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된 아파트 단지 내 시각장애인복지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점자블록이 사라졌다.ⓒ동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 유튜브 캡쳐

“건물이 화려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안에 사는 주민이 자기 집도 찾아갈 수 없다면 개발이라는 것이 껍데기만 갈아 치운 전시행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

지난해 2월 재건축 조합원 자격으로 서울 강동구 A아파트에 입주한 전맹 시각장애인 조영관 씨(65세, 남). 입주 2개월전인 1월 중순, 사전점검을 위해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던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재건축 시행 이전 주공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인근 시각장애인복지관으로 가는 길목의 점자블록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아파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중앙로는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통로며, 복지관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중도 시각장애인인 조 씨는 20여 년 동안 이 점자블록을 따라 아파트 단지를 자유롭게 왕래하고, 해당 복지관을 이용해왔다. 이 복지관은 특히 서울에서 유일하게 수영장이 존재해 서울지역에 사는 시각장애인이 많이 이용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점자블록이 사라진 지금, 시각장애인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거나, 아파트를 빙 돌아 평소보다 3배 이상의 거리를 흰 지팡이에 의지해 가야 한다.

“4000세대가 넘는 넓은 광장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어떤 이정표도 없었습니다. 사막에 홀로 선 느낌이었습니다. 방향을 잡을 수 없습니다. 위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집을 찾아갈 수도 없습니다. ”

서울 강동구 재건축 아파트에 입주한 전맹 시각장애인 조영관 씨(65세, 남)는 아파트 내 인근 시각장애인복지관으로 가는 길목의 점자블록을 없앤 것은 ‘보행권 침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었다.ⓒ에이블뉴스

이 아파트 재건축조합원인 조 씨는 이를 우려해 2019년경 주택재건축정비사업조합에 아파트를 지으면 시각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게 점자블록을 설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알겠다’는 말만 철썩같이 믿었다.

하지만 완공된 후 확인해본 결과,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등편의법)에 명확히 제시된 승강기 앞이나 아파트 진입 앞에만 정사각형의 점자블록이 있을 뿐, 정작 그가 매일 같이 이용하는 복지관으로 가는 길에는 점자블록이 없었다.

조 씨는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면서 지난해 초 강동구청에 민원을 제기했지만, ‘사유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해왔다고 토로했다.

그는 “사유지에 점자블록을 설치한 전례가 없다고 한다. 그런 게 없더라도 시각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실망스럽다”면서 “입주 후 6개월 동안 집을 찾지 못해 방황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장애인들의 편의시설이 보장되지 않으면 얼마나 고충을 겪게 되는 사실을, 공무원 사회에서는 잘 모를 것 같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동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은 23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블록을 없앤 아파트 관련자 등을 상대로 차별 진정을 제기했다.ⓒ에이블뉴스

이에 조 씨는 23일 동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과 함께 국가인권위원회에 해당 주택조합, 건설사, 구청을 상대로 차별 진정을 제기했다.

조 씨 등은 진정을 통해 아파트 단지 내 시각장애인복지관으로 가는 길에 점자블록 설치와 사유지라도 복지관 등 공공성을 띤 장소로 통하는 경로에 편의시설 설치가 가능하도록 법적 근거 마련 등을 요구했다.

이 복지관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시각장애인 장길수 씨(75세, 남)는 “점자블록이 사라져서 다른 상가에 들어가서 헤맬 때가 있다”면서 “시각장애인에게 점자블록이 없으면 눈이 없는 것과 같다”면서 점자블록이 다시 설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은 23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블록을 없앤 아파트 관련자 등을 상대로 차별진정을 제기했다.ⓒ에이블뉴스

동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 오병철 소장도 “아무리 아파트 내 길이라고 해도 시각장애인이 많이 이용하면 공공용도가 아니냐. 사유지라는 이유로 아무런 대책이나 노력을 하고 있지 않다”고 분노하며, “복지관도 힘이 없고, 시각장애인도 힘이 없다. 점자블록 하나 없는 시대에 사는 것이 마음 아프다”고 말했다.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 김철환 활동가는 “편의증진법 부분에서만 본다면 기각될 우려가 있지만, 이동권 측면에서 보면, 해당 건설사에 점자블록을 설치하라는 권고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면서 “이 사례를 통해 법에 관련 규정이 없더라도 시각장애인들이 거주하는 공간에 반드시 점자블록은 물론 편의시설이 설치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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