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작가 전봉권씨의 함박웃음.ⓒ에이블뉴스

때로는 말보다 환한 미소가 반가울 때가 있다. 그를 처음 본 건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2015 장애인고용 인식개선 작품현상공모전’ 보도자료 속에서다.

공모전 최우수상 ‘함박웃음’이라는 작품 안에는 평생 장애인 화가로 살아온 그가 자신의 자화상 앞에서 붓을 든 채 함박웃음을 진 모습이라고 소개됐다. “사진이 너무 좋다”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그의 사진을 기사 메인으로 걸고 ‘언젠가는 그를 만나 인터뷰를 해보리라’고 다짐했었다.

그 다짐이 조금씩 잊어갈때쯤 우연히도 그를 취재현장에서 만났다. 지난달,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린 ‘제2회 장애인창작아트페어’. 작품을 둘러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함박웃음’이 눈에 띈 것. 앗! 반사적으로 “혹시, 전봉권 작가님 아니세요”, “네, 맞.아.요” 어렵게 한 자, 한 자 내뱉는 그의 얼굴은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가득했다.

“안녕하세요”란 말보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함박웃음으로 맞이한 전봉권씨(51세, 뇌병변1급)의 인터뷰 진행은 조금은 힘들었다. 언어장애가 심한 그는 한 마디 말조차 전하는데도 힘겨운 것. 하지만 봉권씨의 한 마디 속에는 50년간의 아픔, 애환이 그대로 묻어났다.

“혼자 자립한지 2년째예요. 나의 고향은 원래 강원도예요.”

봉권씨가 이웃사람들에게 ‘태권이’라고 불리던 시절. 강원도 회성군에서 6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1살이 되던 해 열병에 걸렸다. 이웃들이 ‘침을 맞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며 동네 침을 놓는 할아버지를 소개해줬지만 봉권씨의 어머니는 그가 너무 어리다며 거절했다.

그때 침을 맞았다면 장애를 갖지 않았을까. 신기하게도 그와 같은 병을 앓았던 셋째형은 할아버지에게 침을 맞고 병이 깨끗하게 나았단다. 반면 많이 아팠던 봉권씨는 4년이 지나서야 부모님이 출생신고를 해줬다는데.

“어릴 땐 너무 가난했어요. 굶기를 밥 먹듯이 했어요.”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는 문장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어머니는 배추를 팔며 겨우겨우 6남매를 키워냈다. 하지만 어느날 그렇게 열심히 번 돈을 그의 아버지가 모두 들고 가출했다. 그 후에도, 그 후에도 돈이 있을 때마다 집에 들러 돈을 가져간 아버지. 굶기를 밥 먹듯 했던 그 시절, “기억조차 없어요”라고 애써 웃는 봉권씨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지어있다.

(위) 그가 시설 자원봉사자에게 글을 배우고 나서 써온 일기장(아래)미술작가가 된 후 받은 상장들.ⓒ에이블뉴스

‘함박웃음’ 답지 않게 그의 인생은 너무나 외로웠다. 어머니와 둘이 살면서 단 한 번도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저 방안에서 외로움을 달랠 뿐이었다. 그 외로움조차 표현할 길이 없던 1996년, 어머니조차 그를 떠나버렸다. 6남매를 키우느라 평생 고생만 하던 어머니, 그 마지막까지도 병에 걸려 고통스럽게 떠났다는데.

“어머니가 떠난 후 시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인권침해가 많이 일어나는 곳이었죠. 그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외로움이 사무친다’는 의미를 느껴본 이가 몇이나 될까. 시설 안에서의 7년은 봉권씨에게는 외로움 그 자체였다. 말벗조차 없던 그에게 “공부를 가르쳐줄게요” 라며 다가온 자원봉사자. 그녀는 말벗도 되어주고 한글조차 모르던 봉권씨에게 한글을 알려줬다.

“자주 못 올 수도 있으니 한글을 꼭 배우세요” 그녀는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학교를 소개했다. 유난히 살가웠던 그녀의 따스함을 보답하기 위해 봉권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는데.

“매일 노트에 한글연습을 하면서 조금씩 그림도 끄적여봤어요. 그냥 주변에 있는 사람들, 시설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했죠. 그런데 제 그림을 본 시설 목사님이 소질이 있다는 거예요. 제가 처음으로 뭔가를 해낼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죠.”

30년 만에 처음으로 꿈이란 것을 꾼 봉권씨. 목사님으로부터 장애인 그림공간 소울음아트센터 최진섭 원장을 소개받고 미술작가의 꿈을 위해 시설을 나와 ‘자립’을 시작했다. 최 원장의 집에서 20년간 생활하며 화폭에 자신의 애환을 담아내기 시작한 것.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서양화, 크로키, 인물화, 유화까지. 담아내고, 표현하고 싶은 나의 모든 것들을 그려냈다. 그 결과 일어서는 사람들의 기록전, 한국장애인미술협회전, 함께가는 길 미술전시회, 선사랑 누드크로키전, 천안대 초청 전시회….한 번도 꿈을 꿔보지 못한 봉권씨가 늦깎이 미술작가로서의 인생을 펼치게 된 것.

“상도 많이 받았어요” 그의 책꽂이 속 파일 가득히 상장도 쌓여있다. 2002년 대한민국장애인미술대전 서양화 특선, 2008년 경기도장애인기능경기대회 동상 등. 지난 2008년에는 소울음의 도움으로 개인전도 무사히 마쳤다.

지난 5월 ‘제2회 장애인창작아트페어’에서 자신의 작품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에이블뉴스DB

“몸이 잘 따라주지 않아서 비장애인보다 2배정도 걸려요” 손떨림이 심한 그는 나무젓가락을 개조해 만든 붓으로 자신만의 윤곽선을 그려나간다. 떨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항시 전동휠체어에 몸을 고정한 채 손목으로 ‘요리조리’ 그린다는데. 그렇게 작품 하나를 완성할 때까지 꼬박 1달이 걸린단다.

“그림이 너무 좋아요. 이렇게 좋은 것일 줄 너무 늦게 알았죠.”

소울음아트센터 최 원장은 그에게 스승이자, 아버지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에게 작가로서의 인생을 살게 해줄 뿐더러 수영, 보치아 등 개인적 취미도 만들어줬다. 지난 4월에는 보치아선수로서의 등록도 마쳤단다. 이제는 당당히 전봉권이라는 이름으로 홀로 진정한 자립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장애인들, 하고, 그림, 계속, 하고 싶어요”

얼굴을 찌뿌린채 한 단어, 한 글자 어렵게 쏟아내는 봉권씨는 앞으로도 작가로서 수입도 얻고 싶단다. 4년이나 늦었던 출생신고, 굶기를 반복했던 어린 시절, 고통스러웠던 시설 생활까지. “앞으로는 웃을 날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알았다. 봉권씨의 주름진 ‘함박웃음’은 힘겨움 속 이뤄낸 첫 꿈에 대한 성적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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