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BIFF)는 올해가 제27회다. 27년 전 그날, 당시 필자가 부산장애인총연합회에서 사무총장으로 재직할 때였는데 부산국제영화제(BIFF) 김동호 집행위원장으로부터 500 여장의 장애인 표를 따로 받아 배분했다. 당시만 해도 부산국제영화제 전용관이 지어지기 전이었으므로 주요 영화는 수영만 요트장에서 상영했다.

찬 바람 부는 10월의 바닷가라 제발 옷 따뜻하게 입고 오라고 신신당부했음에도 옷을 허술하게 입고 와서 벌벌 떠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일을 대비해서 주최 측에서 무릎 담요를 나눠주기도 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여러 가지가 바뀌었다. 그리고 코로나와 거리두기 등으로 국제영화제 단체 관람이 뜸해졌기에 올해는 부산장애인총연합회를 통해서 몇 장의 영화표를 받았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몇 년 전에 ‘영화의 전당’이라는 전용관이 생겼고 필자가 받은 표는 장소가 야외극장인데 예전의 수영만 요트장 같이 찬바람이 몰아치지는 않는다 해도, 그래도 야외극장이니 옷 따뜻하게 입고 오세요.

2022년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현 허문영 집행위원장)는 지난 5일 시작됐다. 오는 14일까지 영화의 전당을 포함한 7개 극장 30개 스크린에서 총 354편(공식 초청작 71개국 243편, 커뮤니티비프 상영작 111편)의 작품이 소개된다고 한다.

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입장권. ⓒ이복남

지난 9일 밤 8시 야외극장에서 상영된 영화제목은 ‘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였다.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은 별로 없었고, 이치조 미사키의 베스트셀러 연애소설을 미키 다카히로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늘은 잔뜩 흐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지만, 7시가 지나자 좌석은 거의 다 차기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촬영은 절대 금지라고 했지만 그래도 가끔 휴대폰을 켜는 사람이 있어서 안내원이 다가와서 주의시켰다.

‘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미치에다 슌스케와 후쿠모토 리코가 남녀 주인공을 맡았다.

히노 마오리(후쿠모토 리코 분)는 자고 일어났다. 그녀의 방에는 온갖 구호들이 붙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 일기를 반드시 읽을 것, 밖에서 절대 잠들 지 말 것, 책상 앞에 그리고 벽 여기저기에 잔뜩 붙어 있는 구호들이었다.

마오리는 방에 왜 이런 구호들이 붙어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었다. 마오리가 방을 나가자 엄마 아빠가 기다리고 있었다. 잘 잤니? 너는 선행성 기억장애란다. 3년 전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었어. 그러나 너는 어린아이를 구하고 그리되어서 큰일을 한 거란다.

마오리의 엄마 아빠. ⓒBIFF

영화에 나온 선행형 기억장애란 어떤 것일까. 백과사전에도 없었다. 나무위키에 "선행성 기억상실증(先行性記憶喪失症)'은 대뇌의 해마가 손상되어 새로 겪는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질병을 말한다. 전향성 건망증(前向性健忘症)이라고도 하며, '선행성'이라는 말보다는 `전향성 기억상실`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술에 취해서 지난 밤 일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전향성 기억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아무튼 영화에서 마오리는 선행성 기억장애로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기 전까지는 기억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전날의 그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진다고 했다.

“제가 선행기억장애라는 것을 누가 알아요?”

“엄마 아빠하고 네 친구 이즈미밖에 모른단다.”

그런데 마오리는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는 마오리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의사도 마오리의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다고 했다.

마오리는 집에 오자 그의 방에 붙어 있는 쪽지들을 떼었다. 예전의 기억이 돌아오고 있어서 이제는 그런 쪽지들이 더 이상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오리가 벽에 붙은 쪽지를 떼다가 쪽지 하나가 책상 뒤로 떨어졌고 그 쪽지를 꺼내다가 스케치북 하나를 발견했다.

스케치북에는 온통 어떤 남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마오리는 그 남자가 누군지 몰랐다. 도대체 이 남자가 누굴까? 마오리는 친구 와타야 이즈미 (후루카와 코토네 분)에게 물었다. 스케치북에는 온통 이 남자 얼굴이던데 이 남자가 누구야? 친구 이즈미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마오리와 친구 이즈미. ⓒBIFF

마오리는 고등학생이라 학교에 다니고 있다. 어제 일을 까맣게 모르는데 공부는 어떻게 하지. 그런데 사고 나기 전 즉 3년 전의 일은 그대로 기억한다고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카미야 토루(미치에다 슌스케 분)가 마오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너를 잘 모르지만, 나랑 사귈래?”

마오리는 난데없는 토루의 물음에 잠깐 어리둥절했으나 그러겠다고 했다.

“그럼 방과 후에 만나자”

방과 후에 마오리와 토루가 만났다. 토루는 수줍게 고백했다. 사실은 거짓말이야. 토루와 그의 친구는 반에서 왕따였다. 그들을 왕따로 만든 친구들은 토루가 마오리에게 가서 사귀자고 하면 더 이상 친구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했으나, 사실 토루가 사귀자고 하면 마오리가 거절할 게 뻔하므로 토루와 친구를 웃음거리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토루와 마오리. ⓒBIFF

그런데 마오리가 짐작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친구들에게 정말로 사귄다는 것을 보여 주자고 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다. 첫째, 학교 끝날 때까지 서로 말 걸지 말 것. 둘째, 연락은 되도록 짧게 할 것. 셋째, 날 정말로 좋아하지 말 것.

토루와 마오리의 연애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토루는 소설을 쓰는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었고, 집안일은 자기가 다 한다고 했다. 그는 마오리와 소풍을 가기로 했다. 토루와 마오리는 바닷가로 소풍을 갔고 토루는 맛있는 샌드위치 도시락을 준비해왔다.

그들은 바닷가에 돗자리를 깔고 토루가 가져온 도시락을 먹었다. 마오리는 샌드위치가 정말 맛있다고 했다. 하늘에는 흰 구름 떠가고 멀리 파도 소리 들리고 토루도 마오리도 정말 행복해했다. 마오리는 자리에 누워서 하늘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아아, 이를 어째. 마오리는 잠이 들었다가 깨면 모든 기억이 리셋되는데.

잠든 마오리. ⓒBIFF

잠든 마오리는 천사같이 평온했다. 토루는 잠든 마오리를 쳐다보다가 홀로 바닷가를 거닐다가 돌아왔다. 한참을 자고 난 마오리가 잠이 깼다. 그런데 옆에 웬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누구세요? 마오리는 소스라쳐 놀랐다. 토루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마오리는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이즈미에게 전화했다. 나 어떻게? 꼼짝 말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이즈미는 토루에게 전화했다. 마오리를 좀 달래 주라고. 토루도 전혀 짐작도 못 했던 일이지만, 토루는 마오리를 달랬다.

"나, 병이 있어.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란 건데. 자고 나면 잊어버리거든.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그래서 마오리는 그날 있었던 일을 일기에 기록하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복습하는 것으로 어떻게든 기억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럼 오늘 있었던 일은 일기에 쓰지 마. 그럼 없었던 일이 될 테니까.”

토루는 하루하루 기억을 잃어버리는 마오리를 위해 일기가 즐거운 일로 가득하길 바라며, 그들은 단 하루만의 사랑을 쌓아가고 있었다.

토루는 마오리가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머리는 잊어도 손은 그 재능을 잊지 않았을 거라고. 그래서 마오리는 토루 얼굴을 그리고 또 그렸다. 손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므로.

토루가 좋아하는 작가는 젊은 신인이었는데 이즈미도 좋아하는 그 작가는 토루의 누나 카미야 사나에(마츠모토 호노카 분)였다. 토루 엄마는 선천성 심장병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엄마가 죽고 아버지는 허랑방탕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누나는 집을 나가 소설을 써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누나가 집을 나가고 토루가 집안일을 하면서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가지 염려가 되었다. 어쩌면 마오리를 두고 떠나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마오리와 약속한 세 번째 조건 ‘정말로 좋아하지 않기’는 깨어진 지 오래지만, 그에게도 엄마처럼 선천성 심장병이 있었던 것이다.

토루는 이즈미에게 부탁했다. 내가 어떻게 되거든 마오리의 기억에서 자기를 지워달라고 했다. 그리고 토루는 떠났다. 이즈미는 토루의 부탁을 차마 들어줄 수가 없어서 토루의 누나에게 연락했다. 마오리의 일기장과 휴대폰을 가져오면 토루의 부탁대로 누나가 대신 기억을 지우겠다고 했다.

마오리의 기억에서 토루의 기억은 말끔하게 다 지웠는데 마오리의 기억에서 토루가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이즈미는 통곡했다. 내가 그들의 추억을 전부 지웠어. 이즈미는 마오리에게 예전 토루와의 추억을 전부 돌려주었다.

영화가 끝나고 야외극장. ⓒ이복남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은 심사위원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날마다 기억이 리셋하는 선행성 기억장애를 가진 마오리와 방황하는 청춘 토루의 날마다의 연애는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이들이 함께 보낸 시간은 아름답고 낭만적인 청춘 시절의 성장통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이나 영화 속에만 가능하고 그리고 아름답다.

현실에서는 슬프고 아픈 기억일수록 빨리 지워지고 잊혀져야 한다. 추억을 되살릴수록 고통이나 아픔도 되살아나니까. 부디 아픈 기억 위에는 기쁘고 즐거운 추억이 그 자리를 덮을 수 있기를.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