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연 집회에 대한 이준석 대표의 비난. ⓒ한겨레 신문 캡쳐

최근 발달장애인 부모 또는 가족이 잇달아 목숨을 끊는 일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지난 5월 40대 여성이 발달장애 아들과 함께 목숨을 끊었고, 인천 연수구에서는 60대 여성이 중증장애 자녀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이에 국회 여야 의원 170여 명이 “발달장애 참사 대책마련을 위한 촉구 결의안”과 “발달장애인 참사 대책 특별위원회 구성결의안”을 발의하였으며, 장애인부모연대 등은 결의안의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올해 3월부터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장애인 이동권 보장, 장애 권리 예산 확보 등을 요구하며 지하철 선전전 등의 집회를 출근시간에 진행하여 이슈가 되었다.

전장연의 집회에 대해 여당인 국민의 힘의 이준석 대표가 비문명이라고 비판을 하면서 시작된 논쟁은 장애인의 권리 보장을 위해 당연한 행동이라는 입장과 민폐를 끼치는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입장으로 갈리며 전 국민적인 논쟁 주제가 되었다.

전장연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장애인권리예산 확보에 대한 답을 요구했으나 답변을 듣지 못했고, 이에 대해 답변 촉구를 투쟁을 통해 보여주었고, 반면에 이준석 대표는 시민의 발목을 잡는 비문명적 행위라며 비난하였고, 그 비난에 동조하는 시민들이 늘어나면서 이준석 대표와 전장연 박경석 대표의 TV토론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과는 달리 TV 드라마 속의 장애인의 삶은 평화롭기만 하다. TVN의 우리들의 블루스”(블루스)에 정은혜 작가가 장애인 당사자로서 출연한 데 이어 ENA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우영우)는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인 변호사 우영우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블루스와 우영우를 시청하며 정은혜 작가와 극중 인물인 우영우 변호사에게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있다. 전장연의 집회에 대해서는 여전히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지만 블루스의 정은혜 작가와 우영우의 우영우 변호사에 대해서는 비난의 목소리는 거의 없다.

이러한 온도 차이의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정은혜 작가와 우영우 변호사에게는 박수와 응원을 보내면서 전장연의 집회에 대해서는 비난을 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 우영우는 무해하고 전장연은 유해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즉, 우영우는 비장애인 사회에 해를 주지 않지만, 전장연은 출퇴근 시간의 집회를 통해 당장 시민들에게 불편을 초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우영우와 전장연에 대한 이런 태도의 차이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장애에 대한 이중적 시선, 이중적 태도의 반영이라고 본다. 장애에 대한 이중적 태도는 보이는 장애인과 보이지 않는 장애인에 대한 태도의 이중성, 내 경계선 밖의 장애인과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는 장애인에 대한 태도의 이중성에서 온다.

신혼 시절, 비장애인인 아내와 함께 외출을 하면, 주변의 어르신들이 누구냐고 물으며 한마디씩 했다. 아내라고 하면 한결같이 “천사네 천사야!”라며 아내를 칭찬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아들이나 딸이 ’천사가 되겠다‘고(장애인과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은 결혼하기 힘들다. 배우자가 될 집안에서 반대가 심하기 때문이다. 남의 자녀에게는 천사라고 칭찬을 하는 일이 내 집안의 일이 되면 절대 안 되는 일이 된다. 이것이 바로 장애에 대한 이중적 태도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예고편 화면. ⓒENA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했다. 우리는 매일 하루 하루 늙어가고 있으며, 그것은 하루 하루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아가고 있고 또 잊고 살아가려 한다. 날마다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불편하고 두렵기 때문이다.

장애는 비장애인 사회에서 죽음과 같은 불편함과 두려움을 준다. 나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그래서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혐오감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장애와 장애인을 멀리하고 두려워하게 한다.

그래서 사회는 보이지 않는 장애인을 원하고 보이지 않는 장애인에 대해 관대하다. 보이지 않는 장애와 장애인은 장애에 대한 불편함과 두려움을 잊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드라마와 영화 속의 장애인은 보이지 않는 장애인이다.

나와 상관없는 장애인이며, 판타지이다. 마치 영화에서 병으로 죽어가는 주인공에 몰입되어도, 그것이 나의 죽음과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드라마와 영화 속의 장애인, 뉴스 속의 장애인은 나와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는 드라마와 영화 속의 장애인에게 관대하고 보이지 않는 장애인에게 관대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장애인이 계속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이러한 보이는 장애에 대한 불편함과 두려움은 경계선 안에 들어오는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불편함과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경계(영역)를 가지고 있다. 사람에 따라 이 자신만의 경계선에 타인이 들어오는 것을 쉽게 용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타인이 들어오는 것을 주저하고 경계하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영역에 쉽게 들어가려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다른 사람의 경계를 넘어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고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선을 넘는다고 표현한다.

우리 사회는 장애인이 선을 넘어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꺼려한다. 내 영역 밖의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필자가 참여했던 한 지역주민의 장애인인식에 대한 연구에서 설문에 참여한 주민의 대부분은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장애인과 함께 일하고 장애인이 지역 카페 등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함께 일하거나 지역 상점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는 선을 넘지 않는 것이고 내 경계선 안에 들어온다는 위협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녀들이 장애인과 함께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 비율이 훨씬 낮아졌다. 자신의 자녀들이 장애인과 함께 공부하면서 친구가 되고, 선을 넘어서 내 경계선 안에 들어오는 것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이러한 이중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장애인, 내 선 밖의 장애인에게는 한 없이 관대하며, 응원하고 지지한다. 그러나 그 장애인이 보이게 되면, 그래서 자신의 삶에 들어와 장애를 기억하게 하고, 장애에 대한 두려움을 상기시키면 태도는 달라진다.

장애인을 차별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시민들이 지하철 출근 시간에 집회를 하는 장애인은 자신의 출근에 피햬를 준다며 비난하고, 장애인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시민들이 자신의 음식점에 들어오는 장애인은 거부한다. 나와 상관없는 드라마 속의 우영우에게는 박수를 보내지만, 출근 시간에 잠깐의 불편을 주는 전장연에게는 비난과 혐오를 보낸다.

우리 모두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편함을 가지고 살아간다. 다만 순간 순간 그 사실을 잊고 있거나 잊고 싶을 뿐이다. 장애 역시 죽음만큼이나 인류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현실이다. 그러나 죽음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삶인 것처럼 장애 역시 자연스러운 인간의 삶이다.

이제 장애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를 멈추고 우리의 이중적 태도를 인정하고 그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드라마 속의 우영우에게만 박수를 보내지 말고, 지하철역에서 만나는 전장연의 활동가들에게도 박수를 보내야 한다. 보이는 장애인을 인정하고, 내 경계 안으로 들어오는 장애인에게도 차별 없이 대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드라마 속의 우영우가 우리 곁의 우영우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다워지는 길, 우리 사회가 성숙한 사회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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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융호 칼럼니스트 장애물없는생활환경시민연대 사무총장,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상임집행위원장, 서울시 명예부시장(장애)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사단법인 한국환경건축연구원에서 유니버설디자인과 장애물없는생활환경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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