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은 선진화 잣대, 후퇴하지 말아야

-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7주년에 즈음하여 -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민의 인권보호와 증진을 위해 탄생한 국가인권위원회가 7번째 생일을 맞았습니다.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으로 불리는 세계인권선언 60주년에 찾아온 생일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뜻 깊게 다가옵니다.

7년 전 오늘 국가인권위원회는 국민적 기대를 품고 역사적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직원을 단 한 명도 뽑지 못한 채 문을 열던 날, 인권위원들은 직접 진정접수 창구에 앉아 몰려오는 국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으며 “세금이 아깝지 않은 국가기관을 만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독립적 국가인권기구의 초석을 다졌던 김창국 위원장님, 시민사회와의 활발한 소통으로 인권의 지평을 넓혔던 최영도 위원장님, 조직의 내실을 다지고 국민 속으로 더 가까이 다가서고자 노력했던 조영황 위원장님, 그리고 인권보호라는 숭고한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열정을 불태웠던 전현직 인권위원님들과 사무처 가족 모두의 의지 덕분에 우리 사회는 인권의 불모지에서 점차 인권이 숨쉬는 땅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7년 세월을 돌아보며 우리는 또한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민이 부여한 시대적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과제를 실천하면서 치우침이나 모자람은 없었는지, 그리고 진정 보호받아야 할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 소수자의 관점에서 인권감수성을 구현하는데 소홀하지 않았는지, 일곱 살 생일을 맞은 지금, 우리는 7년 여정의 부족함과 아쉬움을 떠올리며 그간 국민 여러분이 보내주신 질책과 충고를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지난 7년 사이 국내외적으로 인권의 중요성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국내적으로 인권은 이제 가벼이 넘길 수 없는 가치판단의 잣대로 등장했습니다. 그 결과 국가기관은 정책과 제도를 결정하는 과정에 인권적 요소를 고려하기 시작했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속적인 권고와 조사를 통해 인권침해 및 차별행위의 관행들이 속속 시정되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 수용률이 90%에 달하고 있는 점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일 것입니다. 또한 국제사회에서는 유엔 인권이사회가 새롭게 출범해 세계 각 국의 인권상황을 직접 모니터링하기 시작했고, 국제인권조약에 대한 국내적 이행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했습니다. 최근 들어 국내적 인권상황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이 민감해지고 있는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권은 이제 인류 보편의 원칙이 되고 있습니다. 과거엔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국력의 징표였다면, 이제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와 인권 보호 수준이 국가의 품격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 지난 7월 한국을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경제규모에 부응하는 ODA(정부개발원조) 확대와 이주노동자에 대한 적극적 보호조치를 특별히 강조하며 국제사회의 당부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 역행하는 기류도 잇따라 감지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국제사회의 다문화 인권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울 가이드라인’이라는 중요한 합의를 이끌어 내던 순간, 경기도 마석에서는 매우 위험한 이주노동자 집중 단속이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다문화 사회는 단순히 국제결혼 증가나 한국문화 전파와 등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더불어 이주민과의 인권친화적 공생을 도모할 수 있을 때, 다문화 사회는 그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집회시위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 경제상황 악화에 따른 빈곤층 확대와 사회복지의 축소, 아동 및 여성에 국제인권기구의 우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 사회는 인권 개념을 더욱 확대해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떠안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인권침해 논란이 빚어질 때마다 법치에 대한 논리가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민주사회에서 법치와 인권은 어느 것이 우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자전거의 앞뒤 바퀴처럼 함께 달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치를 내세우면서 인권을 후순위로 미루는 것은 민주적 사회 발전에 역행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우리 사회의 인권침해 문제나 차별행위에 대해 쓴 소리를 내놓을 때마다 한쪽에서는 성원을, 다른 쪽에서는 불만을 표하곤 합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의 결정이 편향됐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분들은 결정이 미진하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는 법이 정한 권한과 인류 보편의 인권 기준에 따라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를 독립기관으로 설치하도록 명시한 유엔의 파리원칙도 기존 국가기관과 다른 측면에서 ‘쓴 소리’를 하도록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일 것입니다.

우리 나이로 일곱 살이면 가정의 품을 벗어나 학교라는 새로운 무대와 만나는 시기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설립 10주년을 바라보며 내․외부 인권전문가들과의 장시간 논의를 거쳐 3개년간의 마스터플랜인 ‘2009-2011 인권증진행동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 과정에서 인권의 국제화와 선진화를 핵심 과제로 설정했습니다. 이는 인권 향상이 우리 사회의 국제적 품격을 높일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인권은 선진화의 잣대라는 점에서 결코 후퇴할 수 없는 시대정신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2011년, 국가인권위원회 출범 10주년이 되는 해에, 대한민국이 경제에 이어 인권에서도 선진국의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불과 반세기만에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달성한 보기 드문 국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행동에 착수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국가인권위원회는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국제인권기준의 국내적 이행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인권 관련 정부기관들이 그간 우리 위원회가 권고한 결정들을 존중해 우리 사회의 인권 지수를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끝으로 오늘의 국가인권위원회가 있기까지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태주신 입법, 행정, 사법기관 관계자 여러분과, 우리의 활동에 격려와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인권시민단체와 언론기관, 그리고 인권 담당 공무원으로서의 초심을 굳건히 지켜온 사무처 가족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08년 11월 24일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안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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