너 또한 별이 되어’, ‘그래그래 지금은 안녕’ 등 주로 청춘스타로, 여성 연기자와의 키스신을 도맡았던 그는 또 하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내가 감독을 하자” 그렇게 떠난 미국 유학길, SVA(School of Visual Arts)에서 필름프로덕션을 공부하고, 뉴욕대로 진학해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배우에서 이제는 감독으로, 제2의 인생을 그려왔던 영호씨.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의 제2의 인생에 돌입하게 되는데.

시각장애인 이영호씨는 장애와 비장애 두 가지 인생에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에이블뉴스

“그때가 마흔 살이었는데 눈이 이렇게 됐어요. 어릴 때부터 눈이 안 좋기로 유명했는데 내가 실명이 될지는 까맣게 몰랐죠. 누구나 그랬을 거예요. 절망도 많이 했고, 대낮에 미국에서 술 먹고 웃통을 벗기도 했어요. 아들은 그때 기억을 지금까지 잊지 못하더라고요. 비장애인은 모를꺼에요. 그 심정을.”

1989년 다시 찾은 김포공항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동경의 대상이었던 청춘스타의 앞에 드민 것은 사회의 편견이었다. 절망스런 마음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원서를 냈지만, 시각장애인인 그와 영화학교를 준비한다는 것이 겁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서울예술대학에서 시간강사로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친 것이 전부였다.

“실존주의라고 아세요? 제가 어릴 때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어차피 죽는데 눈 머는 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나는 그 말을 생각하며 지금까지 버텼어요. 나는 절망도 많이 겪었지만 죽지는 않았어요. 죽는 것에 비하면 실명, 아무것도 아니잖아요?(하하).”

전맹의 시각장애인이 된 영호씨의 사연은 여러 언론에서도 많이 다뤘다. 한 잡지 인터뷰의 인연으로 1991년, 망막색소변성증 환자들을 위한 협회를 만들었다. 그 안에서 10여명이 모인 시각장애인 극단 ‘소리’를 창단하기도 했다. 장애인에게 내어줄 무대가 없다고? 보통 대학로 극장들이 쉬는 월요일에 틈새를 노려서 공연을 했다. 다시 찾은 기회 속 아낌없이 자신의 재능을 쏟아 부은 것이다.

“기억나는 것은 첫 작품인 '금관의 예수'였죠. 배우들도 많이 울고, 언론에서도 많이 다뤄졌어요. 마지막에 했던 작품은 ‘사랑아 사람아’인데 지체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의 로맨스예요. 실제로 그 둘이 인연이 돼서 아이 세 명 낳고 잘 살아요.”

기회는 꼬리를 물고 다시 찾아왔다. 연극을 통해 찾아온 EBS 취재진들을 통해 장애인 라디오 프로그램 ‘사랑의 한가족’을 통해 당사자들의 삶을 나눴다. 인상 깊었던 점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써 달라”며 저금통을 들고 찾아온 초등학생이었다. “나는 처음 겪어봤어요, 돈도 얼마 없을 텐데 대견했죠. 지금도 기억나네요.”

현재 그는 지난 2011년 가을부터 6년째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KBS 3라디오 ‘우리는 한가족’ 라디오 프로그램 DJ를 맡고 있다. “저 잘나갈 때 라디오 DJ하고 싶었거든요. 그때는 눈이 안 좋아서 포기했는데, 눈 감고 나니까 이런 기회가 올줄 누가 알았겠어요?”

65세 나이, "해보고 싶은 것은 다 해봤다"는 이영호씨.ⓒ에이블뉴스

오랜 시간 장애계와 소통해왔던 영호씨, 그가 체감하는 ‘장애인복지’에 대한 생각도 궁금했다. 그는 “초등학교 수준”이라며 딱 잘라 말했다. 소득조차 보장되지 않은 채 복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것.

“지금 장애인연금으로 어떻게 생활을 해요. 미국은 1000불을 줘요. 재정적으로 소득이 보장된 다음에 복지가 나와야 하죠. 20만원을 연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시각장애인 데리고 한라산 꼭대기 오르는 것도 싫어요. 내세우기식, 보여주기식 이거든요. 장애인 하나 내세워서 역할 다 했다? 그건 아니라고 보거든요.”

8시간씩 책상에 앉을 정도로 책과 공부를 좋아했던 모범생, 불문학을 꿈꾸며 무턱대고 발 디딘 배우 인생, 시대를 풍미한 청춘스타, 실명으로 인한 좌절, 다시 찾아온 연극무대, 그리고 라디오 부스까지…. 영호씨의 인생. 참, 파란만장하다.

“나는 두 가지 인생을 살아봤잖아요. 비장애인으로써, 장애인으로써. 남들이 겪어 보지 못한 두 가지 인생을 다 살아보니 남들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지금이 더 행복한 점이요? 보기 싫은 사람 안 봐도 되고, 텔레비전 안 봐도 되고.”

영호씨는 올해 65세가 됐다. 화려했고, 아팠던 지난날은 그의 눈주름과 깊게 패인 보조개에 그대로 묻어있다. 인터뷰 막바지 질문, “꿈이 무엇이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꿈이요? 난 하고싶은거 다 했어요. 안해본게 없어요.(허허)”

요즘 그는 가구 소품을 만드는데 정신이 없다. 방송이 없는 날에는 집 베란다에 설치된 작업대에서 톱질과 대패질에 열심이란다. 스무 살 풋풋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소품 하나하나 만들겠다는 것. 옷맵시를 위한 다이어트도 꾸준하다. “난 배 나온 게 싫거든요.” 멋스런 코트와 청바지를 소화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봐요.” 그와 함께했던 1시간여의 인생 공부가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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