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능엔터테이너 김리후. ⓒ김리후

배우 김리후(31)는 장애등급제 폐지 전에는 2급이었다. 청각장애인 2급은 두 귀의 청력 손실이 각각 90dB이상인 경우 해당한다. 현 제도에서 장애 정도가 심한 장애인(중증)이다.

수어(手語)를 사용해 의사소통을 하지만 입모양을 보고 알아듣는 구화(口話)도 한다. 그는 한국어와 한국수어를 비롯해 7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

국립서울농학교 졸업 후 본인과 연관 깊은 농 문화 자체를 알고자 한국복지대학교 수어통역 학과에 입학했고, 서울수어전문교육원에도 다녔다.

얼굴이 알려지는 일을 하다 보니 청각장애인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게 되어 농문화나 역사, 언어(수어)를 더 전문적으로 공부하며 농문화를 변화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모델 & 영화배우

영화 속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멋져 보였다. 스크린 속에서는 여러 가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이 배우라는 꿈을 꿀 수 없을 만큼 우리 사회가 장애인에게 닫혀 있었다.

2000년대 중후반 무렵 가수 하리수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밝히고 방송활동을 시작하였고, 배우 홍석천도 커밍아웃을 하고 당당히 대중 앞에 서는 것을 보며 그도 청각장애라는 편견과 차별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게 되었다.

연기 공부를 하고 싶어 연기학원을 알아봤지만 수강료가 비쌌다. 금전적인 부담이 컸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도 청각장애인이라서 받아 주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혼자서 연기 연습을 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자주 보면서 감정이입 연습을 했다. 캐릭터 분석도 열심히 했다. 저 캐릭터는 왜 저렇게 행동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국 영화에는 자막이 없어서 자막이 있는 일본 드라마를 자주 봤는데 일본은 한국보다 농배우가 많아서 관심을 갖게 되자 자연스레 일본어를 독학했다. 자막이 있는 한국 영화가 제작 되면서 우리 영화도 많이 봤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가수 보아의 팬이었다. 보아는 발성이 탁월해 고음이 그의 귀에 들어왔 다. 그래서 <아틀란티스 소녀> 춤을 따라 췄는데 사람들이 잘 춘다고 칭찬을 하여 인터넷에 올렸다.

그 사진을 본 방송작가의 섭외로 TV 생활정보 프로그램에 ‘소년 보아’로 출연을 하였다. 방송에서 그를 직접 만난 작가는 모델을 해도 되겠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작가의 권유로 사진 모델을 하게 되었다. 피팅 모델로 제품 홍보를 위한 사진 촬영을 했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연예인을 상품이라고 비유한다면 장애가 있는 연예인은 상품에 하자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으며, 상품 가치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청각장애에도 여러 유형이 있음에도 그를 직접 만나기도 전에 본인은 수어를 모른다면서 거절하는 연예 관계자들도 많았다. 그 과정에서 귀로 듣고 음성으로 말하는 것을 강요하는 비장애인 연예 관계자들과 또 다른 하나의 문화를 상징하는 수어로 말하지 않는다면서 비난하는 농인들 사이에서 그는 많은 수난을 겪었다.

2009년 12월 김조광수 감독에게 연락을 받았다. 모델 활동 중 찍은 사진을 보았다고 했다. 미팅 후 바로 촬영 날짜를 잡았다. 믿기지 않았다. ‘저 출연하는 건가요?’ 하고 물어보니 당연하다는 듯 ‘그렇다’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2010년 데뷔작 단편영화 <사랑은 100℃>에서 청각장애인인 사춘기 소년 민수 역을 연기했다. 이후 2014년 강지숙 감독의 단편영화 <미드나잇 썬>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청각장애인 남매 중 오빠 병우 역을 맡았다. 배우 류준열 씨와 함께 출연했다.

그 후에는 일본 소속 연예인으로 계약을 했으며, 미국 측에서도 함께 오디션을 알아보던 중 코로나 사태로 활동이 잠정 중단된 상태이다.

자료사진. 영화 사랑은 100도씨. ⓒ김리후

수어뉴스 앵커 & 크리에이터

2012년부터 한국농아방송 수어뉴스를 진행하고 있다. 수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는 농인들을 위한 일이다. 대본에 따라 금방 끝날 때도 있고 오래 걸릴 때도 있다.

관용어나 사자성어 같은 어려운 말도 농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수어로 번역한다. 충분히 연습하고 암기한 후촬영한다. 국립장애인도서관 한국수어영상도서 촬영도 하고 있다. 농아동, 농청소년들을 위해 책 내용을 수어로 번안해 촬영하는 일이다. 보는 대상들의 연령대가 어리다 보니 표정 연기에 더 신경 쓰고 있다.

2019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유튜브 채널 1인방송을 시작했다. 농문화, 역사, 수어에 대한 영상을 주로 찍는다.

노래 <루돌프 사슴코>를 한국어, 영어, 일본어 가사에 맞게 수어로 표현한 영상이 가장 인기 였다. 조회수 1만 회가 넘었다. 수어가 나라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요즘 1인 방송을 많이 하는데 농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농인들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편견을 바로잡으며, 농인들에게 농학교에서도 알려 주지 않는 농문화와 역사들을 알려 주어 그들이 병리학적 존재인 청각장애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농인 이라는 자랑스러운 문화가 있는 사람임을 설명하고 있다.

국제통역 활동

한국농아청년회는 한국농아인협회 산하 단체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만 18~35세의 농청 년들이 모여 권리 보장 및 권익 향상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2019년 5대 한국농아청년회 국제 이사를 맡았다.

세계농인연맹(WFD·World Federation of the Deaf), 세계농인 연맹청년회(WFDYS·World Federation of the Deaf Youth Camp) 관련 국제 교류와 통번역을 담당했었다.

4년마다 열리는 세계농인대회(World Congress of the Deaf)가 2023년 한국에서 열리기 때문에 국내 농인들에게 국제수어를 비롯한 여러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농인올림픽인 2019 발텔리나-발치아벤나 동계 데플림픽(Deaflympics) 한국 대표팀 국제수화 통역사 자격으로 참석하여 2박 3일이 소요됐던 47회 농인스포츠국제위원회(ICSD·International Committee of Sports for the Deaf) 총회에서도 한국농아인스포츠연맹 회장단을 위해 영어 국제수화를 한국어 한국수어로 통역을 했다.

농아방송 진행 중. ⓒ김리후

가장 무서운 것은 편견

어릴 때 일반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 친구들이 떠들 때 ‘리후야, 애들한테 보청기 빌려줘. 말귀 못 알아듣네.’ 또 ‘이번 시험에서 리후보다 성적 나쁜 애들은 혼난다. 귀 안 들리는 리후도 열심히 하는데 너넨 뭐하니.’와 같은 말씀은 그에게 상처가 되었다.

배우로 활동하면서 장애를 비하하는 악플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의연하게 넘기려고 한다. 일일이 상대해가며 감정을 소비할 시간에 스스로를 챙기는 편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를 힘들게 한 건 오히려 비장애인들의 잘못된 배려였다. 상대 배우와의 감정 교환이 중요한 연기자에게 청각장애로 인한 의사소통의 제약이 힘들 거라고 생각하지만, 장애인이 장애인을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없다. 일상생활 중에 수없이 겪는 차별과 편견을 연기하기 때문에 감정 잡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오히려 표현을 더 잘한다.

제작진이 김리후 배우와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보청기를 끼도록 했는데 오히려 불편했다. “극 중 엄마가 저를 부르는데 듣지 못하는 연기를 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전 그 소리를 듣지 못해야 하는데 보청기 때문에 너무 잘 들려서 못 듣는 척 연기하기 힘들었죠. 저를 배려하겠다며 준비한 보청기지만, 결국은 비장애인들의 편리를 위했던 거죠. 어중간한 도움을 주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수는 없는 걸까요.”

그는 배우 생활을 지속할수록 답답한 마음이 커진다. 미국 할리우드에서는 ‘장애인 히어로’, ‘흑인 인어공주’가 등장하는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있는데 한국 영화계에서는 개선 의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농아청년회 국제이사 활동. ⓒ김리후

핸디캡을 강점으로 만들면

그는 주변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길을 지나갈 때 광고 문구를 보면 수어로 어떻게 잘 표현할지 고민한다. 또 뉴스를 꼭 챙겨 본다. 영어, 일본어 뉴스도 본다. 이는 더 넓은 시선을 바라볼 수 있게 됨과 동시에 한국농아방송을 진행할 때도 이미 기존 지식을 바탕으로 수어로 표현하는데 굉장히 도움이 된다. 유튜브 방송의 좋은 소재를 찾을 수도 있고, 연기 공부도 된다.

김리후는 배우로서 많은 작품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고 싶다. 장애인은 왜 마냥 착하고 불쌍하게만 묘사돼야 하는지, 장애인도 비장애인처럼 좋은 사람일 수도 있고, 정말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면 장애인도 자기와 다르지 않은 똑같은 사람이라는 자연스러운 인식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수퍼 히어로, 또는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하는 악당 연기를 하고 싶어요. 장애인이라고 못할 이유가 있나요?”

사람들에게 농인의 문화를 알리고 사회적 편견을 해소하고 싶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썼었고, 현재도 여러 작품들을 쓰고 있다. 그중 몇 시나리오는 긍정적인 검토를 거쳐 작품화를 대기 중인 상태로 계약상 먼저 밝힐 수는 없지만, 도움이 필요한 수동적인 캐릭터나 감동 장치로서의 캐릭터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 만은 확실하다.

또 농아동과 청소년이 더 큰 꿈을 꿀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 엘사와 캡틴 마블로 인해 많은 여자아이들이 여성도 하나의 인격으로서 주도적인 강인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블랙팬서로 인해 많은 흑인들이 히어로로 현실에서도 자리잡은 것처럼 본인의 존재 자체를 더 널리 알려 농인들에게 긍정적인 꿈과 희망 그리고 자신감을 갖게 해 주고 싶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시작하기 전에 픽션임을 알리는 안내문을 따로 내보내는 것처럼 대중매체의 영향력은 정말 엄청나다. 그렇기에 보다 더 많은 의사 표현을 자유롭게 연기하는 농인이나 장애인들의 모습이 많이 방영됐으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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