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차례에 참석해야 하는 장애인 가정에서는 한바탕의 전쟁이 치러질 것이다. 우리 집도 친척들이 다 모이는 설날이 되면 나는 붙박이처럼 앉아있었고 지적장애 조카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이리 저리 뛰어다녔다.

사람들은 자기 아이에게 피해를 줄까봐 경계했고 엄마는 얼굴이 벌게져있었다. 언니는 체념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부엌에서 일만 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 누구도 장애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편치 않은 시간을 보냈다.

외손녀의 장애

큰 언니가 결혼을 해서 부산에 살게 됐다. 언니는 첫째 아이를 딸을 낳았다. 둘째는 아들이기를 기대했지만 또 딸이 태어났다. 형부가 둘째를 순산했다는 소식을 전화로 알려줬다.

“딸이면 어떤가. 요즘은 딸이 더 좋아. 아들은 장가가면 아무 소용 없어요”라고 위로를 해주었는데 형부는 의외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체중 미달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장애의 멍에가 될 줄 몰랐다. 엄마는 장애인 딸 때문에 언니 산후조리를 해주러 부산에 내려갈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기 상태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보통 아기들보다 작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언니도 둘째 아기가 생기고는 친정나들이를 못했다. 지금부터 26년 전이니 자동차도 없었고

약한 아기를 데리고 고속버스를 탈 수도 없었기에 맨날 전화로만 걱정을 늘어놓곤 했다.

내가 둘째 조카 민아를 처음 본 것은 두 돌이 지나서였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서 진단을 받기 위해 2년 만에 친정나들이를 했다. 민아를 처음 본 순간 보통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언니는 미숙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저 모든 발달이 늦되는 아이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도 처음 보는 외손녀를 낯설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의 침묵은 곧 장애에 대한 예견이었다. 서울대학병원,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소뇌증으로 인한 지적장애였다. 지적장애가 우리 집안의 일이 되리라곤 아무도 정말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녀의 눈물

진단을 받고 나서 엄마와 언니는 한참을 울었다. 언니는 어린 딸이 불쌍해서 울었고 엄마는 딸에게 장애라는 짐이 대물림된 사실이 한스러워서 울었다. 형제가 장애인인 가정도 있지만 이렇게 대가 물려지는 경우도 있다. 엄마는 외손녀의 장애를 더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다.

장애의 아픔이 있는 집안에 또 다시 장애가 찾아오는 것을 보면 장애는 정말 염치도 없는 불청객이다.

엄마는 딸의 장애는 부끄러워하시지 않았지만 외손녀의 장애는 부끄러워하셨다. 사람들이 “얘는 누구예요?” 라고 물으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손주 자랑이 취미인 분인데 자랑할 것이 없는 손녀라 엄마는 입을 함봉하고 말았다.

아마 나에게 장애가 없었다면 외손녀의 장애를 더 감싸주셨을 텐데 엄마는 내가 보기 민망할 정도로 민아를 따뜻하게 대하지 않으셨다.

엄마 때문에 언니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몰래 울고 나올 정도로 엄마는 외손녀를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먹을 것을 잘 챙겨주시는 걸 보면 외손녀에 대한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였다.

모녀는 장애인 부모

엄마와 언니가 마주 앉으면 하는 얘기는 자신들이 죽으면 아이를 누가 돌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면 언니는 “엄마는 뭐가 걱정이야. 귀희는 똑똑해서 제 밥벌이 하는데 내가 문제지. 우리 민아는 나 없으면 당장 거지돼. 누가 나처럼 씻기고 먹이고 그러겠어”라며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았다.

난 모녀가 장애인 부모로 살고 있는 것이 정말 보기 싫었다. 그래서 그런 소릴 하고 있으면 핀잔을 줬다. 장애인 부모로 살고 있는 엄마와 언니를 보면서 난 내 장애 지체장애에다 지적장애까지 보태졌다. 난 중복장애로 살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장애인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다. 나는 두 몫의 장애인 당사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장애보다 지적장애에 관심이 더 많다. 왜냐하면 지체장애는 자신의 의지로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지만 지적장애는 본인이 어찌할 수 없기에 오롯이 가족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적장애인이 집안에 있으면 가족 전체가 잠시도 장애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지적장애는 본인과 함께 가족 전체가 같은 장애를 갖게 되는 심각한 장애이다. 나는 이 심각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늘 고민하고 있다.

고백

그동안 나는 지적장애 조카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너무나 가슴 아픈 가족사여서 말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집안에 장애가 대물림 된 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셨던 어머니가 이 세상에 안계시고 이제 조카들도 다 커서 그런 문제로 상처를 받지 않을 만큼 성장했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늘 마음 졸이면 사셨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멍에를 지고 살고 있는 언니네 식구들을 보면서 장애인 가정이 멍들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누구보다 피부로 느끼고 있다.

장애인 문제는 당사자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족 전체의 문제이다. 따라서 장애인 문제를 소수자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제 장애인 문제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공론화돼야 한다.

내가 지적장애 조카를 공개하는 것도 바로 장애인 문제가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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