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일 저녁과 주말을 이용해 세 곳의 모임을 활발히 오가는 중이다. A 모임은 지체, 뇌병변, 시각, 발달장애 등 다양한 장애유형을 가진 사람이 모였다. 2015년부터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올해 초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시작한 B 모임은 총무가 없다. 소규모로 운영되다 보니 따로 정하지 않았다. 발달장애인만으로 구성된 모임인 C에서는 총무를 맡고 있다. 회원들의 의견을 받아 모임 할 장소 알아보고 모임 전 날 회원들에게 연락하고 회비를 관리하는 일 등을 하고 있다.

A와 B모임에서 의견을 물으면 '나는 뭐든 좋아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요.'라고 한다. 혹여라도 나서면 '그럼 네가 한번 추진해 볼래?'라는 이야기를 들을 것 같았다. B 모임에서 회비 카드로 결제 맡아볼 사람, 인터넷 예약해볼 사람은 물론 사진 찍어볼 사람에도 나는 손을 번쩍! 번쩍! 하고 들지 않았다.

무언가를 맡아서 하는 게 부담스럽고 귀찮았다. A모임은 회원이 많아서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잘 돌아갔다. B모임도 A 모임과 마찬가지로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잘 굴려가 주기를 바랐다. 카드결제 맡아 줄 사람을 찾을 때 나를 쳐다보는듯한 B 모임 제안자의 눈길이 느껴졌다. 제안자와 눈을 맞추지 않으려 요리조리 피해보았지만 회원수가 워낙 적다 보니 나도 울며 겨자 먹기로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할 일도 많고 숫자만 보면 머리가 아픈데 모임 회비 카드를 가지고 있으려니 부담감이 100배로 치솟아 올랐다. 워낙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려 하다 보니 2015년부터 참여했던 B 모임에서는 7년 내내 회원 역할만 꿋꿋이 맡고 있다.

이렇게 다 차려놓은 밥상에 자꾸 숟가락만 얹으려다 보니 부작용이 있었다. 올해 4월부터 어쩌다 보니 총무를 맡게 된 C 모임에서 새로운 일에 도전을 망설이게 되었다. A 모임에서는 강사님을 모시고 꽃꽂이와 비누 만들기를 했다. B모임에서는 기차 타고 춘천까지 가봤다. 롯데타워에 올라갈 계획도 세우기도 하고 가을에는 한복을 빌려 입고 경복궁에서 인생 사진도 건지기로 했다. 나 혼자 알아보지 않아도 된다는 책임감을 덜어서인지 모든 활동에 오케이를 외쳤다.

반면 C모임에서는 지난 4월부터 7월까지 영화 보고 박람회 구경 가고 카페 가고 밥 먹는 활동만 했다. 내가 다른 모임에서 그러하듯 C 모임 회원들도 총무만 바라보는 듯하다. 회원들이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지 않아 총무인 내가 많이 해본 익숙한 일만 제안하다 보니 모임에서 하는 활동들이 단조로워지지 않았나 조심 스래 추측해본다.

A와 B 모임에서처럼 소극적으로 임한다면 앞으로도 매번 하던 재미없는 일만 하게 될 것이다. 나만 적극적으로 임한다고 모임이 굴려가지 않을 테니 회원들에게도 의견을 내게 할 방법을 찾고 있다. '다음 달엔 어떤 활동을 할까요?' '어디를 갈까요?'라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들려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활동과 갈 수 있는 장소를 여러 개 찾아 그중에 고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한번 생각해봐야겠다. C모임에선 총무인 내가 책임지고 장소를 알아봐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지만 모임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겠다.

얼마 전 C 모임 회원이 나에게 물었다. "몇 시에 모여요?" 나는 되물었다. "우리 몇 시에 모일까요?"

"오전 10시가 좋을 것 같아요."

오에! 내 뜻대로 하겠다던 회원의 의견을 얻어냈다. 진작 이런 대화방식을 취할 걸 그랬나 보다. 어떤 활동을 할지, 어디에서 모일지, 몇 시에 모일지 아무도 자신의 생각을 내놓지 못하고 내 의견만 따른 건 마냥 좋아서가 아니었다. 대화방식이 조금 잘못되어서였다. 나는 항상 '오전 10시에 모이는 거 어때요?'라고 물었다. 총무가 그렇게 물으니 회원은 "네 좋아요."라는 대답밖에 못했을 거다. 답정너 같다는 느낌에 다른 방법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의사소통 방식만 조금 고려해준다면 발달장애인인 우리도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더 나아가 무언가를 이룰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남들 따라가는 게 편하다고 멍하니 있으면 안 된다. 말이 어려우면 글로, 글이 어려우면 그림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야 발달장애인 의견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C 모임 회원들이 부담스럽고, 귀찮다는 이유로 나처럼 다른 사람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발달장애인은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낙인찍힐 수도 있다. 나도 잘 안 하려 들면서 남들에게는 등 떠밀려하다니 이런, 상 꼰대가 따로 없다.

다행스러운 점은 발달장애인도 생각이 있고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주는 사람들과 단체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발달장애인이 자기 결정을 잘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다.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쉬운 자료를 제공하고 조력도 해 준다. 환경만 뒷받침된다면 발달장애인도 모임에서 얼마든지 의견을 낼 수 있고 역할 하나쯤은 가져갈 수 있다.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 의견대로 따라가려는 나 같은 발달장애인을 만난다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떠안기 부담스러워서 잘 나서지 않는 거라는 걸 알아줄 날도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하는 얌치 없는 상상 한번 품어본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김유리 칼럼니스트 평범한 직장인이다. 어릴 때부터 글을 꾸준히 써왔다. 꼬꼬마시절에는 발달장애를 가진 ‘나’를 놀리고 괴롭히던 사람들을 증오하기 위해 글을 썼다. 지금은 그런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발달장애 당사자로 살아가는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자 한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