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저시력 시각장애인이다. 생후 8개월 만에 얻게 된 시각장애는 그렇게 내 일상 속에 함께하고 있고 아마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선명한 세상은 내 뇌리에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 땅에 넘어졌기에 그 땅만 부둥켜안고 한탄한다면 요지부동인 세상이 달라질까? 우리는 아마 다양한 시행착오와 아픔 끝에 이를 너무나 잘 알기에 의지를 되씹으며 다시 넘어진 땅을 짚고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필자는 이 흐릿한 잔존 시력도 너무나 감사하다는 생각을 할 경우가 많다. 어설프지만 전맹 시각장애인 동료들을 도울 수 있는 기능적 도구로도 활용되고 있으며 익숙한 길이라면 독립보행도 가능케 하니 이 얼마나 소중한 신체적 자산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저시력 시각장애인들이 겪는 일상적 고충 WORST(BEST의 반대어) TOP 3을 언급하고자 함은 독자들에게 우리들에 대한 공감과 이해의 폭을 조금 더 넓혀 주기를 조심스레 요청 드리고 싶은 바람에 입각해서다.

먼저 저시력(抵視力)이라 함은 “두 눈의 시력이 의학적 수술 혹은 안경으로 교정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손상된 상태”를 의미한다. (네이버사전발췌)

물론 저시력인들도 잔존시력 상태에 따라 그 고충이 천차만별이며 스스로 불편을 체감하는 상황들도 상이할 것임을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40년 이상 당사자의 입장에서 살아온 체험들과 주변 같은 입장인 지인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듣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혀 둔다.

첫 번째 고충은 바로 “계단”이다.

아마 대부분의 저시력인이라면 이 단어만으로도 바로 부연설명 없이 자각할 것으로 사료된다. 사실 저시력 시각장애인들은 약한 시력과 양안의 시력차 등으로 원근감(遠近感)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나마 슈퍼? 저시력인들도 평소에는 보행을 잘하다가 가파른 계단이나 미끄럼방지 띠가 부착되어 있지 않는 계단 앞에서는 주춤거리기 일쑤일 것이다.

특히 계곡이나 비포장도로를 가게 되는 경우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들보다도 자유롭지 못하다. 필자 역시 바쁜 출근길 계단을 헛디디어 대굴대굴 구른 경험 이후에는 계단만 보면 다리에 힘이 주어지며 고 녀석과 힘겨루기를 한다.

그렇게 우리는 계단 높이를 짐작하지 못해 낮은 계단으로 잘못 인지하여 쿵 떨어지듯 발을 딛기도 하고 수평에 가까운 평지를 계단처럼 자각하여 조심스레 딛다 반전에 허탈한 웃음을 짓기도 하면서 일상과 마주한다.

두 번째 고충은 “문서작성”이다.

저시력인들에게 문서를 읽는 것 이상으로 또 어려운 것은 필기이다. 한글을 몰라서도 아닌데 어디선가에서 무언가를 체크하고 작성하라고 하면 식은땀부터 난다. 경비실에 택배를 찾으러 가는 일만 하더라도 촘촘한 칸 중 내 정보를 찾아 사인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와달라고 하면 되지? 라고 쉽게 말하는 분들도 있지만 외관상 표가 나지 않는 저시력인들도 꽤 많고 비장애인들에게 부연설명을 하는 것이 특히, 중도 저시력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힘겨움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 요즘과 같은 코로나 시기에는 커피 한잔을 마셔도 명부 작성을 요하니 지인 한 명은 당분간 커피도 자제해야겠다고 하소연한다. 사실 바쁜 점원들에게 손님의 개인정보를 적어달라는 것 자체가 쌍방의 입장에서 불편함을 만들어 내는 사안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필자 역시 쌍둥이 녀석들이 학원숙제를 하면 엄마 사인을 매번 받아와야 되는데 우리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아이가 직접 대필을 하기로 협의했다. 그런데 학원선생님이 학생과 엄마의 필체가 동일함을 의아하게 생각하시어 상황을 물으셨다.

아이는 “엄마가 시각장애인이라 제가 대신 사인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선생님의 반응이 완전 반전이다. “너 잘못 했다고 솔직히 말해야지. 아직 나이도 어린데 그런 거짓말을 하면 되니?” 그렇게 필자의 고충은 또 다른 해프닝이 되어 일상과 함께한다.

마지막 세 번째로 언급하고자 하는 고충은 “얼굴식별”이다.

즉 상대의 표정은 물론 그 상대의 눈, 코, 입, 얼굴 윤곽 등을 자세하게 볼 수 없으니 상대의 얼굴 식별이 쉬울 수 없다. 그나마 자주 보는 사람들은 목소리나 즐겨 입는 옷 등으로 구분은 하지만 대중들이 많을 때 특정한 누구를 찾는다든지 가끔 보는 지인들을 먼저 알아보고 인사하는 상황은 거의 드문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편이 단순한 일화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대인관계와 사회생활에 큰 지장이 된다는 점이다. 적극적인 마음은 있으나 그 행을 하기 위함에 있어 장벽이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고 또한 상대에게는 본의 아니게 오해의 여지를 드리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필자 역시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 사례가 있어 공유하고자 한다. 바로 아이들 돌잔치 때 있었던 일이다. 두 아이 즉 쌍둥이 돌잔치라 그런지 손님도 예상외로 두 배 이상 참석해 주셨다. 협소한 공간에 많은 분들이 오신데다가 아기까지 안고 있으니 나의 몰입도는 공중분해 된 상태였다.

거기다 여기저기서 인사를 해주시는데 사실 50%도 온전히 누구인지 인지 못하고 인사를 드린 것 같다. 특히 결혼식 때 한번 본 남편들의 지인들에게는 똑같은 표정과 리액션(reaction)으로 모두에게 공평한 인사를 전했다.

지나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중에서는 남편의 대표이사님도 있으셨고 멀리 시골에서 올라오신 시댁의 주요 친지들, 오래전 은혜를 입었었다는 신랑의 이전 직장동료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들이 오셨다고 한다. 특별한 인사를 전해야 하는 그분들에게도 필자는 다른 하객들과 다름없이 공평함을 합리화한 평의하게 그분들을 맞았다.

필자가 나열한 여러 고충들이 전맹 시각장애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비할 사안은 아닐지 모르나 잔존시력이 있다는 이유로 가끔은 간과하게 되는 저시력인들의 애로사항을 꼭 한번은 언급하고 싶었다. 더불어 이러한 고충을 나열하는 이유가 “그래서 많이 힘들다”는 푸념을 하고 싶어서는 단연코 아니다.

사회 안에서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인지해 준다면 우리들 역시 직면하게 되는 고충들을 좀 더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드릴 수 있을 것이다. 공감과 이해가 항상 공존하는 사회는 우리 장애인들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용기를 뿜어내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 원동력을 조금이라도 가속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서로 다양한 형태로 고충들을 알리고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작은 날개 짓이 공감과 이해가 바탕이 된 참된 미래 사회의 결과물이기를 간절히 꿈꾸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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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혜 칼럼니스트 집에서는 좌충우돌 쌍둥이들의 엄마! 직장에서는 소규모 사회복지시설의 책임자. 외부활동에서는 장애인인식개선 강사. 동네에서는 수다쟁이 언니. 이 모든 것과 함께하는 나의 장애. 장애인들은 슬프기만 해야 하나요? 우리를 바라만 봐도 안타까우신가요? 장애인의 삶을 쉽게 예단하지 마세요. 우여곡절 속에서도 위풍당당 긍정적 에너지를 품고 매일을 살아가는 모든 장애인동료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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