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동전의 앞 뒷면’, ‘장단점’ 이런 말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대부분의 제 자소서 첫 시작은 이렇습니다.

“‘인생은 언제나 동전의 앞 뒷면과 같다.’ 힘든 한계에 부딪혀도 뒤집어 보고 긍정적으로,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자만하지 않고 주의 깊게 행동하려는 제 마음속 좌우명입니다.”

저는 1994년에 불의의 사고로 다쳐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고, 저 또한 한동안 ‘왜 나만,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긴 걸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숨어 지내며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모든 게 원망스럽고, 이 세상이 모두 다 싫고 죽고 싶은 생각까지도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책하고 있을 때, 당시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고모부를 생각하니 살아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이 조금씩 들었고, 주변을 돌아보니 저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주어진 상황에 따라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사는 분들이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생각과 인식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동전의 뒷면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휠체어를 타야만 하는 장애인이 되어 앞으로는 평생 서지도 걷지도 뛰지도 못하고, 대소변 실수까지 하고 불행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좋은 점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좋은 면이라고 느낀 건, 저희 엄마입니다.

엄마는 초등학교 교사이셨고, 공부에 대한, 배우는 것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넘치는 분인데, 제가 다치기 전까지 그 열정을 모두 저에게 쏟아부으셨습니다. 공부는 물론이고,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피아노, 미술, 주산, 서예, 사군자, 한국무용, 장구, 가야금, 기타, 수영 등 정말 많은 학원을 다녔습니다. 1등을 해도 칭찬 한 번 들어본 적이 없었고 항상 저는 엄마의 기대에 늘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치고 나서 생사를 오가는 시간을 보내고 장애인이 되었을 때, 엄마에게 그 전까지의 기대가 남아 있었을까요? 당연히 건강하게 살아만 다오 였죠. 그래서 재활 치료를 하면서 조금씩 나아져서 대학을 가겠다고 내가 결정했고, 검정고시 수능을 치르고 할 때는 엄마에게는 더 이상 성적이 중요하지 않았고, 제가 그냥 하는 것에 무조건 잘했다고 해주는 겁니다. 저는 엄마의 칭찬과 격려에 너무 기뻤고, 지금도 다치고 좋은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좋은 면도 비슷한데, 나에 대한 모든 사람의 기대치가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노력해도 아주 열심히 노력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조금만 잘해도 아주 잘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봐줬습니다. 조금만 웃고 좋게 말하니 밝고 긍정적이라고 나를 평가해줬습니다. 타인의 평가가 중요하지 않고 휘둘리지 말아야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의 평가를 완전 무시하고 살 수만은 없는 게 인간입니다.

더군다나 저 역시 다치고 처음 밖으로 나왔을 때 잔뜩 주눅 들어 있고 정말 두려웠는데, (물론 편견이나 차별을 받은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나의 노력에 비해 사람들이 칭찬해주고 인정을 조금씩 해주니 오히려 신이 나서 더 잘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제가 결혼을 하고 나서 느낀 점인데, 쓰려고 보니 기대치가 낮아졌다는 얘기의 연장이네요~. 소개로 만난 남편은 제가 휠체어를 타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지만, 할 수 없는 부분도 많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의 다리가 되어주겠다며 달콤한(?) 말을 해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허니문 베이비로 신혼도 별로 없이 결혼 후 1년 만에 낳은 첫째, 첫째가 5~6개월 되던 때 들어선 둘째까지. 사실 친정 엄마가 제일 고생하셨지만, 남편도 낮에 일하고 밤 중 수유에 아기들 목욕, 젖병 소독 등 제가 할 일의 많은 부분을 다 했습니다. 아이들이 10살, 11살이 된 지금까지도 집안일의 많은 부분을 크게 군말 없이 해줍니다. 이런 부분은 정말 좋은 면이고 제가 너무나 복 받은 부분이지요.

필자의 연년생 딸들. 서로 안아주고 우애가 돈독한 편(사진 왼쪽)이며, 언니가 동생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스스로 잘 하는 아이들(오른쪽)이다. ⓒ박혜정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딸들이라 조금 더 차분하고 성숙한 면이 있겠지만, 4~5살 때부터 엄마인 제가 신체적으로는 많은 부분 해줄 수 없다는 걸 알아서인지 다른 또래들에 비해 스스로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6-7살 때부터 어린이집(한 5분 거리)을 그냥 둘이 걸어서 갔고, 지금은 초등 3, 4학년이니 20분 거리의 학교까지 무조건 둘이서 걸어갑니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 시국이라 원격 수업을 하든, 등교 수업을 하든지, 아침에 제가 출근하기 전에 깨우고 가면 식탁 위에 챙겨 놓은 아침을 알아서 먹고, 알아서 시간 맞춰 학교를 갑니다. 학교를 마치고도 방과 후 수업을 하고, 알아서 피아노 학원을 갔다가 집에 옵니다. 집에 엄마 아빠가 없어도 숙제하고 OOO라는 학습도 알아서 하고, 그 뒤로는 자유 시간(거의 TV, 휴대폰 유튜브 시청ㅋ)입니다.

​제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항상 만들기는 했습니다. 왜냐면, 전 뭘 같이 해주기 힘든 엄마이고, 그걸 일찍부터 아는 아이들이라 그런지, 잘 알아서 하는 편이랄까요~ 또, 어릴 때부터 휠체어 타고 있는 엄마를 밀어주고 도와줘서인지 지나가는 할머니가 수레를 끌고 가시면 밀어 드리고, 짐도 들어 드리고 참 착하답니다. 저는 이런 부분도 정말 너무 뿌듯하고 제가 다치지 않았으면 얻지 못했을 행복인 것 같습니다.

나에게는 안 좋은 일만 일어난다고 생각이 들고 힘든 순간에는 동전의 뒷면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힘든 것도 다 지나가게 마련이고 그래도 좋은 일, 좋은 뒷면을 보기 시작하면 인생이 더 행복하고 감사할 일이 많아질 것이라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루 아침에 장애인이 되어 휠체어를 타게 된 좌절의 상황에서도, 좋은 일은 찾으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밝게 웃어보십시오. 누구보다 더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으로 비춰질 것입니다. 사지마비로 정말 힘들지만, 그런 상황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조그만 무엇이든 열심히 해보세요. 누구보다 더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지금까지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좋은 면을 보고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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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정 칼럼니스트 글 쓰는 휠체어 여행가, 현혜(필명), 박혜정입니다. 1994년 고등학교 등굣길에 건물에서 간판이 떨어지는 사고로 척수 장애를 입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29년 동안 중증장애인으로 그래도 씩씩하고 당당하게 독립해서 살았습니다. 1998년부터 지금까지 혼자, 가족, 친구들과 우리나라, 해외를 누비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또, 여성 중증 장애를 가지고도 수많은 일을 하며 좌충우돌 씩씩하게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교육공무원으로 재직했고, <시련은 축복이었습니다>를 출간한 베스트셀러 작가, 강연가, 글 쓰는 휠체어 여행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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