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형성부전증으로 학교에 가지 못했던 소년은 할머니가 사다주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나 마당의 강아지들이 봄볕에 조는 모습을 구경했다.

모두가 배우고 성장하는 데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 불안감에 휩싸이던 열다섯. 소년은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했고, 훗날 변호사가 됐다. 국가인권위원회에 근무하는 김원영(34세, 지체1급)씨의 이야기다.

국가인권위원회 김원영 변호사. ⓒ에이블뉴스

‘껍질을 깨고 세상 밖으로’

강원도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아 발끝이 걸려 넘어졌고, 그것으로 골절상을 입었다. 특별한 원인이 없어도 선천적으로 뼈가 잘 부러지는 골형성부전증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시골의 트럭운전수와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부모님은 수시로 서울을 오르내려야 했다.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20번 이상의 골절상을 입고, 10여 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입학을 거부했다.

입학 후 혹시라도 골절상을 입게 됐을 때 학교에서 지게 될 부담을 우려했던 것. 입학이 거부됐다고 해서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수도 없었다. 그 시절에 장애아를 입학시키는 건 전적으로 학교의 배려에 달린 문제였다.

15살이 돼서야 뒤늦게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 준비했다. 몸 상태가 어느 정도 안정됐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도 섰다.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에는 장애인 등록을 하고, 1997년 경기도 광주에 있는 한 재활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 적응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재활학교에서 일반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찾아왔다. 학교에서 원서조차 팔지 않았기 때문. 그때 만난 사람이 현재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으로 있는 박찬오씨다.

진학을 포기하려던 그에게 박 소장은 “(재활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고 치자 근데 거기도 장애인 편의시설 같은 건 없어 그러면 장애인을 위한 특수대학, 특수국가에 가는 것이냐”고 조언했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단순히 고등학교 진학 여부의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 삶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세상 밖으로 껍질을 깨고 나오거나 포기하거나 선택해야 할 순간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 김원영 변호사. ⓒ에이블뉴스

팍팍한 직장생활…창조적 활동이 ‘활력소’

현재 그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법학전문대학원을 거쳐 지금은 법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최근에는 지인들과 함께 장애문화예술연구소 짓을 세우고 연극 테레즈 라캥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장애인 인구 43.3%가 초등학교만 졸업한다는 사실에 근거할 때 지금의 위치까지 오른 그가 대단한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바쁜 시간을 쪼개 퇴근시간 즈음 피곤한 모습으로 만난 그는 여느 서울의 바쁜 직장인과 다르지 않았다.

관심 있는 분야를 공부했고 크게 벗어나지 않은 진로를 선택했으며 바쁜 시간을 쪼개 친구도 만나고, 글쓰기, 연극 등 창조적인 취미를 즐긴다. 연애를 하고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평범한 일상을 산다.

원영 씨는 “장애로 인해 겪는 문제들이 도처에 있다. 어떤 차별들은 명확하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고 막연하게 느껴지는 불편한 감정들도 존재한다. 이를 고민하고 풀어낼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 사회학이었다”고 진로를 정한 계기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어 “특히 사회학 중에서도 장애학이 좋았다. 당시에는 번역본이 거의 없어서 외국의 책들을 번역해 읽어 내려가면서 ‘내가 겪는 문제를 이 사람도 겪고 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그렇게 드러난 문제점들을 언어로 표현하고 싶어 선택한 게 법률이었다”라고 덧붙였다.

그가 맡고 있는 일은 장애 및 정신보건 시설 조사와 정책연구. 사건 때문에 보통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10시 즈음 퇴근한다. 시간을 쪼개 일주일에 2번은 대학원에 간다. 바빠서 친구들도 자주 못 만나는 요즘, 팍팍한 직장인으로써의 삶을 더 없이 절감하고 있다.

그래도 글쓰기, 연극 등 창조적인 활동을 할 때면 소소한 즐거움을 느낀다. 사회와 더불어 살아가는 데 활력소가 되는 셈이다.

“작년에 대학원을 휴학했을 때는 연극 활동도 했었는데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틈틈이 글을 쓰는 걸로 대신하고 있다. 뭔가를 창조해 낼 때의 보람 같은 게 좋다. 글이나 연극이 좋지만 연로하신 부모님을 생각할 때 마냥 좋은 것만은 할 순 없는 일이지만 기회가 있으면 다시 연극배우로 무대에 서보고 싶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원영 씨의 소박한 바람은 또 하나 있다. 책을 1권 더 내는 것. 출간된 관련 꾸준히 글을 써내려가 내년 안에는 발간을 하는 것이 목표다.

국가인권위원회 김원영 변호사. ⓒ에이블뉴스

‘장애인 특별하거나 불쌍한 존재 아냐’

30대 청년의 평범한 일상.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평범한 직장동료로 친구로 삶을 사는 장애인들이 많지 않은 까닭에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던 기자에게 원영 씨는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운이 좋게 여기까지 왔지만 나는 몇몇 전기적인 장애인이 결코 아니다”라고 겸손해했다.

이어 “우리 사회의 시선 특히 미디어들은 몇몇 요소들을 훨씬 더 극대화시킨다. 조금이라도 직업을 갖고 생활하는 장애인들을 보면 대단한 사람들로 부각시킨다”면서 “장애인을 미화하거나 감동의 대상으로만 규정하는 우리사회의 시각에 대해서는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애를 미담의 소재로 삼아 장애인을 영웅시 하다보면 ‘열심히 노력하면 장애가 있어도 별게 아니구나’라고 실제로 장애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가릴 수 있다는 이유다.

반대의 경우 즉 장애로 인해 평범하거나 혹은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가 가진 특별하고 풍성한 삶의 면모는 소거시킨 채 그저 장애를 가진 비극적인 인물로만 인식하게 된다.

원영 씨는 “나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만 법조인이 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아무리 편의시설이 개선된다 하더라도 뛰거나 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장애를 뛰어넘을 만큼 모든 게 가능한 것도 모든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닌데 두 가지로 전형화 시켜서 봤을 때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사회가 노력해 물리적인 장벽은 반드시 제거해 나가되 그래도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극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긴 시간 인터뷰 마치고 또 다시 남은 업무를 처리하러 근무지로 돌아가야 하는 그의 얼굴에는 팍팍한 직장인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기자가 광화문 근처에서 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9시에도 인권위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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