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장애인 가수이자 뮤지컬배우인 심보준씨.ⓒ에이블뉴스

“저 대단한 것 없어요. 월별로 받는 수입 카드회사가 다 꺼내가고 월세로 간신히, 악착같이 살아요.”

신나게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뮤지컬배우이자, 가수 심보준(31세, 안면장애4급)씨. 현재 늦깎이 대학생으로, 유부남인 보준씨에게는 떼어내고 싶은 꼬리표가 있다. 그를 한번이라도 마주했다면 바로 알 수 있을 유니크한 그의 외모, ‘안면장애인’.

“안면장애인 가수 심보준씨 모시겠습니다”라고 소개하는 행사 사회자 멘트에 그는 항상 “뮤지컬배우 겸 가수, 장애인식개선강사로 활동하는 심보준입니다”라고 다시금 소개한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신기하게 쳐다보기도, 급기야 5만원을 쥐어주는 사람들도 있다. 내 목소리로 모두 떨쳐버리고 싶다, 나의 꼬리표. 나는 안면장애인 가수가 아닌, 그냥 ‘가수’다.

“학창시절 학교를 다니면서 배운 것은 강해지지 않으면 밟히는 구나 였어요.”

스스로 약간 ‘유니크’하다고 소개한 보준씨의 어린 시절에 대한 질문은 너무나 틀에 박혔지만 안 물을 수 없는 것 아니겠나. “다들 그렇게 시작하죠”란 여유로 들려준 그의 이야기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깊숙이 박혀있다.

선천적 혈관종으로 남들과 다른 외모로 살아야 했던 보준씨, 치고 박기 좋아하는 남자 아이들의 세계에서 좋은 먹잇감이었다. 비장애인과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서울시 구로동 한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놀림 받았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친구요? 당연히 없었죠” 다른 외모 때문에 항상 집에서 혼자 지내야 했던 그의 유일한 낙은 춤이었다. 서울대학교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으며 우연히 마로니에공원에서 공연하던 비보잉 댄스팀에 반한 것. 쉽사리 그와 어울리기를 꺼려하는 비보이 형들이었지만 보준씨의 열정을 이길 순 없었다.

‘춤·춤·춤’ 집안에서만 조용히 있던 보준씨의 생활은 180도 바뀌었다. 형들의 공연을 따라다니고, 매일 복습했다. 누가 볼까 두려워 아침 일찍 등교해 텅 빈 공터, 교실을 찾아다니며 혼자 춤을 읽혔다. 얼마나 땀을 흘렸을까. 우연히 텅 빈 교실에서 춤을 추던 보준씨의 모습을 한 친구가 목격했다. 어랍쇼, 그의 반응은 “너 따위가” 가 아닌, “와~너 춤 잘 춘다”였다.

“누가 볼까봐 아침 일찍 나와서 춤을 췄어요. 그런데 한 친구가 보고서는 ‘보준이 춤 잘 추더라’라고 소문을 냈어요. 그 소문에 중학교 때 축제할 때마다 춤을 췄고, 친구도 생기기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때는 춤을 추면서 서울지역 비보잉대회에서 3등을 했어요.”

“아버지, 저 댄서가 되고 싶어요!”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 19살, 당당히 외쳤지만, 그의 아버지의 입에서는 냉담한 말만 돌아왔다.

“얼굴이 그런데 누가 댄서로 써주겠냐.” 꿈은 원대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취업을 하기 위해 이력서를 60개 넘도록 썼지만 장애로 인해 떨어졌다. 자격증을 4개나 갖고 있음 뭐하나. 업체들은 ‘손님들이 무서워할 것 같다’, ‘어려워할 것 같다’는 말 뿐이었다.

“취직 어디로 한지 아세요? 3D업종이죠. 수작업으로 인쇄하는, 악취 냄새 나고 위험한 약품으로 살타고. 중동사람들 사이에서 일했어요. 임금도 적었고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하찮게 일했죠. 그 속에서 제 이름은 없었어요. ‘야 임마’, ‘야 이 새끼야’라고 불렸죠.”

내가 왜 이렇게 살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꽃다운 20대 초반이 겪기에는 너무 고달픈 인생 아닌가. 한 병, 두 병 쌓아져가는 술병에 보준씨는 그때서야 어릴 적 이루지 못했던 꿈을 떠올렸다. ‘난 아직 어리잖아. 30살 때까지만 도전해보고 안되면 죽자.’ 그렇게 마이크를 다시 들었다.

(위) 심보준씨 앨범 자켓사진(아래)한국장애인국제예술단 창작뮤지컬 원앤원에서의 모습.ⓒ심보준씨 미니홈피

2008년도, 보준씨에게는 잊지 못할 1년이리라. 제13회 KBS 장애인가요제에서 금상을 탐과 동시에, 그날 심사위원이었던 강원래가 이끄는 ‘꿍따리유랑단’ 단원으로 뽑히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게 된 것.

전국을 돌며 노래를 불러준 사람들은 바로 교도소에 들어온 10대 소년수들. 살인, 강간 등 어린나이에 너무나 끔찍한 죄를 저지른 아이들을 마주했다. 다름 아닌 학창시절 때 나를 괴롭히고, 폭행했던 아이들이 아닌가.

“나 괴롭혔던 애들이 저런 애들이었거든요. 그런 애들한테 무엇을 할 수 있지? 고민했어요. 2년 동안 노래를 부르면서 느낀 게 많았어요. ‘우리도 바뀔 수 있을까요?’ 묻는 아이들을 보며 자신감을 얻고 자아가 형성됐던 시간이었어요.”

그렇게 시작했던 무대. 2010년 한국장애인국제예술단 무대를 시작으로 ‘남자로 태어나서’라는 앨범도 발매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창작뮤지컬 ‘원앤원’으로 미국 공연도 펼치기도. 뮤지컬에는 실제로 18세때 찾아간 기획사에서 쫓겨난 기억을 녹여냈다.

‘노래라도 들어봐야 하는 것 아냐! 난 얼굴만 이상하게 생겼잖아, 근데 세상에는 마음이 더 이상한 사람들이 많지 않나?’-창작뮤지컬 원앤원 中-

좌절하고 떠나는 독백 대사를 하며 그는 수많은 무대에서 오열했다. 나를 아프게 했던 한 마디, 그 감정을 되새김질하며 아픔이 아닌 하나의 추억으로 남겼는데. 자살을 결심했던 비장애인여성이 보준씨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던 일도 잊지 못할 일화로 가슴 한편에 남아있다.

현재는 비장애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보컬트레이닝 강사로, 늦깎이 14학번 음악학도로, 평소 절친한 형인 한국근육장애인협회 정영만 회장의 활동보조인으로, 또 가장 좋아하는 무대에서의 공연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보준씨. 무대에 오르겠다는 꿈을 이룬 이후 또 하나의 꿈을 꾸고 있단다.

“청운대학교 실용음악과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또 사회복지학도 부전공하고 있고요. 저는 공연하면서 내 스스로 아픔을 치료했거든요. 저 같은 아픔이 있거나 다른 상처로 인해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해 극단을 꾸려 공연을 해보고 싶어요.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 그래서 학교를 진학한 거구요.”

31세의 늦깎이 대학생. 나이도 많지, 유부남이지, 그에게 선뜻 다가오기 힘들었던 20세의 앳된 동기들 사이에서 먼저 손을 내민 보준씨. 이제는 아저씨로, 든든한 형으로 장학금까지 챙기는 음악학도로 거듭났다. 비장애인예술가에게 느꼈던 열등감도 이제는 떨쳐버렸다는데. ‘나 역시도 너와 같은 길을 간다.’

“저 장애 극복한 적도 없어요. 왜 자꾸 대단하다고 하죠? 제 얼굴 보면 지금도 슬퍼요(웃음). 근데요, 유니크한 얼굴 빼면 다를 것 하나 없거든요? 니들하고 똑같다 말하고 싶어요.”

지난해 11월 혼인을 올린 이후, 빠듯한 월세와 카드 값에 휘청이는 모습. 또래와 별반 다를 것 없다. 청춘은 아프다고 하지 않았나? 보준씨는 장애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다. 그냥, 30대 청년으로 아픈 것뿐이다.

“저는 장애인예술가란 수식어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것도 장애편견이거든요. 안면장애인도 맞지만, 안면장애인 가수라고 붙일 필요 있겠어요? 저는 가수 심보준이구요, 내 장애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장애가 된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생긴 것만 유니크하죠(웃음).”

보준씨의 또 하나의 직업, 절친한 형인 한국근육장애인협회 정영만 회장의 활동보조인이다.ⓒ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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