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규 서울복지재단 대표이사는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대통령으로서 복지를 항상 염두에 둘 수 있도록 조언하는 역할을 했다. ⓒ에이블뉴스

[특별인터뷰]서울복지재단 이성규 대표이사①

장애인당사자로서, 사회복지 전문가로서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서울복지재단 이성규 대표이사를 만났다. 그가 장애인계에 첫 발을 내디딜 때부터 최근 서울복지재단 대표이사로 활동하기까지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18대 국회 문턱까지 갔다가 접은 사연, 이명박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 황연대씨 퇴진운동에 나선 이유, 청와대 행정관에서 물러나야했던 이유 등. 특히 이명박 정부의 사회복지정책에 대한 그의 입장과 자신이 한때 몸았던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의 미래에 대해 물었다. 본지 백종환 대표이사가 진행한 이성규 대표이사와의 인터뷰는 두 차례로 나눠 싣는다.

백종환: 이성규 대표에게 가장 궁금한 것이 18대 국회에 비례대표로 입성할 것으로 예상을 했었어요, 그랬는데 왜 상황이 그러지 못했죠.

이성규: 18대 국회에 어플라이(apply) 했었어요. 주위에 많은 분들이 권유를 했고요, 김성이 장관님은 장관직을 하시게 되고, 차관 자리도 다른 분들이 하시면서, 그런 분들이 당신은 비례대표 역할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랬고요. 권유도 하고 많이 밀어 주셨어요. 그런데 저는 장애인 몫이 아니고 사회복지전문가 몫으로, 또 사회복지 쪽의 정책을 나름대로 간추린 공이 인정됐던 것 같아요. 긍정적으로 보던 분들도 많았고 한 때는 당선권 안에도 배치가 됐던 걸로 중간 중간에 확인을 했었죠.

그런데 마무리 과정에서 좀 더 열악한 계층, 어려운 계층들을 더 끌어안자고 그래서 그쪽에 더 대표성이 있는 분들, 뭐 한센병이라든가 이런 분들을 앞으로 모셨어요. 마지막에 50명으로 압축이 되는데, 그런 분들을 앞으로 모시는 전략적 기조가 수뇌부에서 바뀌게 됐어요. 그리고 서울복지재단 대표이사 임기도 남아있는 데다가, 제가 ‘강부자’에는 안 들어가지만 고려대 출신이라 뒤로 뺐다는 설이 있어요. 전략적으로. 언론사도 보수 언론출신들은 후순위로 배치하고.

그래서 마지막 회의 자료에서는 제가 대학 선생인 데다가 현직 대표이고 해서 이름을 삭제했지요. 좋은 분들이 비례대표에 선정이 됐기 때문에 열심히들 잘 하시는 것 같아서 좋던데요.

백종환: 비례대표에 결과적으로 입성을 하지는 못했지만, MB정부의 공을 인정받았다고 보여요. MB정부의 장애인계, 사회복지계의 실세 중에 한 사람이라고 평가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현재 MB정부의 능동적 복지, 특히 장애인 복지를 지금 평가해 보면 어떠세요?

이성규: 사실 지금 능동적 복지, 장애인 복지를 평가할 시기는 아니에요. 아직은 너무 이른 시기이다. 다만 MB는 서울복지재단을 만든 시장이었고, 제가 여기 와서 있다 보니까 그 정신을 읽을 수 있는 것 같은데요, 상당히 창의적이에요. 이 재단 같은 모형이 없었어요. 초창기에는 반발도 많았는데, 이게 하드웨어로 보면 복지계의 청계천 같은 거예요.

당신이 답답했던 것 같아요. 시장을 하는데, 복지 뭐 이렇게 물어보면 밖에서는 다 공무원 때문에 안 된다고 그러고, 또 시장으로서는 공무원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근데 제너럴리스트니까 전문가들이 없죠. 계속 커지는데, 제대로 챙기는 전문기관이 있어야 되겠다, 그런 생각으로 이걸 만들었어요.

우리는 아직 규모야 작지만 전문가들로 다 되어 있잖아요. 현장에 있던 전문가들, 또 지금 그쪽 전문 전공한 박사급만 열 대여섯 명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현장에서도 대단히 장애인 복지를 포함해서 복지 현장에서 좀 불만이 많았던 것 같아요. 평가를 하는 입장이니까. 그런데 요즘은 동반자로 많이 생각합니다. 시에 가서 바로 얘기하면 안 통하는 얘기를 우리한테 하면 중재해서 뭘 만들어 주거든요. 또 복지관이나 이런 데에서 사업 좋은 거 하면 그걸 갖다가 서울시 전역으로 펼쳐드려요. 그러면 자기들은 너무 좋은 거예요. 자기들이 하는 게 이제 이런 의미가 있구나, 시가 알아주는구나라고 느끼는 거죠.

그러면 서울시가 하게 되면 부산시가 하게 되요, 경기도도 하게 되고. 그럼 나라가 바뀌는 거죠. 그런 제도를 처음 만든 것 보면 대단히 참 창의적이라고 평가하고 싶어요. 그걸 만든 분의 요청도 있고 해서, MB정부의 복지 정책의 일부를 제가 조금 정리하는 데 도움을 드렸던 건 사실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지금 제가 평가하는 것도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지만, 이제는 사회복지도 능동적으로 가야 된다는 것은 뭐냐면, 가난에 떨어진 분들을 자활 패러다임으로 모시는 것보다는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그런 쪽에 대단히 강조점을 두고 있고, 장애인 쪽도 막 주는 것보다는 도와주는 것은 기본이고, 개인을 능동화시켜서 사회 속에서 능동적으로 살고, 그런 것을 통해서 국가가 능동화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립생활 모델은 아마 파격적으로 발전할 것이에요. 그런 부분들이 조금 다르고, 경제활동 참여 쪽으로 많이 유도할 것이에요. 그러다 보면 많은 법률안에 대한 손질이 불가피하겠죠.

백종환: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은 어떻게 되나요?

이명박: 한번 그분이 시장으로 오기 전에, 제가 공단에 있을 때에, 어떤 분을 보내서 보좌관을 하면 어떠냐는 제안을 해온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의원이었는데, 제가 전문직에 몸담고 있어서 몇 번 중간에 있는 분들을 만났는데, 그때 만나면서 뭔가 조건이 안 맞았습니다. 저는 공부를 조금 더 하고 싶었고, 전문직으로 나가고 싶었으니까 그땐 스쳐지나갔죠.

또 제가 사단법인 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이라는 노동부 사단법인을 돕고 있는 과정에서 ‘장애와 사회’라는 계간지가 나옵니다. 거기에 장애인 복지와 관련해서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얘기를 듣고 싶다고 해서 인터뷰를 했어요. 서울시장이 1호였죠. 일정을 잡기가 참 힘들었어요. 시청 직원들이 생각하기에 시시한 잡지잖아요. 질문 주면 써 주고, 사진 찍어서 보내주겠다는 겁니다. 그런 거라면 안 하겠다고 해서 일정을 잡았는데 30분을 잡았어요. 사실 30분동안 무슨 인터뷰를 하겠어요. 사진이나 찍자는 얘기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가서 얘기를 하는데 2시간 넘게 얘기를 했어요.

그때 둘이서 상당히 라포 형성이 됐던 것 같아요. 장애인 복지 얘기를 하시고, 어떤 건 묻기도 하시고 그러더라고요. 장애인 분들이 ‘사회적 기본이라는 것이 갖춰진 상황에서 기본적인 인생을 살아야 된다’라는 생각을 갖고 계시더라고요. ‘오케이, 괜찮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서울시 행사 때, 테이블에 같이 앉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리고 제가 서울시장 자문위원이었거든요. 자문하다보면 또 뵐 일이 있었고. 또 지난 대선 때 경선 과정에서부터 정책 부분들을 조금 도와드리면서 그때는 조금 더 자주 뵈었죠. 그러면서 복지 교육도 좀 일부 시켜드리려고 노력했고. 경제대통령이기 때문에 복지를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소외계층들이 서운해 할 것이다, 그런 부분을 심기 위해서 노력을 했죠. 너무 경제 쪽으로만 치우칠까봐.

백종환: 장애인계에서 현 정부, 대통령에게 서운해 하는 것이 많은데, 옆에서 많은 조언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성규: 예, 확실한 건, 당신 스스로는 장애인에 대한 것은 굉장히 적극적이세요. 해야만 된다고 생각하고. 서울시장 재직 시에 지하철에 엘리베이터 설치하신 것이 3,000억원 짜리입니다. 그게 청계천 예산이랑 같습니다. 다른 시장들은 다 못했던 것이였죠. ‘그거 합시다’라고, 공무원들 설득해서 바로 하고, 또 새로운 것들을 시행하는 것도 보면 상당히 마음이 있다. 그런데 이제 예산의 추계, 이런 것 때문에 어려움이 좀 있는 것 같은데요, 이제 풀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성규 서울복지재단 대표이사는 고려대 재학시설 대학 정립단에 가입해 연구부장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에이블뉴스

백종환: 본인이 장애인당사자이기도 하지만 장애인계에 첫발을 내디딘 계기가 무엇인가요?

이성규: 대학에 다닐 당시, 고려대 2학년 82년도 즈음에 당시 난 운동권학생이었어요. 책을 많이 읽어야 된다는 나름의 의지도 있었지만 강박관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집 근처 도서관을 다니던 어느 날 몸이 불편한 학생이 나를 따라 오면서 혹시 정립회관을 아느냐고 물어봤어요. 고등학교 때 그곳에서 활도 쏘고 총도 쏘고 스포츠도 해보고, 체육을 대신했기 때문에 몇 번 가본 경험이 있었죠. 어두운 캠퍼스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했어요. 대학 정립단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 지체장애인 대학생 모임에서 체육대회를 하니까 한번 와 보라고 제안을 했죠.

그 제안에 따라 체육대회에 갔는데, 굉장히 쇼크를 받았어요. 왜나면 전부 중증장애인이었기 때문이죠. 휠체어를 탄 분, 목발을 짚고 아랫도리가 하늘하늘 한 분, 크지 않으셔서 제 허리춤에 오시는 분. 우리 학교의 서클은 뭔가 이념에 관해서 이야기하는데 거기서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생활 속의 어려움과 생존을 이야기했어요. 선배들이 취업이 안 되니까, 이력서 들고 전전하면서 우리하고 세미나하면서 얘기하고 이랬던 모습들이 엄청나게 생생합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뭘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외서클인 대학 정립단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게 됐어요. 열심히 했습니다. 내가 주로 하는 일이 2차 가고 이럴 때 중증인 사람들을 업어 나르는 일이었습니다. 별 일도 다 당했어요. 계단에서 떨어지고, 구르고. 그러다가 많이 서클 멤버들이 저하고 친해지고, 연구부장을 맡게 됐죠.

뭔가 서클에 모여 서글픔만 나누고 가는 것이 참 서글펐어요. 다리 아픈 사람들이 앉아가지고 미팅을 갔는데 여자애가 이쁜데 내가 일어나서 목발 짚고 가면 내 모습을 보고 떠날 거 같아서 오줌 참느라 혼났다, 결혼은 왜 꼭 장애인끼리만 해야 되냐는 등 만날 우는 얘기만 하는 거였죠. 이것도 좋지만 뭔가 정리를 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어요. 사회 속에서 장애라는 것이 무엇인지 개념을 정의해 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 정립단 연구부장을 맡아서 참 독서를 같이 많이 했습니다. 토론을 하면서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우리가 장애인 권리 선언서를 만들어서 정부와 언론에 뿌리자고 했어요.

백종환: 당시 대학 정립단에서 권리선언서가 만들어졌다는 말이죠?

이성규: 내가 연구부장이어서 권리 선언서를 기초를 했습니다. 그때 그걸 쓰기 위해서 헌법책을 읽었는데, 미국에서 흑인들이 취업이 안 되니까 우선취업권이라는 걸 줬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이 써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 정립단 명의로 그 권리선언서에 ‘장애인 우선취업권’을 언급해서 전체 언론사에 보냈어요. 관공서에도 다 보냈어요. 그리고 권리선언서를 증폭시킬만한 사람이 누군가 찾다보니까 황연대 정립회관 관장이라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것을 황연대 씨한테 드리고, 각계각층에 가서 호소해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황연대라는 사람이 대단히 큰 사람인데, 뭘 줘도 변하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당시 우리는 뭘 갖다 주면 당장 결과가 나오는 줄 알았어요. 지금 젊은 활동가들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 정열이 있는데요. 그땐 내가 그랬던 것 같아요.

백종환: 그래서 투쟁의 강도를 높였나보죠?

이성규: 황연대 퇴진 운동을 벌였지요. 그래서 황연대씨가 저를 참 미워했어요. 한때 미워한 게 아니고 안타까워했겠죠. 철없으니까. 정립단 친구들이 다 같이 몰려가서 그만두라고 그러고 뭐 이러니까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그러면서 그쪽 일을 많이 해왔죠. 그러다가 85년인가요, 84년인가요, 김순석씨 사건이 도화선이 됐죠.

백종환: 서울시장에게 도로 턱을 없애달라는 유서를 써놓고 자살하신 분인데요.

이성규: 그렇죠. 지체장애인으로 휠체어를 탔던 김순석씨가 서울시장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겼는데 그 유서 내용이 ‘도로 턱을 좀 없애주십시오, 나는 죽습니다’ 그러고 돌아가셨어요. 저는 그것도 되게 쇼킹했어요. 저런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한 두 명일까. 그래서 그걸 쟁점화시키자고 황연대씨, 복지부 뭐 아무리 가서 호소를 해도 뭐 꼬마가 가서 하니까 안 돼서, 제가 위령제를 계획했지요. 그리고 제가 위령제 준비위원장이었어요.

장애인 올림픽 개막식 하는 단상 바로 옆에 위령제 판을 벌인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곡을 하고요. 그랬더니 개막식에 참석했던 귀빈들이 하나씩 단상에서 떴어요. 그런데 내가 귀빈으로 참석했던 권희역 교육부 장관의 팔을 붙잡고, 분향을 강요하자 장관님이 곤혹스러워 나를 뿌리치고 저는 경찰관에게 끌려가서 조금 고생을 했죠. 그런데 그 사건이 언론에 보도가 됐어요. 동아일보에 창이라는 박스 기사에 그 장면을 그대로 묘사해 써놨어요. 그런데 기사 말미에 마지막 묘사가 축구 예선전을 벌이고 있는 장애인들이, 마치 잔칫날 손님들에 밀려서 밖에 나앉은 주인 같았다. 기자가 참 통찰력 있게 봤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처음에 저는 우리가 주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우리가 주인이지. 뭐가 나 앉어, 나앉긴.

백종환: 그리고 장애인계에 이성규 이름 석 자가 자주 등장했던 것이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을 설립하고, 공단 근무 이후부터잖아요?

이성규: 황연대씨가 대학정립단에서 장애인권리선언을 기초할 때 장애인우선취업권을 기억하고 의회 입법 보좌 활동을 하고 있는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노동부에서 장애인고용촉진공단 설립 준비금 7억원을 확보했는데 국회 사무처 예산팀에서 삭제를 당했다면서 이것을 살려내야 공단을 만든다고 말했죠. 가만히 생각하니까 참 기묘한 인연이더라고요. 장애인 우선취업권을 그렇게 주장하고, 처음 그걸 한다고 헌법을 몇 번을 너덜하게 읽고 거기서 아이디어를 하나 얻어서 우선취업권을 얘기했는데.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 생기는 게 날라 갈 판인데, 내가 국회에 근무하고 있구나, 그러면 내가 해야 되겠다, 그 생각을 갖고 열심히 뛰었어요. 당시 예결위원장이 김용태 의원이었어요. 김용태 의원님한테 사정 이야기를 하고 우여곡절 끝에 예산 확보가 됐어요. 그리고 노동부에 이채필씨가 장애인고용촉진법을 기초하면서 저를 천거하고, 그래서 공단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게 됐지요.

처음 공단 2급 과장으로 출발해 1급으로 승진하게 되면서 공단에서 10년 이상 근무하게 됐던 거죠. 그러면서 지사장도 했고, 그것도 초대 지사장. 부산에 가서 처음 지점을 만드는 것도 주도하게 돼요. 중앙에 와서 국장에 오랫동안 있다가, 한순간 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죄의식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제가 장애인 서클을 했고, 장애인 운동을 했고 이랬는데 제가 과연 시각장애인들을 잘 아나? 그 특징을. 지적장애인들에 대해서 잘 아나? 그 부모의 마음을 과연 아나? 그 접근하는 전문적인 학술적 틀을 내가 갖고 있나? 거기에 대해 반성을 하게 됐고, 서클 수준에서 적당히 어디 가서 한 두 마디 하는 건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이상, 그 당시에 정책을 우리가 만들어서 올리면 노동부에서 답하기 때문에, 겁나더라고요.

백종환: 그래서 영국으로 공부하러 가셨나요?

이성규: 그래요. 2년을 계획하고 영국 런던 스쿨 오브 이코노믹스에서 공부를 했는데 사회과학의 메카답게, 장애 문제를 장애로만 보지 않습니다. 사회 맥락 속에서 본 거에요. 또 거기서 정책을 만드는데, 그 전공자들이 딱 ‘코워크’(co-work)를 했어요. 건축, 디자인, 복지, 경제적인 영역, 정치적인 영역까지 다 장애인 문제가 풀어져야지 이제는, 또 문화 향유까지 가면 예술인들까지 들어가야 되잖아요. 그 사람들은 하고 있었어요, 당시에.

그래서 제가 거기서 공부를 하면서 학위 자체보다 그 사람들의 관행, 패턴, 문화, 이런 걸 배운 게 참 좋았고, 또 어느 장애인이 하나 있으면 이 사람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사회가 협조하는 모습들을 공부하고 왔죠.

이성규 서울복지재단 대표이사는 영국 유학 후 돌아와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 복귀했다고 다시 청와대 행정관으로 파견된다. ⓒ에이블뉴스

백종환: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얼마 뒤 청와대에 파견 나갔지요?

이성규: YS정권 말긴데, 영국 박사가 필요하다고 박세일 수석이 요청을 했어요. 청와대 업무는 호이키스 업무라고 하는데 여러 부처에서 받은 업무를 잘 가공해서 호이키스로 찍어 대통령에 보고하는 거죠. 청와대에서 여러 부처를 보다보니까 ‘장애인 복지 발전 5개년 계획’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이게 보니까 노동부가 만약에 올해 시작해서 한다면, 복지부는 이미 시작해 있고, 교육부는 뭐 또 다른 햇수고. 서로 다 따로따로 가는 거예요. 세 개를 다 검토해 보니까 어떤 건 같은 얘기가 있고, 그런데 다른 용어를 쓰고. 어떤 건 또 다른 건데 애매모호하게 같은 사업같이 포장되어 있고. 안되겠다 싶어서, 또 일을 벌였지요. 장애인을 염두에 두고 뭔가 이제 머리를 맞대고 세 개 부처라도 계획을 맞춰야 되겠다, 그런데 정권 말기다보니까 각 부처에서 협조를 해주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대통령께 보고를 드려서 결국 장애인복지 합동보고대회가 은평에서 1997년에 열리게 됩니다. 대통령이 은평천사원에 가셔서 현장에서 장애인 복지 관련자들 다 불러놓고 이때 각 부처에 흩어져 있던 기준, 용어 등을 통합한 안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제1차 장애인복지발전 5개년계획이지요.

이처럼 1차 5개년계획을 만드는, 청와대 행정부 안까지, 계속 장애 쪽에서 같이 살아왔어요. 장애를 한 축으로 놓고 항상, 인생을…. 그래서 장애인 얘기는 남의 얘기 같지 않아요. 내 얘기 같고, 내 일 같고. 장애인 일이 있다고 그러면 나도 뭐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나, 그 생각이 늘 있고. 그런 인연이죠,

이제 후배들이 많이 장애운동계에 들어왔는데, 제가 했던 초창기는 인권을 알렸던 것 같아요. 장애인도 인권의 주체다. 그걸 알리는 역할을 했고, 김순석씨 돌아가신 것을 시작으로 해서, 뭔가 장애인 운동의 하나의 뚜렷한 전환점이 됐어요. 그 뒤에 후배들이 운동 차원에서 인권을 주장해 왔고, 그러다가 이젠 자립생활이 요즘 들어왔는데, 그것을 저는 2기로 봐요. 자립생활에 관한 것이 인권이라는 것의 구체화, 그래서 자립생활, 활동보조가 구체적 실행이 돼야 한다는 구체적 인권 운동이다, 그렇게 보고 있죠. 그런 걸 볼 때마다 참 후배들이 잘 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백종환: 청와대에서 언제까지 일했지요?

이성규: YS정권 말에 있다가, DJ정권 들어오면서 나오게 됐습니다.

백종환: 그때 소문이 많아요. 신한국당 사람이다 보니까 이 사람은 그 업무에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소위 DJ정부 쪽 특정인에게 찍혀서 나왔다는 소문도 있어요.

이성규: 그건 사실입니다. 그건 사실이고, 당시는 좀 서운했던 것도 있었어요. 왜냐면, 그때 정권이 바뀌고 나니까, 저 같은 경우는 정상인도 아니고, 장애인복지하고 사회복지 영국 박사가 필요해서 그 쪽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청와대에 들어갔던 사람이, 행정관들이 일부는 있어요. 있다가 나중에 바뀌고 순환되고 이러는데, 간지도 얼마 안 돼서 좀 더 있으려고 그랬어요.

어떤 분들은 좀 더 좋은 조건으로 더 있게 된다는 그런 얘기까지도 나와서 저는 그냥 있나보다 그랬는데…. 어떤 분들은 또 다른 생각을 했겠죠, 정권이 바뀌었으니까, 새 물을 붓자, 새로운 사람이 들어가야 된다고. 그래서 저는 옛날 정권에 있던 청와대 행정관이니까, 저 사람은 바꾸는 게 좋겠다. 그 생각을 하고, 자기가 친한 분들을 천거하고, 그랬던 걸로 기억나요.

백종환: 이 대표께서는 당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단에서 파견된 것이었는데?

이성규: 저는 공단에서 파견이 됐던 전문가죠, 전문가. 전문가로 파견된 거지, 정당인은 아니었죠. 당시에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서운한 부분도 있었죠, 어린 마음에. 지금 보니까, 정치 논리 같아요. 정권이 완전히 바뀌었잖아요. 김영삼 정권 이전에 노태우 정권, 그 전에 전두환 정권, 이러한 이념적 기반을 가진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으로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완전히 바뀐 상황에서는 우리 편들이 다 들어가서 해야되겠다라는 생각도 현실적으로 있지 않았었던가,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그게 마침 제가 됐으니까, 저를 이렇게 끌어내린 것처럼 됐고, 그래서 약간 피해자 같이 돼서 사람들한테 동정을 많이 받았죠. 동정을 많이 받았는데 그게 또 하나의 자산이 됐던 것 같아요. 행정과 정치를 잘 구분할 수 있는 발단도 됐고요.

지금은 또 새롭게 10년 만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왔잖아요? 새 정권의 일부 인사들도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러니깐 모든 정권과 주체 세력들은 나름대로 이토스(Ethos)와 페이토스(Pathos)가 같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들 생각들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고요. 그때 제가 조금 더 성숙했더라면 ‘어 그래, 뭐, 바뀌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고 웃으면서 배턴 터치하고 나왔을 지도 모르겠는데, 그 당시엔 제가 스물 몇 살이었어요.

백종환: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을 설립할 때부터, 그리고 부산의 첫 지사를 만드는 등 여러 과정을 겪으면서 오래 근무를 해왔었던 핵심 인물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밖으로 나온지 오래인데도 공단 이사장을 공모한다고 그러면 항상 1순위로 이야기가 거론되고 그래요.

그런데 요즘 공단이 어쩌면 위기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이명박 정부는 공기업 선진화 방안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 핵심이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그 현장에 안 계시더라도, 공단 선진화 방안의 핵심 목표는 무엇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이성규: 저는 간단하다고 생각해요. 공단의 선진화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되는데요. 장애인 개개인이 어떠한 여건과 비전 속에서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을지, 대단히 입체적이고 섬세한 동시다발적 프로그램을 붙여 줘야 됩니다. 이제는 가게 차려놓고 손님 오길 기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게 차려놓고 올 정도의 분들은 이제는 고용이 되는데 큰 어려움이 없어야 됩니다. 그런 분들이 있다고 하면, 저분들의 직업 역량,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 현재의 우리 상황 속에서 갈 수 있는 분야, 그 분을 보고 세상을 맞추는 작업을 하나씩 하나씩 해야죠. 성실하게.

그렇게 하다보면 노동부라는 행정적 틀이 더 좋은 건지, 지방자치단체라는 틀이 더 좋은 건지…. 사실 요즘도 참 애매한 게 지방자치단체장들이 나서서 고용을 창출할 수도 있죠. 지금 노동부는 별도의 청이 있잖아요. 공단은 별도의 지사가 있고. 이렇게 움직이는데, 이게 혼자서는 절대 안 됩니다. 같이 묻어들어가야 됩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 장애인들이 탁 있어야 됩니다. 언론하고도 하고 기업인들하고도 하고, 어떤 때는 행정관청, 지자체장들하고도, 뭔가 자꾸만 그 쪽을 중심에 놓고 주변 주변을 자꾸 붙이는 코드 역할을 이제 강화해야 할 때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단에서는 장애 성을 이제는 장애인이라는 특정한 범주만 봐서는 안 된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나왔잖아요. 그게 노인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 건강한 노인은 아니잖아요. 장애 노인이거든요. 그래서 장애인장기요양보험제도를 또 만들자는 거잖아요. 별도로. 언젠가는 이게 같이 가야 되겠죠. 장애 성에 의한 사회적 반응이거든요. 이 장애성에 의한 사회적 반응은 장애인이든 노인이든 같이 봐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노인은 장애 잠재성이 훨씬 강하잖아요. 그 분들을 이제는 사업의 중심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거죠. 장애인고용촉진공단 그러지 말고, 그냥 고용촉진공단, 아니 고용공단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장애인고용공단으로 바뀐다고 하죠? 그래서 일반적인 고용은 노동부에서 하고, 고용공단은 좀 스페셜하고, 조금 개인적 준비를 더 해야 하고, 개인적 평가가 더 필요하고, 개인적 비전 관리를 별도로 해드려야 될 부분을 하는 것이죠. 노인 분들, 장애인 분들 다 받아요. 여성 분들까지. 어떻게 보면, 여성들이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사회가 배려가 없기 때문에 여성은 장애인입니다.

고용공단이 사회가 갖춰지지 않아서 받는 장애까지 넓게 가져가면서 이제는 장애인을 특수화시키지도 않고, 또 노인들을 특수화 시키지도 않고, 또 여성을 차별하지도 않는 그런 형태로 비전을 수립해서 몰고 나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을 몇 번 얘기했어요.

일본 같은 경우는 이제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라는 틀 안에 노인까지 들어왔어요. 저는 일본의 경우를 잘 몰랐는데, 장애성에 맞추면 사회적 장애 성을 다 커버할 수 있는 그런 쪽에 맞춰서 고용공단, 아니면 고용에이전시가 되면 되겠다 싶습니다.

본지 백종환 대표이사가 이성규 서울복지재단 대표이사를 인터뷰하고 있다. ⓒ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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