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재활원에서는 빨래를 빨고 다리고 짜깁기를 했다. 2개월 교육을 받고는 먹고 자고 숙식을 제공하는 세탁소에 실습을 나갔다. 당시의 실습생이란 먹는 것도 부실했지만 특히 잠자리가 불편했다. 잠잘 방이 따로 없었고 대부분이 다림질을 하는 작업대가 밤이면 잠자리가 되곤 했던 것이다.

도장 파는 홍언표 씨의 손 ⓒ이복남

그래서 그런지 한 두어 달 일을 하고 나면 몸살이 나서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몸을 좀 추슬러야 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가 처음 있었던 재활원을 찾아 갔지만 원장은 한번 나간 사람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사실을 안 다음부터는 밤에 몰래 재활원으로 찾아 갔는데 다행히도 함께 생활했던 후배들이 그 사실을 알고는 그를 원장 몰래 숨겨 주고 밥도 가져다주곤 했다.

그렇게 재활원과 세탁소를 오가다보니 사무치게 가족들이 그리웠다. 칙칙폭폭 십이열차를 몰래 무임으로 타고 무작정 강경으로 향했다. 몸은 장애에다 돈도 없고 그저 죽고 싶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본적지에 가면 뭐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결국은 누나들이 있는 작은아버지를 찾았는데 작은아버지를 찾아가면 극장표 하나 끊어주면서 놀다가 밤에 오라고 했다.

“사실 그 때만 해도 제가 불구자라는 게 부끄러웠던 모양입니다. 친척들은 밥한 끼 주고 차비나 주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참 서러웠던 시절이었고 죽지 못해 사는 목숨이었지만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언젠가는 구포에 있는 세탁소에서 일을 했는데 옆집에 장애인이 하는 도장포가 있었다. 그래도 같은 장애인이라고 인사를 하고 세탁업 대신 도장 일을 배우고 싶다했더니 ‘도장을 파려면 한문도 알아야 되고 머리도 좋아야 된다.’면서 마땅찮아 해서 결국 도장을 배우지는 못했다.

홍금당 앞에서 ⓒ이복남

그러나 재활원에서 각양각색의 많은 장애인들을 만나면서 ‘세상에 이런 사람들도 사는데 내가 왜 죽으려고 했는가’ 싶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용기도 얻었다. 그러나 죽음에의 유혹은 겨우 뿌리쳤지만 그의 방랑벽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세탁소에서 두어 달 일을 한 후에는 몸살이 나서 재활원을 다시 찾던가 아니면 훌쩍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 딱히 목적지도 없는 여행이었는데 그 여행길에서 신숙희(54)라는 여자를 만났다.

당시 신숙희 씨는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했고 그는 서면에서 시계수리를 하면서 세탁일도 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 그를 본 여자의 어머니와 오빠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안 할라믄 치아 뿌소.” 그도 나름대로 잘 나가던 시절이라 처가에서 반대하는 여자에게 별 미련도 없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신숙희 씨가 다시 찾아왔다. 다른 사람과 곧 결혼을 할 것 같아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보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으니 그래도 이 여자가 그동안 제가 만났던 여자들 중에서는 제일 나았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여자를 보내지 않았지요.”

어쩔 수 없었던 처가와 여동생이 약간의 돈을 마련해 주어 방을 구했고 성필(32) 성찬(28) 두 아들을 낳았다.

그는 세탁업 대신 도장을 하고 싶었기에 처남에게 의논을 했더니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처남이 어떻게 알았는지 도장 파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해서 도장은 혼자서 독학으로 배웠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손으로 도장을 파고 있는데 몇 해 전 와사풍이 온 후로는 시력이 나빠져서 한문 도장은 파지 않는다고 했다.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고 몇 군데를 거쳐 지금의 장소인 서동 시장 노상점포에서 시계수리와 도장을 했는데 노상점포 옆의 집 주인이 싸게 줄 테니 점포에 들어오라고 했다. 갑자기 부자가 된 듯해서 금은방도 함께 하면서 홍금당이라는 간판도 달았다.

그런데 어느 날 금은방이 홀라당 도둑을 맞았던 것이다. 하늘이 꺼지고 땅이 내려앉을 판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돈은 그의 몫이 아닌 모양이었다. 도둑을 맞고부터 금은방은 때려치웠고 도장 일만 했다.

“그때부터 19년을 이 자리에서 도장을 팠는데 지금은 아무 욕심도 없습니다. 그동안 조금씩 돈을 모아 재송동에 주택도 한 채 마련하고 두 아들 대학 공부도 다 시켰습니다.”

요즘은 하루에 3~4개의 도장을 파는데 아들들이 이제 그만 하라고 해도 그냥 소일거리로 점포를 지키고 있단다.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아들 둘을 괜찮은 곳에 장가보내는 것이고, 그리고 장애인계에서도 원로들의 모임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단다. <끝>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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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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