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가 휠체어 생활을 하기 때문에 집으로 진입하는 턱을 모두 없애야 했다. ⓒ박정혁

에이블뉴스는 장애인시설의 비리 운영과 인권 침해 문제가 사회적으로 고발된 이후에 주목한다. 비리 시설에서 살아왔던 장애인들이 지역사회로 나가지 못하고 또 다른 시설로 전원 조치되고 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은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시설에서 나오거나, 집에서 독립하려면 가장 먼저 살 곳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교육과 노동에서 배제된 장애인들에게 거액의 주택 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이는 현실성 있는 장애인 주택정책이 없기 때문이다. 에이블뉴스는 제28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 주거권 실현을 위한 실질적인 대안을 모색해 보는 특집을 진행한다.

[내집 마련 수난기]②서울 동대문구 제기1동 박정혁씨

장애인에게 주거는 참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 중 하나다. 내게 있어서도 주거문제는 절실했다. 나는 강원도 철원의 한 장애인생활시설에서 7년간 시설 생활을 했었다. 들어간 계기와 나오게 된 계기는 이 원고의 본질이 아니라 건너뛰겠으니 이해 바란다. 장애인이, 특히 중증의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일정한 거처를 구하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산다는 것은 참 어렵고 힘든 일이다.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 체험홈으로

나 역시 그랬다. 2003년 시설을 퇴소해 처음 간 곳은 P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운영하는 ‘자립생활 체험홈’이었다. 자립생활 체험홈은 쉽게 말해 장애로 인해 지역사회 속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거나 부족한 장애인들이 지역사회를 경험하고 여러 가지 제도(일테면 복지제도 같은)들을 이용해 혼자 사는 법을 교육하고 주거를 임시로 제공하는 공간이다. 당시 내가 머물던 체험홈은 밤에는 바퀴벌레가 나올 정도로 비위생적이고 누추한 곳이었지만 그곳에는 장애인생활시설에서 맛볼 수 없는 자유가 있었다.

자고 싶을 때 내 맘대로 잘 수 있는 자유요, 나가거나 들어오고 싶을 때 아무런 걸림돌이 없는 자유가 그곳에는 있었다. 물론 영원한 거주를 보장받지 못한다. 3개월이건 1년이건 그 기간 동안 자신이 살 거처를 무슨 수를 써서건 구해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자신의 안식처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아니 너무나 힘들고 어렵다. 그 뿐만 아니라 심한 수치감을 느끼기도 한다.

시설에서 아내도 빼내 자립생활 도전

우리도 매우 힘들게 우리 집을 구했다. 우리는 시설에서 만났다. 그리고 이미 시설에서 사귀면서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였다. 그녀는 내가 2003년 퇴소 1년 뒤, 당시 내가 활동하던 P자립생활센터의 도움으로 빼내 올 수 있었다. 아내 또한 P센터 자립생활 체험홈에 입소했다. P센터는 당시 여성 자립생활 체험홈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아내가 체험홈 입소 전부터 알려진 터라 우리의 자립생활 계획도 우리의 결혼을 전제로 진행되었다.

아내의 체험홈 입소 기간도 역시 3개월이었다. 나는 아내가 나오기 전부터 매달 10만원씩 저축을 했고 영구임대아파트도 신청했었다. 하지만 영구임대는 내가 단독이라서 몇 년은 걸려야 나오고 순위도 많이 밀렸다. 그동안 나는 센터에서 활동했고 아내는 자립생활 교육과 자립 계획을 세우며 3개월을 보냈다.

집주인들이 우리 모습 보고는 돌아서

마침내 3개월이 지났다. 우리는 함께 살기 위하여 집을 구해야 했다. 우리는 우선 센터 소장님과 함께 계획을 세웠다. 동대문구청을 통해서 전세자금 융자를 얻기로 했다. 당시 최고5,000만원까지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집을 먼저 구해야 한다. 집주인의 보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구하기 위해 서울 시내 곳곳을 몇날 며칠 돌아다녀야 했다. 그런데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집이 괜찮으면 돈이 안 되고 집도 괜찮고 돈이 되도 집주인들이 우리 모습을 보고는 돌아서 버리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아내는 엄청난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 한 달 동안 그렇게 돌아다녔지만 집을 구할 수 없었다. 7월 중순의 한여름 뙤약볕이 우리를 지치게 했다.

어느 날 우리 모두 체험홈에 모여 낙담하고 있을 때, 평소 잘 아는 장애인 콜택시 기사분이 체험홈 앞을 걸어서 지나가다 우리들을 보시고는 불쑥 들어오셨다. 그분은 체험홈이 있는 동대문구에서 10년 넘게 사신 토박이셨다. 평소 우리들을 이해해 주시고 아낌없이 조언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분이라 그분에게 우리가 지금 우리가 결혼해서 살 집을 구하고 있는데 잘 안 구해진다고 우리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분이 대뜸 “우리 집에 들어와 같이 살아!” 하시는 것 아닌가?

집을 찾았으나 은행 융자 받느라 진땀

그분의 집은 체험홈 바로 뒷집이었다. 2층 다세대 건물로 2층에는 아저씨 내외분이 사시고 아래층은 빈 문구점이었는데, 우리가 살 곳은 그 문구점이었다. 다음 날로 우리는 집 구경을 했는데 우리가 살려면 개조가 많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마침 그때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장애인 주택개조 지원 사업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받기 위해 지원을 했다. 주인아저씨는 우리에게 전세보증금으로 2,000만원을 요구하셨고 우리는 그 금액에 맞춰서 저소득층 전세자금융자를 신청하려 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나와 아내 모두 국가기초생활보장법 상 수급자여서 해당은 되었지만 나는 나이가 35세가 안 돼서, 아내는 거주기간(서울)이 짧아서 단독 신청이 불가능했다.

방법은 혼인신고였다. 어차피 결혼할 사이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아내의 동의를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아내는 시설에서 보모 잘못으로 골반 뼈가 빠져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그 사이 혼인 신고서를 첨부해 전세자금융자를 신청했다. 며칠 뒤 구청으로부터 융자신청이 받아들여졌고 그 길로 나는 들뜬 기분으로 은행으로 갔다. 그러나 은행에서 전세자금융자가 거절당했다. 이유는 계약한 집이 문제였다. 건물은 분명 집주인 소유였으나 땅은 시의 소유였다. 바로 이점이 문제였다. 나로선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이 일이 해결 안 되면 결혼은커녕 아내를 도로 시설로 보내야 할지 모르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무조건 돌파해야 했다.

다음 날 난 혼자 전동휠체어를 타고 전세자금융자를 담당하는 다른 은행을 찾아갔다. 무모하게 쳐들어갔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접근권도 안 되는 은행을 기어코 쳐들어가 다짜고짜 융자해 달라고 떼를 썼다. 은행직원들은 나의 행동에 무척 당황해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집회에서도 싸우지 않던 투쟁을 거기서 한 것이다. 은행직원들은 쩔쩔매며 최선을 다해 받도록 해주겠다며 나를 달랬다. 거의 4시간 가까이 그곳에서 투쟁했다. 마침내 신청서를 그 은행에 접수시켰고 며칠 뒤 천만 원을 받아냈다. 주인아저씨와는 1,500만원에 월 10만원씩 주기로 하고 집 계약을 마쳤다. 500만원은 내가 1년 동안 저축한 100만원과 아내가 200만원을 만들었고 나머지 200만원은 기도의 힘으로 얻어냈다. 뭐냐면 우리의 사정을 인터넷 상에 알려 모금한 금액이었다.

휠체어 생활 가능하도록 전면 개조

이제 집수리만 남았다. 내 활동보조를 하던 형님의 소개로 인테리어를 하시는 교회 집사님을 알게 되었고 그 집사님이 우리 집의 주택개조를 맡아주셨다. 문구점 자리여서 손을 많이 봐야했다. 우선 겉에 유리문을 없애고 벽돌로 벽을 만들고 문을 달았다. 문은 여닫이 문이었다. 우리가 쉽게 열 수 있게 하기 위한 집사님의 자상한 배려였지만 우리 스스로가 하기 힘들었고 문을 쉽게 잠글 수 없어서 나중에는 미닫이문으로 바꿨다. 또 입구에 시멘트로 경사로를 깔아 휠체어로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했고 방 안쪽 벽을 모두 터서 원룸형태의 구조로 바꿨다. 이는 우리 둘 모두 휠체어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화장실 또한 휠체어 진입이 가능하도록 하기위해 낮은 바닥을 시멘트를 부어 방 높이와 맞췄고 변기 높이 1/3을 묻어 내 장애에 맞게 낮췄다. 이로서 아늑한 우리 집이 완성되었다. 총 공사비는 200만원, 우리는 2004년 12월 13일 그렇게나 꿈에 그리던 포근한 보금자리로 입주했다.

지금 나는 아늑한 우리 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우리 집에서 자유를 느끼며 살고 있다. 그리고 많은 장애인들이 우리 부부처럼 자유를 원한다. 또 지역사회 속에서 한사람의 시민으로 권리를 행사하며 살고 싶어 한다. 그 출발점이 주거다. 주거가 자유롭지 못하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장애인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지역사회에 장애인들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주거공간을 확보하고 분배하는 것이 480만 장애인들이 진정 원하는 삶일 것이다.

많은 장애인들이 우리 부부처럼 자유를 원하고 있다. 지역사회 속에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 권리를 행사하면 살고 싶어한다. ⓒ박정혁

*이 글을 보내주신 박정혁(38·뇌병변장애 1급)씨는 한국사회당 장애인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에이블뉴스와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는 제28회 장애인의 날 특집으로 ‘나의 내 집 마련 수난기’를 공모하고 있습니다. 원고료 10만원. ablenews@abl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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