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터 박정인. ⓒ박정인

요즘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크리에이터라고 말할 정도로 1인 미디어를 통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인기를 얻고 그것으로 돈을 버는 새로운 직종이 로망이다.

장애인계에서도 유튜버에 도전하여 주목을 받고 있는 크리에이터들이 있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사람은 유튜브 채널 ‘우리 정인이’를 운영하는 크리에이터 박정인이다. 배우를 꿈꾸던 그녀가 크리에이터가 된 사연은 자못 비장하다.

햇빛이 무서운 여자

학창 시절부터 시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안경을 써도 교정시력이 0.9정도였지만 책을 많이 본 아이들은 그 정도 시력이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신체검사를 했는데 색맹검사표를 잘 못 보아 대답을 못하자 검사원이 색약인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날 색맹검사를 잘 이해하지 못해 생긴 실수쯤으로 여겼다.

정인이는 언론인이 꿈이었기에 대학 진학에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하였다. 보통의 대학생들처럼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언론재단에서 실시하는 사업에 알바생으로 참여하여 제주도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언론재단 알바는 너무도 좋은 기회인데다 제주도에서 일을 하다 보니 여행을 온 듯이 즐거웠다. 그런데 프로그램 참가자들을 인솔하여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갑자기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식당 앞에 있는 몇 개의 계단이 보이지 않아서 내려올 수가 없었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해 왔지만 그것이 시각장애의 전조 증상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눈부심이 사라지면서 시력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배우가 되고자 했던 여자

배우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안경을 안 쓰기 위해 라섹수술을 했다. 병원에서 시신경이 보통 사람들보다 약하다고 하면서 라섹은 신경과는 상관이 없으니 수술을 해도 괜찮다고 하였다.

그녀는 배우가 되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연극영화과로 하여 배우 수업을 받았다. 무대는 어두웠다가 조명으로 빛을 집중적으로 쏘아댔기에 그녀의 눈이 적응을 하지 못하였다. 10포인트 글씨인 대본을 읽기가 힘들었다. 그즈음 그녀는 낮에 이동할 때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보행이 힘들어 일상생활에도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원인 불명의 약시라고 했다. 그때가 2013년 이었다. 약시도 시각장애에 속하지만 그 당시 의사는 시각장애라는 말을 하지 않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잡히지 않은 물체들이 많아졌다. 불안한 마음에 안과 관련 정보를 검색하여 2015년 순천향대학병원에 찾아갔다. 그 병원에서 받은 병명은 추체이양증이었다. 추체세포가 서서히 약해지는 망막질환이다. 시력이 점점 나빠진다는 말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그녀는 스피치 강사로 일하면서 초등학교 방과후교사 일을 하기 위해 면접에 합격하고 집중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현장에 투입되는 마지막 단계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시력이 0.3 이상이라는 조건에 걸려 낙방을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사정 얘기를 하자 의사 소견서를 받아 오라고 하여 간신히 통과하였다.

초등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굉장히 즐거워서 시력에 대한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비정규직이라 1년에 한 번씩 재계약을 해야 하는데 신체검사를 통과할 수 없는 상태라서 포기했다.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장애인복지 분야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장애인 등록을 권하였다.

그래서 2016년 7월, 0.2 시력으로 장애인 등록을 하였지만 그때는 시각장애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눈의 상태를 이야기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러다 2018년 가을부터 시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배우는 어떤 역할도 다 해내야 하는데 시각에 문제가 있고 나서는 회전무대나, 계단이 있는 무대 등이 무서워졌다. 무대에는 마킹이 있어 거기에 맞춰 동선이 이어지는데 그것들을 못 보니까 연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등퇴장을 할 때는 긴장을 해서 사시나무 떨듯 떨었고 오디션도 점점 안 보고 지인들 하고만 연기를 했다. 배우로서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2019년 여름, 친한 동료들과 여수에 촬영을 갔는데 햇빛이 너무 강해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이제는 정말 안 되겠다 싶어서 배우의 꿈을 접었다.

활동모습 ⓒ박정인

크리에이터가 된 여자

그녀의 유튜브 채널에는 흰지팡이의 날을 홍보하기 위한 안무를 연습하는 영상이 있다. 흰지팡이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흰지팡이의 상징인 성취와 자립을 자유롭게 몸으로써 표현하기 위해 기획한 콘텐츠이다.

‘전맹 동료가 춤추는 걸 좋아한다고 했어 요. 저도 춤추는 걸 좋아하고 흥이 많죠. 그럼 우리 흰지팡이의 날에 흰지팡이를 갖고 댄스해요.’라는 대화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시력을 잃고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으나, 흰지팡이를 따라 다시 자기 삶을 걸어가는 시각장애인의 자립 과정을 안무로 표현하기로 하였다. 이왕이면 멋있게 하고 싶어서 무용 레슨까지 받으며 열심히 연습하여 제작하였다.

‘우리 정인이’에는 1~2주에 한 편씩 영상이 올라온다. 화장을 하는 모습, 요리를 하는 모습, 활쏘기, 음반 작업, 정보전달 등 다양하다. 자신의 장애에 대해 밝게 설명을 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은 22만 조회수를 올렸다. 이 채널을 통해 다양한 시각장애인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시각장애인들이 미디어 매체에서 보여지듯 불쌍한 존재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영상 제작은 기획부터 촬영, 간단한 편집은 직접 하고 자막이나 색 보정 및 효과는 도와주는 팀원이 있다. 그런데 고맙게도 협업 제안들을 해 주었다. 예를 들면 화장품에 점자 표기를 하는 ‘이퀄베리’라는 브랜드에서 협업 제안이 왔다.

고객들이 제품 케이스의 점자 표기를 보고 시각장애인용 화장품이냐는 질문과 시각 장애인도 화장을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고 있어서 협업 콘텐츠를 통해 이 브랜드가 모두를 위한 화장품을 만드는 브랜드임을 알리고, 시각장애인이 화장을 하지 않을 거라는 편견을 깨 줄 것을 제안받고, 데일리 메이크업 영상을 만들어 시각장애인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화장을 한다는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배 핸드폰톡, 유리컵, 엽서 등을 제작 하여 판매를 하였다.

처음에는 그녀 혼자 고군분투했지만 이제는 정인이의 메시지에 공감해 주는 분들이 협업 제안을 해 주어 콘텐츠가 다양해졌다.

한 영상을 마무리하면 또 새로운 콘텐츠를 위해 주말도 없이 열심히 콘텐츠를 찾고 기획을 해야 하지만, 일상이 영상으로서 기록되어 하나의 포트폴리오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구독자는 물론 장애인 유튜버들과의 소통도 큰 기쁨 중 하나이다.

정인이는 글쓰기를 좋아하여 카카오 기반 블로그 서비스인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점자 새소식 객원 기자로도 활동 중이다.

흰지팡이댄스 브이로그. ⓒ박정인

여전히 꿈이 많은 여자

자기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 둔 곡이 있는데 아직 녹음도 못했지만 녹음을 마치면 그 곡에 대한 뮤직비디오도 만들고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완성하고 싶다며 꿈을 구체적으로 말하였다.

그녀는 토크, 음악, 글 그리고 무용이 함께하는 공연을 만들고 싶다. 정기적으로 공연할 수 있고, 창작자라는 직업이 인정받기를 원한다.

‘우리 정인이’ 채널의 중요 키워드는 삶의 주인공 되기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삶의 주인공으로 모두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꿈꾼다.

1988년생인 정인이는 벌써 34세가 되었다. 이제 시력이 많이 약화되어 지난해 봄 장애인등록이 장애가 심한 정도로 조절되었다.

현재는 근거리의 사물이나 확대 문자는 확인이 가능하지만 색상이나 사물의 섬세한 부분까지는 인식이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그녀의 꿈은 더욱 또렷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중요해요.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거는 나를 죽이는 선택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나를 살아 숨쉬게 하는 선택을 하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정인

2016 한양대 연극영화과 대학원 진학, 2016 연극 ‘GONE’ 배우, 2018 연극 ‘조난’ 배우, 2019 한강 유람선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 2020 실로암복지관 유튜브 채널 ‘시소tv’ 콘텐츠 작가, 2020 시각장애인 잡지 ‘점자새소식’ 객원기자, 2020~현재 유튜브 채널 ‘우리 정인이’ 운영, 2021 브런치 에세이 연재, 2021 배리어프리 전시 ‘다름 아니라’ 작가, 2021 에이블라인드 시각장애 디자이너 굿즈 제작 프로젝트 참여, 2021 용인문화재단 ‘청춘파티 토크콘서트’ 강연, 2021 ‘흰지팡이의 날’ 기념 안무영상 제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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