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오만하다. 과학도 아니면서 본질을 이야기하고, 심리학도 아니면서 내면을 분석하고, 예술이 아니면서 미를 이야기하고, 윤리학이 아니면서 도를 이야기한다. 근대 철학은 하층 계급이나 소수자들의 차별을 외면하면서 특정 지식 집단의 소유물이 되었고, 동양철학은 모든 것을 버린다면서 모든 것을 다 얻으려 하고, 세상을 품은 듯하면서 세상을 비웃으며 조소하며 군림하는 꼰대 역할을 하였다.

‘차별 감정의 철학’을 저술한 나카지마 요시미치는 칸트 전문 독일 유학파 철학자이다. 철학에서 차별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것은 아니어서 저자도 심리학적 접근과 언어학적 접근을 섞어 고정관념을 제거하고 평등을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이상적인 완전한 비차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근대철학과 사회구조적 차별의 인권적 접근은 철학에서는 다루지 않으므로, 개인적 감정 측면에서 차별을 철학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알아보자. 그것이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는지, 꼰대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차별문제는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차별을 했을 때에도 불편하고, 혹시 차별을 통해 비난 받지 않을까 싶어서도 늘 불편하다. 평소 교통사고를 조심하듯이 긴장되고 초조하게 만든다. 차이처럼 차별 감정도 인간을 다채롭게 하는 요소인데, 철저하게 제거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인간은 에로스처럼 공격 충동은 본성이라고 프로이드가 말했다. 적이 없는 곳에는 동료도 없다. 단순히 구분 짓기에서, 비교하기, 그리고 공격하기는 차별로 연결된다. 장애 문제는 자신이 그것에 속하지 않은 것에 감사할 문제가 아니라 부채를 지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장애는 제약을 받는 자와 제약을 해결할 책임을 지는 두 집단이 있는 것이다.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아이는 학생이고 학생다움은 학교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당연히 여기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고정관념을 만들고 차별의 최대의 적이 된다. 그러나 차별을 이슈화하고 열광하는 상태도 위험하다. 차별을 역이용해 권력을 더 가지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차별 감정을 다룰 때 중요한 요소는 ‘자기비판 정신’이다.

차별은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며, 불쾌에서 출발한다. 장애를 하나의 문화다양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자신의 자식이 장애인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부정성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

정상화는 장애인을 정상으로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장애 자체도 사회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불쾌는 수동적 감정이지만 혐오는 능동적 감정이다. 포용의 통합사회는 혐오가 아닌 정상화 감정이 능동적으로 인정될 경우 가능할 것이다.

문이 바람에 의해 세게 닫히면 ‘앗!’ 하고 놀란 제스처를 하는데, 자신이 물을 세게 닫은 것이 아니라는 정상의 증거(신호)로 무브와 토크를 한 것이다. 실례를 하면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불쾌감을 수정하려는 행동이다.

왕따는 누군가를 재물로 삼는 것이다. 차별도 왕따처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정하고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러함을 현실을 가르쳐야 한다. 인권주의나 평화주의자니 이념적 입바른 소리보다 사실 있는 그대로 가르쳐주자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리고 차별을 주장하는 사람은 더욱 자기비판적이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옳다는 늘 평가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서열화나 권력 관계는 차별을 조장하므로 없애야 하는가? 입학시험은 능력자를 선발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권력은 파도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평온하게 균등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나카소네 총리가 미국은 흑인이 있어 지적 수준이 낮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미국국민들은 총리에게 화살을 퍼붓고 일본인을 만나면 토마토를 던지는 등 괴롭혔다. 총리의 차별만 다루고 아무도 일본인이 당하는 괴롭힘을 차별로 다루지 않았다.

사람을 싫어해서는 안 되는 걸까? 싫어함을 받지 않으려는 극단적인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이며 반성을 해야 한다. 학생에게 상냥함이나 배려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잔혹함을 가르치며 차별을 생각하게 해야 한다.

경멸은 혐오보다 더 의식이 강한 감정이다. 차별과 공포가 뒤따른다. 브리태니커 사전에 ‘니그로’를 불행한 인종이라며 나태하고 잔혹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천부적 권리는 백인에 한해 적용한 결과이며, 문명의 빛을 전한다는 핑계로 억압하는 것은 언젠가는 위협이 될 것이라는 공포에서 차별을 만든다. 차별은 사실관계이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가치관계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계급사회를 선호한다. 역사적으로도 타인의 집단 공격은 악을 해결한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복수이다. 독일 나치를 추종한 국민들도 자기비판 정신이 결여된 선량한 시민이었다. 그러므로 강경 차별 반대 운동가들도 위험한 존재이다.

혐오나 불쾌의 근절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보전해야 할 감정이지만 경멸은 자연법에 의해 올바른 행동을 하는 자에 대한 감정으로는 말살해야 할 감정이다. 차별 감정을 가지는 것을 법으로 금할 수는 없지만 그 표출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하위층이 상위층을 경멸할 경우에는 반드시 도덕적 탈을 쓴다. 명문대를 나왔으면서 윤리의식이 없다는 식이다. 능력과 윤리의식은 별개이다. 고상 하고자 하는 사람은 타인을 고상하지 않게 만들어 자신의 고상함을 확고하게 만든다.

투영은 차별을 조장하는데, 성욕을 여성에게 투영해 여성이 먼저 유혹했다는 말을 만드는 것과 같다. 차별감정의 뿌리에는 공포가 있다. 선량한 사람은 성 안에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성 밖에 사는 방식이 추방된 늑대와 선량한 양을 만든다. 피리부는 사나이에서 피차별자는 처음에는 쥐를 제거하지만 나중에는 피리로 아이들을 유인해 복수를 한다.

마녀사냥은 재앙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고, 피차별자에 대하여 공포와 경외의 이중구조가 있다. 그 두려움은 현대에도 존재한다. ‘죽을 사’자를 피하는 것, 길일을 정하는 것, 말이 씨가 된다며 수험생 앞에서 ‘떨어진다’는 말을 삼가고, 결혼식에서 ‘자른다’는 말을 삼간다. 경외가 없어지고 공포만 남을 때 피차별자는 두려운 존재가 된다.

차별을 없애려면 악을 없애면 된다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발전에는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다. 자긍심, 자부심, 허영심, 오만, 긍지 등의 감정은 우월감이라는 점에서 고매한 사람은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지만, 오만한 사람은 미워하고 질투한다.

니체는 고귀함괴 비천함을 대립하여 설명한 바 있는데, 고귀함을 가진 사람은 비천한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하류층에 무관심하지만 비천한 사람은 항상 부족한 사람과 비교해서 우위를 자각한다.

칸트는 이성이 존재하면서도 동물이기도 한 대단히 불안정한 인간존재를 존중하라고 했다. 저자는 미인도 아니지만 홀몸으로 고생하여 자식을 키웠다는 식의 ‘마이너스 자부심’에 대하여 강렬한 우월감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지적장애인은 법적 보호를 받지만 경계성 지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 철학은 포기한 이런 사각지대에 섬세한 정신을 가져야 한다. 대학생과 고졸 기술자가 방송에 나와 대학생이 고졸에게 이미 가는 길이 정해졌으니 부럽다거나, 대학에 들어갔으니 대단하다는 말에 ‘뭘요?’라는 반응은 내면에 깃든 우월감이다.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귀속본능이나, 가족지상주의 등은 사회적으로 차별을 보장하는 구조이다. 인간관계가 친밀한 사회는 서로를 감시하고 함부로 개인의 문제에 개입하는 사회다. 그리고 향상심을 유도하기 위해 상을 주는 것도 차별을 조장한다. 성과주의도 마찬가지다. 나치가 독일 국민에게 학살을 정당화한 것은 향상심에 호소한 결과다.

사회의 문제는 노력하느라 지쳐 이상행동을 하는 자가 아니라, 노력해도 안 되거나 노력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사회로 인한 현실에 지친 사람에 의해 문제가 발생한다. 불리한 사람은 공평하게 경쟁하면 질 것이 뻔한데, 불공정한 행동을 처벌한다. 여기에 차별문제가 없다고 잘못 생각한다.

칭찬은 동기를 부여하지만 칭찬은 차별의식을 만든다. 진정한 동기는 칭찬에 냉담해야 한다. 성실성은 감수성 면에서의 성실성과 신념 면에서의 성실성이 있다. 신념이 지나친 사람은 차별주의자가 되기 쉽다. 시선은 권력관계를 만들며 시선만으로도 차별을 할 수 있다.

언어는 모종의 힘을 행사하는 행위이다. 차별어는 언어 다양성을 해칠 수 있어 법으로 금할 문제가 아니라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남자’라고 말하면 남자는 사람의 의미인데, ‘좋은 여자’라고 말하면 남자에게 잘하는 ‘여자’로 인식된다. 장애인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당신이 장애인이어서 존경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위험을 알면서도 숨김없이 직언하는 것을 그리스어로 ‘파르헤지아’라고 한다. 이것이 선의 근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칸트는 최고의 선은 성실성과 행복의 합치라고 하였다. 히로아키는 ‘차별원론’에서 내 안의 권력과 마주하여 감수성이나 신념에 대한 성실성을 소중히 하면서 차별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마음을 열어서 파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으며, 칸트는 이러한 이성비판이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신이 부과한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법이나 운동이 아니라 선을 추구하는 자기비판적 이성이 진정한 차별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차별을 세상에서 없애려면 모두 철학자로 교육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차별에 대해 공포나 거부감으로 피로해질 수 있다는 점, 외부의 힘으로만 막을 것이 아님은 분명 철학이 주는 깨우침일 것이다. 아무리 사회적 모순으로 차별이 생산되었다고 하더라도 출발은 인간성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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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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