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미(organ)

군산에 강의를 갔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꼬맹이 둘을 뒷자리에 태웠다. 아이들이 조용히 있다가 정지 신호에 차를 잠시 세워놨을 때 내게 스마트폰을 보여줬다. 스마트폰에 앙증맞은 글자체를 골라 문자를 찍어서 보여준다.

"선생님 운전 잘하시네요. 호호. 그리고 차도 좋아요."

"그래! 다행이구나 고마워!"

"태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앞에 슈퍼 앞에 내려주세요!"

"응, 샘이 너희 교실에 모자를 두고 왔으니 얼른 올라가서 모자 좀 갖다 줘!"

그리고 아이들이 모자를 가져올 동안 슈퍼마켓에서 아이들이 먹을 아이스크림을 15개 사서 나눠줬다. 볕이 따갑지 않고 따스하다. 참 센스가 있는 꼬맹이들이었다. 내가 잘 못 듣는다는 것을 알고, 교실에서는 내 얼굴을 보고 곧잘 말하던 아이들이 차를 타서는 나를 배려해서 문자로 말을 건넨 것이다.

운전경력 14년이지만 카풀이 난처할 때

꽤 오래 전부터 카풀을 했던 나. 사람들은 청각장애인이 운전하는 차에 탔다는 이유로 불안해 하기도 하는 듯하다. ⓒ강인규

새삼 얼마 전에 카풀을 해주다가 식겁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강의를 하거나 또는 어르신들과 회식하다 보면 종종 사람들을 태우게 된다. 어르신들은 어디 어디 내려달라고 미리 말하게 해서 그 장소로 향해 운전대를 잡는다.

그러나 갑자기 생각이 난 듯 큰 시장 입구나 또는 한 정거장이라도 더 빨리 내리는 게 나한테 도움이 되는 줄 알고 갑자기 버스정류소에 세워달라고 할 때가 많다. 그럴 때 나는 급정거해서 뒤에 오던 차와 접촉 사고가 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던지라 그냥 차를 세울 만한 안전한 곳으로 계속 간다. 그런데 내가 세워달라는 것을 모르는 줄 알고 운전하던 내 팔을 치기도 하는 분도 있어 식겁하기도 했다.

또 다른 경우도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손님이 있었는데, 내 차가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차라 그 손님을 터미널까지 배웅하게 됐다. 그런데 그분은 소리를 못 듣는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타서 그런지 조금은 불안해 하셨던 것 같다.

그분은 조수석에 타자마자 창문 위 오른쪽 손잡이를 계속 잡고 계셨다. 그리고 커브를 돌 때도 경직된 모습이었다. 보통 누군가 내 차를 탈 때 그 사람의 소리를 잘 못 듣더라도 웃기는 소리를 잘 하는 편인데 그 손님하고 갈 때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손님이 돌아가서 며칠 후 메일을 주셨다.

"선생님의 운전이 불안한 것이 아니라 미리 겁을 집어 먹은 제 마음이 저를 흔들었어요."

어떤 분은 내가 못 듣는다고 해서 정말 내려야 할 정확한 곳을 알려주지 못하고 침묵하다가 엉뚱한 곳에 내리기도 한다. 나를 위해 침묵한 그 배려가 이해되긴 했지만, 그래도 차를 잠시 세울 때, 또는 메모지를 통해서라도 하차하는 장소를 정확히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 청각장애 운전자에게 도움이 된다.

장애인에게 의사표현 하지 않는 것은 '배제'와 같다

못 듣는다고 해서 음식 주문할 때 아예 물어보지 않거나, 장소를 말 못 해준다는 것은 청각장애인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소외 혹은 배제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번거롭더라도 하나하나 물어봐서 조금 느리고 불편해도 함께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면 좋겠다.

딸들이나 또는 문하생들, 또는 일하는 직원들들은 내 차를 아주 편하게 탄다. 출장을 갈 때나 여행을 갈 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수시로 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나는 아주 흐뭇하다. 내게 목숨을 편안히 맡기고 잠자는 모습은 나의 자존감과 책임감을 끌어 올려주기 때문이다.

반면, 다시는 카풀하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다. 내 차를 타자마자 음악을, 그것도 아주 크게 틀어놓는 경우다. 내가 소리를 못 들으니 소리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이 채널 저 채널 돌리거나 갖고 있는 음향기기의 소리를 크게 틀어놓는 경우가 바로 그것.

내 취미가 온몸의 모든 감각의 미세한 오감을 활용한 음악감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또는 내가 청기관장애가 아니라 청신경장애라 아주 작은 소리나 진동에도 온몸의 신경이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청각장애라고 하면 그냥 못 듣는다는 한마디로 일방적 이해를 해버리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

같은 청각장애인들 사이에도 이런 불이해는 존재한다. 말조차 못하는 언어장애가 수반된 청각장애인의 경우는 농아인이라고 부르지만, 말은 어느 정도 하는데 듣는 게 어려운 사람들은 외국에서 난청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청각장애인이 농아인이고, 농아인이 청각장애인이고, 난청은 노화로 인한 난청까지 포함해 장애인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카풀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면 세상 경험 많은 오라버니들과 언니가 누누이 그러지 말라고 한다. 50대인 지금은 누군가를 태우지 않고 혼자 타는 경우가 더 많다. 세상살이에 닳고 닳아 많이 지친 탓일까. 한때 차가 주인을 잘못 만났다며 불쌍해하던 카센터 사장은 이제 더 이상 그 말을 하지 않는다. 세상살이에 익숙해서 처세가 성숙된 탓일까.

그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물 흐르는 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60대가 되면 차를 운전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차 없는 거리를 씽씽 달리는 멋진 황혼 소녀가 되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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