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이 시는 스물아홉으로 요절한 기형도 시인의 ‘엄마걱정’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엄마는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가면 해가 진지 오래된 후에야 배춧잎 같은 발소리로 돌아왔다. 그동안 빈방에 찬밥처럼 홀로 남겨진 아들은 어둡고 무서워서 훌쩍거리며 엄마를 기다려야 했다.

이상민씨. ⓒ이복남

필자는 이상민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기형도의 ‘엄마걱정’이 떠올랐다. 아들이 그렇게 엄마를 걱정하며 기다리는 동안 그 엄마는 또 아들 걱정에 얼마나 애가 탔을까.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엄마와 아들은 서로가 서로를 걱정했는데 그 아들이 장애아 일 때 엄마의 걱정은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었으리라. 이상민씨의 어머니도 장애를 가진 아들을 위해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억척스레 살았는데 주변에서는 아들이 커면 금은방이나 시계방을 시키라고 했다.

물론 엄마의 억척스러움이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기는 했겠지만 장애인이라면 의례히 그러려니 했던 금은방이나 시계방이 하기 싫어서 악착같이 공부에 매달렸던 본인의 의지이기도 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장애인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물었을 때 이상민씨는 “현실을 직시하라.”고 했다.

이상민씨(42)는 어머니의 기억에 의하면 생후 100일 만에 소아마비가 왔었다. 어린 아기에게서 어떻게 소아마비를 발견할 수가 있었을까. 아기에게 기저귀를 채우는데 손과 발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발을 앞뒤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

아버지 이차철(77)씨와 어머니 김순선(71)씨는 슬하에 3형제를 두었는데 둘째 상민씨는 부산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소아마비를 의심한 어머니는 그때부터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 하면서 아들의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당시에 소문난 부평동 할매 침쟁이며 유명하다는 한의원에서 침도 맞았다. 용하다는 곳은 다 찾아 다녔고 굿도 하는 등 그야말로 고생고생 하며 별짓을 다 해 보았지만 아이의 병세는 별 진전이 없었다.

당시 물리치료과 교수였던 막내 이모가 소아마비를 잘 본다는 여수 애양병원의 의사와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인지 아니면 애양병원에 사람이 많아서 기다린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는 여섯 살이 되어서야 애양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수가 있었다. 전주에서 한 달쯤 살다가 수술 후 양 다리에 통 깁스를 했는데 깁스를 풀 때는 전기톱으로 잘라야 했다.

“깁스를 풀 때 아파서인지 전기톱이 무서워서인지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가 달래면서 500원 줄 테니까 울리마라 했는데 돈 500원 받고도, 그래도 울었습니다.”

그 무렵 영주 2동에 살았고 봉래국민학교에 입할 할 때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갔다. 영주 2동은 가파른 산복도로 부근이라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다녔지만 2년 후에는 목발을 짚고 가방을 메고 혼자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의 몸 상태가 특별히 좋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우선은 나이가 들었고 그리고 영주 2동 산비탈에서 학교가 가까운 영주 1동 평지로 이사를 했던 것이다.

대학교 졸업사진. ⓒ이복남

어머니는 형을 도와 줄 동생이 있었으면 해서 아래 동생을 낳았다고 하셨지만, 형이나 동생에게 도움을 받은 기억은 많지 않았다.

자신에게 장애가 있다고 해서 특별히 남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고 웬만한 것은 더디지만 혼자서도 충분히 해 낼 수가 있었다. 그래서 3학년 때부터는 학교 갈 때도 혼자서 가방을 등에 메고 양 목발을 짚고 씩씩하게 걸어 다녔다.

그러나 달리기는 하지 못했다. 다리는 힘이 없어 달리기는 못해도 그 대신 손이나 팔 힘은 셌기에 누구든지 한번 잡히기만 하면 그날은 초상 날이었다.

가끔 절름발이라고 놀리는 애들이 있기는 했지만 누구라도 그를 놀리기만 하면 가만 두지 않았던 것이다. 학기 초에 그렇게 기를 잡았고, 누군가가 그의 손길을 벗어나 도망이라도 갈 양이면 그의 목발이 가만 두지 않았다.

“지금도 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어릴 때는 목발이 무기였습니다.” 장애인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이 목발이나 의수족 등 보조기를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 그 사실을 알고는 지금은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를 놀리고 도망가는 아이에게는 목발을 던지는 바람에 목발을 몇 개나 부러뜨리기도 했었단다. <2편에 계속>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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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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